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기다림의 신앙
본문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엘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Homo Esperans,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간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이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가치있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성공적인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인다. 결혼한 부부는 자식을 기다린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장을 기다린다. 군에 입대한 청년은 제대의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건강의 날을 기다린다. 수능고시를 본 학생들은 발표의 날을 긴장하며 기다린다. 대선에 출마한 자들은 대통령의 야망을 꿈꾸며 기다린다. 우리 성광의 성도들은 저 석사동 안마산 기슭에 점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성전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는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다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편해도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때 의욕을 잃어버리고 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욕망, 야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 야망이 없으면 내일을 희망하며 살지 못한다. 인간은 이 야망 때문에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 야망이란 단어는 마치 야누스의 얼굴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다. 서로 상반되는 얼굴이다. 성경에 야망이란 말을 어떤 때에는 좋은 의미로 표현하고 어떤 때문에는 나쁜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믿음과 아름다운 인격을 소유한 자에게는 선을 추구하는 야망으로 표현되고 지나친 욕망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죄악 된 욕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기다림도 이 두 가지 중에 속한다. 나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12월이 되면 대강절이 찾아온다. 교회력에는 대강절부터 이미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강절은 꿈과 희망의 절기이다. 대망의 절기이다. 그것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 자들은 세상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산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라고 하셨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가 히브리서 12: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
는 것이 믿음이다. 참 믿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며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오늘 본문에 기다림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자가 있다. 시몬이란 할아버지이다. 그는 일평생을 오직 한가지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았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까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하는가 인생의 참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인생의 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사건으로 두 사람을 예수님의 탄생의 무대에 대표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시므온과 안나라고 하는 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성공한 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둘 다 늙었다.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에서 이 두 늙은이들을 등장시키고 있는가 육적인 시각으로는 대단치 않으나 믿음으로, 영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자였다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는 어떤 자인가 의로운 자이다. 경건한 자이다. 시대를 구원하는 자는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다. 이런 자들이 나라와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온갖 능력을 갖춘 자라도
의롭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하면
그 자신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정치가가 세상을 살린 것이 아니다. 의로운 자가 세상을 살렸다. 정직한 자가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오는 대선에 어떤 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의로운 자를 선택해야 한다. 정직한 자를 선택해야 한다. 정의로운 자를 선택해야 그런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 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자를 찾으셨는가 의인을 찾으셨다. 의인 열명을 찾으셨다. 예루살렘 멸망 때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의인 몇 명을 찾으라고 하셨는가 의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왜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망하는가 돈이 없어서인가 지식이 없어서인가 군사력이 약해서인가 오직 한가지, 의롭고 경건한 자가 없어서이다. 의롭고 경건한 자 한 사람은 백만명의 군대보다 더 강하다. 의롭고 경건한 한 사람은 수억 달라의 돈의 힘보다 더 크다. 군대나 돈이 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경건한 자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살리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시므온 시대에 오셨는가 성령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시므온이 살아 있을 때 오셨다.
예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의로운 한 사람, 경건한 사람의 영향은 이렇게 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자의 기다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그 시대를 살린 것이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다. 야고보서 5: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하신 말씀처럼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은 가장 역사하는 힘이 많았던 것이다. 시므온의 기다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다.
2.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시므온은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지 않았다.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렸다. 유대나라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다.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을 기다렸다.
시므온 억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았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비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받은 비젼이다.
고통과 죄악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이다. 인간의 위로는 고통을 없이하지 못한다. 인간의 위로는 죄악을 없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로는 참 위로가 못 된다.
참 위로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참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참 위로자는 성령이시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사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 만은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다. 먼 미래의 기다림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이루어질 기다림이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다. 믿음의 기다림이다.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이다. 가장 축복된 기다림이다.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다.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다. 우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죽어가는 자들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 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성광의 성도 여러분, 대강절은 이렇게 좋은 절기이다. 대강절은 은혜 위에 은혜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축복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사랑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기쁨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위로의 절기이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말고,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말고, 순간적인 헛된 것을 기다리지 말고, 영원한 것을 기다리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다리자.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기다리자. 신령한 것을 기다리자.
3. 시므온은 성령과 동행하는 자였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해서 25절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하였다.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다. 우리는 오순절에 이후에만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항상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대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가운데도 성령충만한 생활을 한 것은 그의 인생이 얼마나 경건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살고 있으며 얼마나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주의 일을 하다가도 나이가 많으면 모든 일을 다 포기하고 그날그날 아무 의미없이, 기다림이나 설레임이나, 보람됨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삶을 살 때 젊은이 못지 않게 희망과 비젼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성령충만한 자는 나이가 들수록 늙어지고 추해지고 약해지고 보람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워지고
기쁨이 충만하고
믿음과 인격이 성숙해지고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므온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이상한 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진실되고 성숙하게 희망과 꿈에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육의 소욕에 끌려 자기의 이익과 육적인 만족과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며, 세상의 향락과 정욕에 끌려는 사는 세속적인 삶, 땅에 속한 추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
가정에 이루어지고
교회에 이루어지고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거룩한 삶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다. 경건된 삶이다.
두 종류의 늙은이들이 있다. 세상에 얽매여,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것만을 집착해서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참으로 불쌍한 늙은이들이 있다.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는 축복된 늙은이들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자들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4.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찬양한 자였다
본문 28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는 아기이지만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런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자는 얼마나 더 큰 자인가 그런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찬양한 자는 얼마나 위대한 찬양자인가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은 자는 온 세상을 가슴에 안은 자 보다 더 크고 위대한 자이다.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그 가슴은 온 세상 보다 더 넓고 깊은 가슴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가슴이다.
이 세상에서 시므온보다 더 넓은 가슴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더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우리 남자의 가슴은 넓어야 한다. 어떤 것도 다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남자의 가슴은 부드러워야 한다. 너그럽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남자의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뜨거워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서 다 용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슴에서 다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슴에서 다 용납되어야 한다. 아기 예수를 안은 가슴으로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5.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축복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라고 하셨다. 저희란 예수님의 부모님을 비롯한 아기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모님을 축복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특권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까지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의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이다.
이번 성탄에 우리의 이 가슴에 미움을 안고 경배해서는 안 된다. 시기와 질투를 안고 찬양해서는 안 된다. 죄악을 안고 성탄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아기 예수님을 안고 찬양하자. 아기 예수님을 안고 경배하자.
제주의 상징적인 것은 돌할아버지이다. 제주말로는 돌하루방이라고 한다. 돌하루방의 유래가 여러가지 있으나 그 중의 하나는 우리 나라의 충신이 간신들의 미움을 받아 죄인의 누명을 쓰고 멀리 제주섬으로 귀향을 갔다. 이 충신은 임금님께서 모든 진상을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자기를 다시 임금님 곁으로 부르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 충신은 제주의 바닷가에 마치 바윗돌처럼 서서 멀리 육지를 바라보며 언제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시나 기대하며 임금님의 소식을 기다라고 또 기다렸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수 십년이 지나는 사이 충신은 그만 돌로 변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제주의 돌하르방은 기다림에 지쳐 돌하르방이 되고 말았다.
우리 성도의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다. 막연한 기다림도 아니다. 세속적인 기다림도 아니다. 우리는 기다림으로 돌하르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천국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어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참된 성도는 현세보다 내세를 더 사모한다. 이 세상보다 천국을 더 사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부는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모하며 더 사랑하며 더 기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 고대 식민지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의 삶이 어떠했는가 육체의 쇠잔해 가는 고통, 젊은이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고독, 망국의 역사에 대한 회한, 그리고 벗들과 가족과의 죽음의 이별을 해야만 하는 온갖 고초를 겪는 생활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현세보다 내세를 더 사모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기다렸다.
대강절은 2천년 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며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이 세상 끝날 역사의 완성자로 세상을 심판하실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대강절이다.
슬기로운 다섯 신부들처럼 우리의 손에 등불을 들자. 그 등불은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한 등불, 복음으로 빛나는 등불을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의 입은 시므온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며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며 사모하여 기다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대강절을 사는 성도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예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되는 성도들의 삶이다.
강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가치있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성공적인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인다. 결혼한 부부는 자식을 기다린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장을 기다린다. 군에 입대한 청년은 제대의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건강의 날을 기다린다. 수능고시를 본 학생들은 발표의 날을 긴장하며 기다린다. 대선에 출마한 자들은 대통령의 야망을 꿈꾸며 기다린다. 우리 성광의 성도들은 저 석사동 안마산 기슭에 점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성전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는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다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편해도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때 의욕을 잃어버리고 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욕망, 야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 야망이 없으면 내일을 희망하며 살지 못한다. 인간은 이 야망 때문에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 야망이란 단어는 마치 야누스의 얼굴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다. 서로 상반되는 얼굴이다. 성경에 야망이란 말을 어떤 때에는 좋은 의미로 표현하고 어떤 때문에는 나쁜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믿음과 아름다운 인격을 소유한 자에게는 선을 추구하는 야망으로 표현되고 지나친 욕망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죄악 된 욕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기다림도 이 두 가지 중에 속한다. 나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12월이 되면 대강절이 찾아온다. 교회력에는 대강절부터 이미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강절은 꿈과 희망의 절기이다. 대망의 절기이다. 그것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 자들은 세상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산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라고 하셨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가 히브리서 12: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
는 것이 믿음이다. 참 믿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며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오늘 본문에 기다림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자가 있다. 시몬이란 할아버지이다. 그는 일평생을 오직 한가지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았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까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하는가 인생의 참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인생의 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사건으로 두 사람을 예수님의 탄생의 무대에 대표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시므온과 안나라고 하는 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성공한 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둘 다 늙었다.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에서 이 두 늙은이들을 등장시키고 있는가 육적인 시각으로는 대단치 않으나 믿음으로, 영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자였다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는 어떤 자인가 의로운 자이다. 경건한 자이다. 시대를 구원하는 자는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다. 이런 자들이 나라와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온갖 능력을 갖춘 자라도
의롭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하면
그 자신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정치가가 세상을 살린 것이 아니다. 의로운 자가 세상을 살렸다. 정직한 자가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오는 대선에 어떤 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의로운 자를 선택해야 한다. 정직한 자를 선택해야 한다. 정의로운 자를 선택해야 그런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 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자를 찾으셨는가 의인을 찾으셨다. 의인 열명을 찾으셨다. 예루살렘 멸망 때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의인 몇 명을 찾으라고 하셨는가 의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왜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망하는가 돈이 없어서인가 지식이 없어서인가 군사력이 약해서인가 오직 한가지, 의롭고 경건한 자가 없어서이다. 의롭고 경건한 자 한 사람은 백만명의 군대보다 더 강하다. 의롭고 경건한 한 사람은 수억 달라의 돈의 힘보다 더 크다. 군대나 돈이 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경건한 자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살리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시므온 시대에 오셨는가 성령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시므온이 살아 있을 때 오셨다.
예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의로운 한 사람, 경건한 사람의 영향은 이렇게 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자의 기다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그 시대를 살린 것이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다. 야고보서 5: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하신 말씀처럼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은 가장 역사하는 힘이 많았던 것이다. 시므온의 기다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다.
2.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시므온은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지 않았다.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렸다. 유대나라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다.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을 기다렸다.
시므온 억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았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비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받은 비젼이다.
고통과 죄악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이다. 인간의 위로는 고통을 없이하지 못한다. 인간의 위로는 죄악을 없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로는 참 위로가 못 된다.
참 위로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참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참 위로자는 성령이시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사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 만은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다. 먼 미래의 기다림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이루어질 기다림이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다. 믿음의 기다림이다.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이다. 가장 축복된 기다림이다.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다.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다. 우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죽어가는 자들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 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성광의 성도 여러분, 대강절은 이렇게 좋은 절기이다. 대강절은 은혜 위에 은혜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축복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사랑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기쁨의 절기이다. 대강절은 위로의 절기이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말고,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말고, 순간적인 헛된 것을 기다리지 말고, 영원한 것을 기다리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다리자.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기다리자. 신령한 것을 기다리자.
3. 시므온은 성령과 동행하는 자였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해서 25절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하였다.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다. 우리는 오순절에 이후에만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항상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대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가운데도 성령충만한 생활을 한 것은 그의 인생이 얼마나 경건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살고 있으며 얼마나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주의 일을 하다가도 나이가 많으면 모든 일을 다 포기하고 그날그날 아무 의미없이, 기다림이나 설레임이나, 보람됨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삶을 살 때 젊은이 못지 않게 희망과 비젼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성령충만한 자는 나이가 들수록 늙어지고 추해지고 약해지고 보람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워지고
기쁨이 충만하고
믿음과 인격이 성숙해지고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므온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이상한 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진실되고 성숙하게 희망과 꿈에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육의 소욕에 끌려 자기의 이익과 육적인 만족과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며, 세상의 향락과 정욕에 끌려는 사는 세속적인 삶, 땅에 속한 추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
가정에 이루어지고
교회에 이루어지고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거룩한 삶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다. 경건된 삶이다.
두 종류의 늙은이들이 있다. 세상에 얽매여,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것만을 집착해서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참으로 불쌍한 늙은이들이 있다.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는 축복된 늙은이들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자들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4.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찬양한 자였다
본문 28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는 아기이지만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런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자는 얼마나 더 큰 자인가 그런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찬양한 자는 얼마나 위대한 찬양자인가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은 자는 온 세상을 가슴에 안은 자 보다 더 크고 위대한 자이다.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그 가슴은 온 세상 보다 더 넓고 깊은 가슴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가슴이다.
이 세상에서 시므온보다 더 넓은 가슴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더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우리 남자의 가슴은 넓어야 한다. 어떤 것도 다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남자의 가슴은 부드러워야 한다. 너그럽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남자의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하고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뜨거워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워야 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서 다 용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슴에서 다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슴에서 다 용납되어야 한다. 아기 예수를 안은 가슴으로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5.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축복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라고 하셨다. 저희란 예수님의 부모님을 비롯한 아기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모님을 축복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특권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까지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의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이다.
이번 성탄에 우리의 이 가슴에 미움을 안고 경배해서는 안 된다. 시기와 질투를 안고 찬양해서는 안 된다. 죄악을 안고 성탄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아기 예수님을 안고 찬양하자. 아기 예수님을 안고 경배하자.
제주의 상징적인 것은 돌할아버지이다. 제주말로는 돌하루방이라고 한다. 돌하루방의 유래가 여러가지 있으나 그 중의 하나는 우리 나라의 충신이 간신들의 미움을 받아 죄인의 누명을 쓰고 멀리 제주섬으로 귀향을 갔다. 이 충신은 임금님께서 모든 진상을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자기를 다시 임금님 곁으로 부르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 충신은 제주의 바닷가에 마치 바윗돌처럼 서서 멀리 육지를 바라보며 언제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시나 기대하며 임금님의 소식을 기다라고 또 기다렸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수 십년이 지나는 사이 충신은 그만 돌로 변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제주의 돌하르방은 기다림에 지쳐 돌하르방이 되고 말았다.
우리 성도의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다. 막연한 기다림도 아니다. 세속적인 기다림도 아니다. 우리는 기다림으로 돌하르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천국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어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참된 성도는 현세보다 내세를 더 사모한다. 이 세상보다 천국을 더 사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부는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모하며 더 사랑하며 더 기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 고대 식민지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의 삶이 어떠했는가 육체의 쇠잔해 가는 고통, 젊은이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고독, 망국의 역사에 대한 회한, 그리고 벗들과 가족과의 죽음의 이별을 해야만 하는 온갖 고초를 겪는 생활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현세보다 내세를 더 사모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기다렸다.
대강절은 2천년 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며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이 세상 끝날 역사의 완성자로 세상을 심판하실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대강절이다.
슬기로운 다섯 신부들처럼 우리의 손에 등불을 들자. 그 등불은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한 등불, 복음으로 빛나는 등불을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의 입은 시므온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며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며 사모하여 기다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대강절을 사는 성도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예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되는 성도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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