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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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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풍갈 날을 설레이던 마음으로 기다리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오빠생각"이라는 노래에는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이 노래처럼 어린 시절에는 선물을 기다리면서 자랐다. 청소년기에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노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결혼을 해서는 아내는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부모는 군대 간 아들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기다림은 우리의 삶과 친숙하다.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애달픈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하던 의사였다. 장기려 박사는, 45년간을, 북한에 두고 온 아내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절개를 지키다가 지난 95년에 세상을 떴다.
한편 기다림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차원의 기다림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은 조국의 광복을 36년간이나 기다렸다. 지금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시대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기다림은 다양하다. 기다림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의 기다림이 있고, 또 기다림의 가치나 비중으로 보아서 사소한 기다림에서부터 중요한 기다림이 있다.
이제 교회력으로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대림절은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에 시작된다. 대림절에는 주일이 모두 네 번 있다. 대림절은 대강절이라고 하고, 강림절이라고도 한다. 구세주의 탄생이 가까워 오는 이 때, 메시야를 기다리던 역사적 배경과, 메시야를 기다리던 모범적인 신앙인인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을 살펴보며, 우리는 대림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1.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역사적 배경과 그 실현
히브리말로 메시야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메시야를 희랍어 즉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이다. 구약성서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시킨 직임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었다. 그런데 메시야란 주로 백성을 다스리던 왕을 가리키고 있다.
솔로몬왕 이후 이스라엘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그 후에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게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유대인들의 생활은 포로생활을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상 자유롭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이후 로마의 정복과 통치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갈망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에 커다란 기대를 가졌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만이 민족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모든 것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지배가 실현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에 가져오실 분, 그가 바로 메시야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이방인인 로마의 가혹한 지배와, 같은 민족이면서도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지도자들의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착취를 받는 고통 중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대의 모든 백성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엄밀하게 준수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바치고, 식사 전에 손을 꼭 씻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불결한 것과 부정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며, 메시야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과 규범을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에세네파 사람들이다. 에세네파 사람들과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법 규범의 준수와 정화된 삶으로 그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시몬이 속해 있었던 혁명당원들은 무력을 써서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돌입을 촉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섬기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의 인구조사, 조세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항하여 싸웠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원하던 해방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다림과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셨는가
먼저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율법에 어긋나는 죄인처럼 행동하셨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예수님은 혁명당원의 생각과는 달리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를 몰아내지도 않으셨다. 즉 예수님은 결코 유대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거나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의미의 해방으로만 축소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자기방식대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유대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세상의 철저한 쇄신을 요구하셨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으로, 세상의 통치자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겨자씨와 같은(마13:31), 혹은 밀가루 반죽에 섞인 누룩(마13:33)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흘러 넘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이웃 사랑에 대한 모범으로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결국엔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더욱이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죽음과 어둠과 죄를 이기시고 생명과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셨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2.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
1) 시므온(25-35)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이었다. 그는 제사장도 상류지배계층도 아니었고 평신도였다. 그런데 그에게 일생의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에 두 눈으로 메시야를 보는 것"(26)이었다. 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죽기 전에 그의 두 눈으로 꼭 민족통일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는 죽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그의 두 눈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여 그 눈이 꼭 통일되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유언을 해서 그대로 집행되었다(홍근수,인생의 계절, 20
3. ). 가슴에 사무친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감는 법이다. 바로 시므온은 이런 심정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기도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가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성전에서 밤낮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마침 아기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에서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다. 시므온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만나보는 것, 그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고, 그것이 남은 여생을 사는 목적이었다. 시므온은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를 자기 팔에 받아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
2) 안나(36-38)
안나라는 여인 역시 결혼한 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그렇다면 다시 재혼해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나는 남편이나 자녀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두었다.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안나 할머니는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되고, 피부는 주름살이 깊이 패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나는 금식하며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 섬기기를 계속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말이다(38). 그러던 안나는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3. 새롭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자세
기다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있을 때 기다림은 결코 지루하거나 소극적이지 않다. 희망은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내게 한다. 희망을 잃어버릴 때 기다림은 소극적이 되고 급기야는 기다림에 동반되어야만 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미약함과 배반의 죄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또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해마다 때를 정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또한 그렇게 오시는 주님은 어디 특별한 곳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며, 생활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이 대림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반갑고 귀한 손님을 기다릴 때는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몸단장을 단정히 한 후 맞을 준비를 하듯이, 죄로 더러워진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여 죄악을 씻어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기다리는 그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에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기쁨과 희망찬 설레임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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