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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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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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