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본문
다음주는 성탄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고는 있으나 그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아는데는 별 관심도 없으며 또한 잘못 알고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누구신지를 교훈 하시며 또 덧붙여서 예수님과 정 반대되는 사람들을 보이심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정확히 알게 해주십니다.
본문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발버둥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그만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심으로 능숙하게 정치적인 올무를 벗어납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시저의 초상이 있으므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본문 앞 13절부터 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올무는 그네들이 좋아하는 Torah의 핵심부인 출애굽기를 들어서 벗어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임을 설명하시고는 아브라함의 영혼과 육체, 이삭의 영혼 육체, 야곱의 영혼 육체의 여호와 하나님이라서 이 각각의 영혼뿐만 아니라 각각의 육체를 영원히 보전하는 여호와 하나님 이신데 어찌 부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3번째 종교적인 올무는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냐고 묻는 질문인데 영원한 계명인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합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우선 순위를 결정하심으로 벗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34절에는 ”그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나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계교가 깨어진 것을 아신 주님은 오늘 본문으로써 대적자들을 공격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 대상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또 흰색의 옷을 입으므로 어디를 가나 눈에 잘 뜨이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비싸고 좋은 옷만 입는 model같은 존재요, 마치 흙투성이가 되어있는 닭장 가운데서 흰 백로처럼 다니는 존재들입니다.
유명한 신약학자 예레미아는 그의 저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란 책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중에 있는 바쁜 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서기관이 지나갈 때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랍비”(나의 위대한 분의 뜻)나 ”주인님”, 또는 ”아버지”의 존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항상 연회나 잔치가 있으면 이들은 음식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장식품처럼 꼭 있어야 하는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노인이나 심지어 자기 부모보다 더 앞선 위치에 앉거나 대접받았습니다. 회당에 오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며 일반인들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들의 경건한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빤히 쳐다보시며 반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시며 다음으로 서기관들을 근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바른 신앙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질문을 시작하자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선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소 가벼운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즉 ”어찌하여 서기관들이(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라고 묻습니다. 구약에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구약말씀을 생각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즉 사무엘하 7장 12절이나 이사야 9장 7절, 예레미아 23장 5절 후반에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와 다윗의 혈통과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유도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초자연적인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36절에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성경적 놀라움을 던져주십니다. 이는 시편 110편 1절 말씀으로 서기관들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구절의 권위를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서, ”여보게,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지. 자, 시편 110편에 다윗이 말한 것을 보면 주(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주(구세주, 메시아)께 말씀하시는데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고 하셨다고 되어있어. ”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반격하시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해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서 ”어째서 메시아가 동시에 다윗의 아들도 되고 다윗의 주님이 되느냐 만약에 메시아 그가 단지 인간이라면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생각으로는 No answer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문이라고 하는 성경을 사용하여서 서기관들의 제한된, 불완전한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보셨다시피 여호와 하나님이요 인간이라는 이 2중성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야만 성경의 요구조건이 만족됨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이 사도시대의 교회가 반복해서 외쳤던 점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행전 2:34-36)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시편 110편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초자연적 우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장 13절은 초자연적 예수가 시편 110편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 대화는 당신 스스로가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고지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요 동시에 인간으로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입이 여호와 하나님인 본성에 의해 통제되고 의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 주가 채 지나기 전에 다윗의 자손인 육체가 죽어 시편 22편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부활을 통하여 강력히 증명됩니다. 마침내는 승천하셔서 시편 110편 1절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를 성취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서기관들에게 한 이 질문을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본문 37절 말미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의 중심을 조금밖에 알지 못했어도 그 위세 당당한 서기관들이 끙끙대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상황을 벗어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정치적, 세상적, 인간적 왕국과 메시아를 생각하는 동안 그들은 성경의 영적 의미에는 까막눈일 뿐임을 넌지시 가르쳐 주시고 나서는 역시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시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시대적 문화에 맥을 못 추고 지내왔음을 교회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용담”이라는 책을 쓴 Arthur Bryant경은 그 책 ”어두운 사탄의 공장”이라는 장에서 19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청소년 학대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9살이나 8살 먹은 소년소녀들이 탄광 노동자로 착취당하는 것은 그 당시 예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3살 짜리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소년소녀들이 통상 16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1833년 보고서에도 보면 많은 제조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833년 면화공장에는 60,000명의 남자 어른과 65,000명의 여자 어른, 84,000명의 14세 미만의 소년소녀가 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류층의 고용인들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자였으며 매일 돈을 남용하고 기업확장으로 즐거워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당시 교회는 수수방관만 하였습니다. 미국도 노예제도에 오히려 동조하고 찬성한 교회와 교단이 많았습니다. 한국도 신사참배를 주장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한 교계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성경말씀이 세상문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혼율은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는 신자나 비신자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사상이 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의 경고가 축소되거나 그냥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역사인 영국의 산업주의, 미국의 노예주의, 한국의 사대주의의 실상이 오늘날 진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이상한 것 같이,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산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들이 과연 어떤 교인이었냐고 물을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초대교회시대의 때묻지 않은 눈을 하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질긴 썩은 문화를 우리 존재로부터 끊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제 38절에서 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간접적인 공격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으로 한 단계 높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엄 있는 복장에 대해 분노로 대적하십니다. 칭찬과 지위에 병든 자들은 오늘도 도처에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글을 읽어보면 목사가 무슨 직책과 명함이 그렇게도 많은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쓰여있습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교회보다는 비행기 속에 있는 시간이 많고 강단보다는 TV에 많이 나타나는 우스운 사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앉으면서 까지도 꼿꼿이 앉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들과 조금도 같지가 않았으며 절대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40절에 보니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종교를 빗댄 탐심을 과감히 대적하십니다. 워렌 워어스비 교수는 ”19세기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보고 죄를 대적하고, 회개하고, 복음에 합당한 진실한 교회가 되라고 외치고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거짓되고 자존심 세고 이익만 챙기려는 자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본문 40절 후반에 보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나니”라고 나옵니다. 오랜 신앙생활과 많은 성경지식을 가진 자들 중에 조금씩 타락해 감으로써 믿음 떠난 지 꽤 되어서까지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도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고 충고합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면서 오늘 본문이 던지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보겠습니다. 첫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읽기를 즐겨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시대 문화에 젖어서 말씀이 우리 맘에 와 닿지가 않습니까 진정으로 말씀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 기독교가 조심스럽고도 어찌 보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성경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까 불나비처럼 권력과 인기와 돈을 따라다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든, 청소년 사역자든, 주일학교 교사든, 성경공부 지도자든 그 어떤 교회 직책을 가졌든 간에 그 동기가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진정으로 거룩하게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큰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2절 말씀대로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답뿐이라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요 지금부터 영원히 생명에서 분리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신 다윗의 자손이었고 육신으로 오신 주님으로 고백된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영혼과 바른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고, 사랑으로 육신을 입어 다윗의 자손이 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스스로 부나 권력이나 특권을 결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모델이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하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 하시며, 우리 모두가 자기 모습을 닮도록 기도하시며,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우리의 조그만 아픔에도 함께 하시며,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이 화하여 영원히 기뻐하게 될 그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더 많이 믿을수록 당신은 더욱더 기뻐하게 되고 영혼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본문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발버둥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그만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심으로 능숙하게 정치적인 올무를 벗어납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시저의 초상이 있으므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본문 앞 13절부터 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올무는 그네들이 좋아하는 Torah의 핵심부인 출애굽기를 들어서 벗어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임을 설명하시고는 아브라함의 영혼과 육체, 이삭의 영혼 육체, 야곱의 영혼 육체의 여호와 하나님이라서 이 각각의 영혼뿐만 아니라 각각의 육체를 영원히 보전하는 여호와 하나님 이신데 어찌 부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3번째 종교적인 올무는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냐고 묻는 질문인데 영원한 계명인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합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우선 순위를 결정하심으로 벗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34절에는 ”그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나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계교가 깨어진 것을 아신 주님은 오늘 본문으로써 대적자들을 공격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 대상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또 흰색의 옷을 입으므로 어디를 가나 눈에 잘 뜨이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비싸고 좋은 옷만 입는 model같은 존재요, 마치 흙투성이가 되어있는 닭장 가운데서 흰 백로처럼 다니는 존재들입니다.
유명한 신약학자 예레미아는 그의 저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란 책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중에 있는 바쁜 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서기관이 지나갈 때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랍비”(나의 위대한 분의 뜻)나 ”주인님”, 또는 ”아버지”의 존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항상 연회나 잔치가 있으면 이들은 음식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장식품처럼 꼭 있어야 하는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노인이나 심지어 자기 부모보다 더 앞선 위치에 앉거나 대접받았습니다. 회당에 오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며 일반인들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들의 경건한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빤히 쳐다보시며 반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시며 다음으로 서기관들을 근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바른 신앙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질문을 시작하자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선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소 가벼운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즉 ”어찌하여 서기관들이(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라고 묻습니다. 구약에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구약말씀을 생각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즉 사무엘하 7장 12절이나 이사야 9장 7절, 예레미아 23장 5절 후반에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와 다윗의 혈통과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유도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초자연적인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36절에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성경적 놀라움을 던져주십니다. 이는 시편 110편 1절 말씀으로 서기관들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구절의 권위를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서, ”여보게,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지. 자, 시편 110편에 다윗이 말한 것을 보면 주(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주(구세주, 메시아)께 말씀하시는데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고 하셨다고 되어있어. ”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반격하시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해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서 ”어째서 메시아가 동시에 다윗의 아들도 되고 다윗의 주님이 되느냐 만약에 메시아 그가 단지 인간이라면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생각으로는 No answer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문이라고 하는 성경을 사용하여서 서기관들의 제한된, 불완전한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보셨다시피 여호와 하나님이요 인간이라는 이 2중성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야만 성경의 요구조건이 만족됨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이 사도시대의 교회가 반복해서 외쳤던 점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행전 2:34-36)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시편 110편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초자연적 우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장 13절은 초자연적 예수가 시편 110편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 대화는 당신 스스로가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고지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요 동시에 인간으로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입이 여호와 하나님인 본성에 의해 통제되고 의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 주가 채 지나기 전에 다윗의 자손인 육체가 죽어 시편 22편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부활을 통하여 강력히 증명됩니다. 마침내는 승천하셔서 시편 110편 1절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를 성취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서기관들에게 한 이 질문을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본문 37절 말미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의 중심을 조금밖에 알지 못했어도 그 위세 당당한 서기관들이 끙끙대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상황을 벗어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정치적, 세상적, 인간적 왕국과 메시아를 생각하는 동안 그들은 성경의 영적 의미에는 까막눈일 뿐임을 넌지시 가르쳐 주시고 나서는 역시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시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시대적 문화에 맥을 못 추고 지내왔음을 교회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용담”이라는 책을 쓴 Arthur Bryant경은 그 책 ”어두운 사탄의 공장”이라는 장에서 19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청소년 학대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9살이나 8살 먹은 소년소녀들이 탄광 노동자로 착취당하는 것은 그 당시 예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3살 짜리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소년소녀들이 통상 16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1833년 보고서에도 보면 많은 제조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833년 면화공장에는 60,000명의 남자 어른과 65,000명의 여자 어른, 84,000명의 14세 미만의 소년소녀가 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류층의 고용인들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자였으며 매일 돈을 남용하고 기업확장으로 즐거워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당시 교회는 수수방관만 하였습니다. 미국도 노예제도에 오히려 동조하고 찬성한 교회와 교단이 많았습니다. 한국도 신사참배를 주장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한 교계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성경말씀이 세상문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혼율은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는 신자나 비신자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사상이 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의 경고가 축소되거나 그냥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역사인 영국의 산업주의, 미국의 노예주의, 한국의 사대주의의 실상이 오늘날 진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이상한 것 같이,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산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들이 과연 어떤 교인이었냐고 물을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초대교회시대의 때묻지 않은 눈을 하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질긴 썩은 문화를 우리 존재로부터 끊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제 38절에서 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간접적인 공격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으로 한 단계 높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엄 있는 복장에 대해 분노로 대적하십니다. 칭찬과 지위에 병든 자들은 오늘도 도처에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글을 읽어보면 목사가 무슨 직책과 명함이 그렇게도 많은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쓰여있습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교회보다는 비행기 속에 있는 시간이 많고 강단보다는 TV에 많이 나타나는 우스운 사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앉으면서 까지도 꼿꼿이 앉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들과 조금도 같지가 않았으며 절대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40절에 보니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종교를 빗댄 탐심을 과감히 대적하십니다. 워렌 워어스비 교수는 ”19세기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보고 죄를 대적하고, 회개하고, 복음에 합당한 진실한 교회가 되라고 외치고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거짓되고 자존심 세고 이익만 챙기려는 자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본문 40절 후반에 보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나니”라고 나옵니다. 오랜 신앙생활과 많은 성경지식을 가진 자들 중에 조금씩 타락해 감으로써 믿음 떠난 지 꽤 되어서까지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도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고 충고합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면서 오늘 본문이 던지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보겠습니다. 첫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읽기를 즐겨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시대 문화에 젖어서 말씀이 우리 맘에 와 닿지가 않습니까 진정으로 말씀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 기독교가 조심스럽고도 어찌 보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성경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까 불나비처럼 권력과 인기와 돈을 따라다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든, 청소년 사역자든, 주일학교 교사든, 성경공부 지도자든 그 어떤 교회 직책을 가졌든 간에 그 동기가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진정으로 거룩하게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큰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2절 말씀대로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답뿐이라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요 지금부터 영원히 생명에서 분리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신 다윗의 자손이었고 육신으로 오신 주님으로 고백된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영혼과 바른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고, 사랑으로 육신을 입어 다윗의 자손이 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스스로 부나 권력이나 특권을 결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모델이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하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 하시며, 우리 모두가 자기 모습을 닮도록 기도하시며,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우리의 조그만 아픔에도 함께 하시며,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이 화하여 영원히 기뻐하게 될 그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더 많이 믿을수록 당신은 더욱더 기뻐하게 되고 영혼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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