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본문
대강절의 강단색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따뜻하고 침착한 기풍을 가진 희망과 동경의 색깔입니다. 이 대강절은 침착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동시에 이 기간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희망과 동경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엘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Homo Esperans,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성공적인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애타고 마음 조이게 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차를 기다리느라 동동 거리며 기다리는 시간을 다 이해 할 것입니다.
십년이 지나도록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도 이해 할 것입니다.
시42: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는 심정과 태도를 고백한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예측불가의 상황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불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도 자신의 앞일을 알고 싶어서,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예언 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가 히브리서 12: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종말의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를 가다듬는 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며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 가면 초대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은신한 은신처인 갑바도기아의 은신처들은 멀리서 보면 벌집 같습니다. 돌을 파고 피신해서 살았던 곳입니다.
내부가 좁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장기간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면서 견디어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버팀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인들에 대한 계속되는 핍박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를 향해 기뻐하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어떻게 기쁨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마라나타의 신앙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 본문에도 기다림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자가 있습니다. 시므온이란 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일평생을 오직 한가지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았습니다.
첫 번 성탄 때 주님을 맞은 자들은 어떤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까
1. 첫 번 성탄을 맞은 사람들은 경건하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는데, 많이 배웠는데, 높은 지위에 있는데 생활을 들여다 보면 경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허구한 날 골프만 치고 ... 자기만을 위해서 들기며 삽니다.
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는 어떤 자일까요 의로운 자, 경건한 자입니다. 시대를 구원하는 자는 지식이 있는 자,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온갖 능력을 갖춘 자라도 의롭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하면 그 자신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오순절 초대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대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므온이 나이가 많았음에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주의 일을 하다가도 나이가 많으면 모든 일을 다 포기하고 그날그날 아무 의미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데 ... 이 시므온은 젊은이 못지않게 성령충만하여 소망과 비젼을 가지고 멋지게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육체의 소욕에 끌려 자기의 이익과 육적인 만족과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며, 향락과 정욕에 끌려는 사는 추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내 안에, 내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사는 삶입니다.
성령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시므온이 살아 있을 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의로운 한 사람, 경건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자의 기다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하신 말씀처럼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은 가장 역사하는 힘이 많았던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던 사람들이 초림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재림하시는 주님도 경건하게 산 사람들 만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도적의 특징은 전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잉태된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이 임하는 것처럼 도선생이 들어 올 때 시간을 정해놓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전화하고 오는 신사적인 도적은 없습니다.
‘우리 집은 한번도 도적을 맞은 적이 없으니까 ... ’하고 문도 안 잠그고 문단속을 잘 안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선생님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교통사고의 75%가 운전사의 방심때문이라고 한다. 여러해 동안 무사고로 운전했으니 자신이 있다고 하는 자신과 함께 이젠 운전에 습관이 들었다고 하여 운전하면서 다른 행동을 하거나 앞을 바로 보지 않기 때문에 깜빡하는 순간에 교통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사고없이 운전을 한 사람이라도 순간적인 실수로 아까운 목슴을 잃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2-3)
노아 시대때 대 홍수로 이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이 멸하실 때 깨어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외에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잠은 무의식 세계입니다. 느끼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깨닫지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생명은 존재하고 있지만 숨만 쉴 뿐입니다. 누가 들어와서 들고 가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성도도 그와 같습니다. 열심도 없습니다. 의욕도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도 없습니다. 기도 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입니까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는 사람이 마지막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민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한 밤중에 깨어 일어나서 별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열심히 인류의 왕,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대망하고 깨어 있었습니다.
목자들도 한 밤에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눅2:8) 그들은 베들레헴 부근에서 양을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치는 양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할 제물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양을 지키며 경건한 마음으로 한 밤중에도 깨어 자기 양떼를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도 언제나 믿음으로 살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인 것이 확실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고백 중에 “이 사람이 외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21절하)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노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때는 사랑하는 아내를 통
해서 인생의 위로를 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또 자식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나 물질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르고 죽을 나이가 닥아 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 깨달은 것은 오직 진정한 위로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로울 때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나 교인들... 어떤 경우는 재물이나 명예 .. 그러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 하다가 남는 것은 실망밖에 남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그런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렸습니다. 유대나라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 억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았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받는 위로임을 ..
고통과 죄악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인간의 위로는 아무리 감동적으로 위로해도 고통을 없이하지 못합니다. 죄악을 없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로는 참 위로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만, 성령님만이 참 위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인간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퍼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베들레헴 땅에서 탄생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메시야를 대망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만의 크리스찬이 있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우리 주님 오시려나 해서 “주님 고대가”를 부르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님에 대한 기다림이 없습니다. 점점 주님에 대한 사모함이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점점 주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추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지며 사는 자는 추해지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곱게 늙습니다. 곱게 늙으신 분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경건합니다. 젊어집니다. 당당해 집니다. 시므온처럼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아름답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한 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자기들끼리의 행복을 접어두고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에게 와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마리아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였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주여,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순종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내의 잉태 소식을 듣고 난리를 치지는 않습니다. 단지 깊이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난 뒤에도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과학적으로 모순된 것이고, 이성적으로 불합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 요셉이고, 나와 정혼한 여인인 마리아 여야 하는 가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보통 사람은 스스로 납득되기 전에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요셉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였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든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이를 낳기 까지 동침치 아니하니라”(마1:24-25)
요셉은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마리아의 신변을 확고하게 보호해 줍니다. 뿐만이 아니라 아이를 해산하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과 마리아의 동정녀 성을 확고할 수 있도록 수종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오직 말씀의 약속만 믿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수십 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순종을 보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의 약속을 믿고 그 멀고 먼 길을 큰 별의 지시를 따라왔습니다. 마2:12에 보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헤롯의 회유와 위협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치 못하고 주저했던 동방 박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합니다. 이 계시는 아기 예수와 동방 박사들을 지키시기 위하여 헤롯의 악한 살인적인 계획을 무산시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이십니다.
그 때 박사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대로 갑니다. 참 순종은 내 맘대로,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순종만이 살길이고 축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과 마리아와 신앙의 선배들처럼 죽을 각오로 순종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이루어 드리는 최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들도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듣고 양떼를 들에 두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그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믿어지는 사실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는 사실만 믿는 것, 증명되는 사실만 믿는 것은 과학이고 지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까지도 주님의 말씀이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초림주를 맞았던 사람들처럼 내 마음에 들든지 안들든지, 내가 감당할 수 있든지 없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복된 기회로 알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엘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Homo Esperans,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성공적인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애타고 마음 조이게 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차를 기다리느라 동동 거리며 기다리는 시간을 다 이해 할 것입니다.
십년이 지나도록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도 이해 할 것입니다.
시42: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는 심정과 태도를 고백한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예측불가의 상황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불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도 자신의 앞일을 알고 싶어서,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예언 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가 히브리서 12: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종말의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를 가다듬는 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며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 가면 초대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은신한 은신처인 갑바도기아의 은신처들은 멀리서 보면 벌집 같습니다. 돌을 파고 피신해서 살았던 곳입니다.
내부가 좁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장기간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면서 견디어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버팀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인들에 대한 계속되는 핍박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를 향해 기뻐하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어떻게 기쁨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마라나타의 신앙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 본문에도 기다림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자가 있습니다. 시므온이란 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일평생을 오직 한가지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았습니다.
첫 번 성탄 때 주님을 맞은 자들은 어떤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까
1. 첫 번 성탄을 맞은 사람들은 경건하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는데, 많이 배웠는데, 높은 지위에 있는데 생활을 들여다 보면 경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허구한 날 골프만 치고 ... 자기만을 위해서 들기며 삽니다.
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는 어떤 자일까요 의로운 자, 경건한 자입니다. 시대를 구원하는 자는 지식이 있는 자,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온갖 능력을 갖춘 자라도 의롭지 못하면 정직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하면 그 자신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오순절 초대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대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므온이 나이가 많았음에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주의 일을 하다가도 나이가 많으면 모든 일을 다 포기하고 그날그날 아무 의미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데 ... 이 시므온은 젊은이 못지않게 성령충만하여 소망과 비젼을 가지고 멋지게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육체의 소욕에 끌려 자기의 이익과 육적인 만족과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며, 향락과 정욕에 끌려는 사는 추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내 안에, 내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사는 삶입니다.
성령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시므온이 살아 있을 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의로운 한 사람, 경건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자의 기다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하신 말씀처럼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은 가장 역사하는 힘이 많았던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던 사람들이 초림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재림하시는 주님도 경건하게 산 사람들 만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도적의 특징은 전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잉태된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이 임하는 것처럼 도선생이 들어 올 때 시간을 정해놓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전화하고 오는 신사적인 도적은 없습니다.
‘우리 집은 한번도 도적을 맞은 적이 없으니까 ... ’하고 문도 안 잠그고 문단속을 잘 안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선생님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교통사고의 75%가 운전사의 방심때문이라고 한다. 여러해 동안 무사고로 운전했으니 자신이 있다고 하는 자신과 함께 이젠 운전에 습관이 들었다고 하여 운전하면서 다른 행동을 하거나 앞을 바로 보지 않기 때문에 깜빡하는 순간에 교통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사고없이 운전을 한 사람이라도 순간적인 실수로 아까운 목슴을 잃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2-3)
노아 시대때 대 홍수로 이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이 멸하실 때 깨어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외에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잠은 무의식 세계입니다. 느끼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깨닫지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생명은 존재하고 있지만 숨만 쉴 뿐입니다. 누가 들어와서 들고 가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성도도 그와 같습니다. 열심도 없습니다. 의욕도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도 없습니다. 기도 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입니까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는 사람이 마지막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민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한 밤중에 깨어 일어나서 별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열심히 인류의 왕,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대망하고 깨어 있었습니다.
목자들도 한 밤에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눅2:8) 그들은 베들레헴 부근에서 양을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치는 양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할 제물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양을 지키며 경건한 마음으로 한 밤중에도 깨어 자기 양떼를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도 언제나 믿음으로 살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인 것이 확실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고백 중에 “이 사람이 외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21절하)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노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때는 사랑하는 아내를 통
해서 인생의 위로를 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또 자식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나 물질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르고 죽을 나이가 닥아 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 깨달은 것은 오직 진정한 위로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로울 때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나 교인들... 어떤 경우는 재물이나 명예 .. 그러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 하다가 남는 것은 실망밖에 남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그런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렸습니다. 유대나라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 억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았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받는 위로임을 ..
고통과 죄악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인간의 위로는 아무리 감동적으로 위로해도 고통을 없이하지 못합니다. 죄악을 없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로는 참 위로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만, 성령님만이 참 위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인간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퍼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베들레헴 땅에서 탄생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메시야를 대망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만의 크리스찬이 있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우리 주님 오시려나 해서 “주님 고대가”를 부르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님에 대한 기다림이 없습니다. 점점 주님에 대한 사모함이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점점 주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추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지며 사는 자는 추해지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곱게 늙습니다. 곱게 늙으신 분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경건합니다. 젊어집니다. 당당해 집니다. 시므온처럼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아름답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한 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자기들끼리의 행복을 접어두고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에게 와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마리아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였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주여,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순종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내의 잉태 소식을 듣고 난리를 치지는 않습니다. 단지 깊이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난 뒤에도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과학적으로 모순된 것이고, 이성적으로 불합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 요셉이고, 나와 정혼한 여인인 마리아 여야 하는 가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보통 사람은 스스로 납득되기 전에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요셉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였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든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이를 낳기 까지 동침치 아니하니라”(마1:24-25)
요셉은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마리아의 신변을 확고하게 보호해 줍니다. 뿐만이 아니라 아이를 해산하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과 마리아의 동정녀 성을 확고할 수 있도록 수종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오직 말씀의 약속만 믿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수십 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순종을 보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의 약속을 믿고 그 멀고 먼 길을 큰 별의 지시를 따라왔습니다. 마2:12에 보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헤롯의 회유와 위협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치 못하고 주저했던 동방 박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합니다. 이 계시는 아기 예수와 동방 박사들을 지키시기 위하여 헤롯의 악한 살인적인 계획을 무산시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이십니다.
그 때 박사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대로 갑니다. 참 순종은 내 맘대로,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순종만이 살길이고 축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과 마리아와 신앙의 선배들처럼 죽을 각오로 순종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이루어 드리는 최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들도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듣고 양떼를 들에 두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그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믿어지는 사실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는 사실만 믿는 것, 증명되는 사실만 믿는 것은 과학이고 지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까지도 주님의 말씀이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초림주를 맞았던 사람들처럼 내 마음에 들든지 안들든지, 내가 감당할 수 있든지 없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복된 기회로 알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