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대림절] 기다림의 신비

본문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던 쉘터(shelter)가 오스트렐리아에 있었습니다. 오스트렐리아 원주민들이 이 쉘터에 들어와 살곤 하였는데 어느날 마더 테레사가 이 쉘터를 방문하였습니다. 한쪽 구석에 한 나이 많은 노인이 쭈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제가 이곳을 깨끗하게 치워 드릴까요 침구도 깨끗이 빨아 놓겠습니다. " 그 노인은 말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이곳을 깨끗하게 하면 한결 나아질거예요. "
결국 노인은 마더 테레사에게 허락해 줍니다. 마더 테레사가 방을 치우다가 작은 램프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먼지가 가득 덮혀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묻습니다.
"램프를 키지 않나요"
"누구를 위해서요 아무도 여기 오질 않는 걸요. 나는 아무도 만나질 않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죠. 나는 램프를 킬 필요가 없어요. "
"만일 수녀들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램프를 그 수녀들을 위해 켜실건가요" "물론이죠!"
수녀들은 저녁마다 그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마다 노인은 램프를 켜놓았습니다.
2년이 지난후 노인은 마더 테레사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의 친구들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이 켜놓은 내 인생의 불꽃이 계속 타고 있다고…"
오늘은 첫 번째 드리는 강림절주일로 지킵니다. 예년처럼 강단에 강림절 촛대(Advent Wreath)에 촛불을 켜놓았습니다. 오늘은 강림절 첫 주일이므로 첫 번째 초만 켜 놓았습니다. 다음 주일은 두 개, 그 다음주일은 세 개, 마지막 네 개의 촛불이 다 켜지면 우리는 주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올해도 예년과 똑같은 Advent Wreath를 사용하여 강림절을 기념하지만 사실 오늘 드리는 강림절 예배는 예년과는 다른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는 새 천년 첫 번째 강림절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전설적으로는 서기 1000년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었고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는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졌었다는 말들이 전해 내려옵니다.
우리 모두 서기 2000년을 접하는 축복을 누렸는데 2000년이 되면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문 내지 기대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Y2K라 해서 컴퓨터로 인한 혼란이 올 것을 내다보았었습니다. 그러나 Y2K는 한갖 기우에 불과했었습니다.
서기 1000년도는 하나의 전설만 남기고 지나갔고 서기 2000년도는 Y2K라는 군중 심리적 공포에 잠시 빠졌다가 이제는 2000년도도 마감하는 듯 합니다.
인간들의 기우와 예상은 하나의 씁씁한 망상이었음이 증명된 채 오늘 우리는 새천년 첫 강림절을 맞이합니다. 이 강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작년에 켰던 Advent Wreath에 또 다시 촛불을 밝혔습니다.
만일 그 동안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내년에도 꼭같은 것을 반복할 것입니다. 내 후년에도... 아마 이러다가 서기 3000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강림절이 다가옴을 느끼고 교회 사무실에서는 Advent Wreath와 촛불을 준비했습니다. 또다시 촛불을 준비하면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너무하시다. 우리보고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고는 아직도 안오시다니... 언제까지 우리는 기다려야하고 얼마나 많은 이 애꿎은 촛불을 키고 또 켜야 할까 2000년 동안 이 모습을 내려다 보시면서 당신은 그저 하늘에서 만족하실까'
이 생각을 하면서 오늘 강림절 첫주일 설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경귀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찾아보고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주님은 성도들에게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라" 명백히 말씀하시진 않으셨음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주님께 대한 불만은 "주님은 어떻게 가련한 인간들에게 주님을 기다리라 하시고는 2000년 동안 오시지 않는가"였었는데 저의 생각은 한갖 잘못된 상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리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기다리라" 말씀하신 것이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성령강림을 기다리라 명령하셨을 때에는 계산해보면 약 10일후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기다리라는 구체적인 명령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다리지 말라'라고도 말씀하신 것은 더욱 없습니다. 성경전체의 흐름은 재림을 기다리게 하는 쪽으로 흘러가지만 분명한 것은 '기다리라' 명령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이 있기에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 곳곳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의 축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네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내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에 대해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주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래서 풍성한 은사 가운데 있는 성도님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만, 구체적으로 "기다리라" 명령하시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기다리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응급치료를 받으러 영국 런던 병원 응급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바쁜 병원이었습니다. 이 분은 기다리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환자가 많아서 많은 환자가 앉아서 기다리는데 한사람씩 이름이 불리웁니다. 응급실에 왔으니 빨리 치료해 줄줄 알고 열심히 자기 이름이 불리워지나 듣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도 자기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지치게 됩니다. 그런데 열심히 이름이 불리워지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방 병원에 도착한 사람들만 열심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가면 점점 포기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가 정작 자기 이름이 불리워지는 때는 자기 이름이 불리우는 것을 듣질 못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지쳐서 기다림을 포기하고 나태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000년이 지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지난번 어느 기독교 신문에 한 재미있는 책에 대해서 소개한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느 이태리 카톨릭 신학자가 다음과 같은 주제의 책을 썼다고 합니다.
"햄버거는 카톨릭적인 것이 아니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또 말합니다. "사람들은 맥도날드에서 음식이빨리 제공되기를 기다리고 음식이 나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먹어치운다. 이와 같은 삶은 카톨릭적인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
이 분은 햄버거는 개신교 스타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분의 주장을 우리는 좀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할 줄 압니다. 현대인들은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패스트푸드가 음식예절을 파먹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런던 병원 응급실 환자의 모습과 햄버거가 바로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기다리질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햄버거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림을 벌써 포기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햄버거식 기도와 설교와 찬양으로 믿는 양태가 바뀌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급한 기도제목만 응답받길 기다립니다.
그로 인해 참 기다리는 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신비를 체험하고 있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기다림의 신비를 체험하십니까 햄버거식 신앙은 아니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지금 누리지 못하는 기다림의 신비로 가득찬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말씀에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크게 축복 가운데 사셨던 시므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율법대로 할례를 받기 위하여 부모들의 품에 안겨 성전에 가셨습니다. 이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은 자였는데 어느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있었을 때입니다. 마침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 땅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이에 그 부모가 아기에 대한 말을 기이해 여깁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의 오심을 사모하였기에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이 말씀을 advent의 관점(context)안에서 해석해 보았습니다. "성령의 빛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시므온의 모습이 바로 기다리는 자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성령의 빛이 임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다림 가운데 성령의 빛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얼마 전 타고르(Tagore)의 글을 읽었는데 타고르의 글이 기다리는 자의 축복의 모습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당신의 침묵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겠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신비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선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다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바로 신비스러운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크리스찬들의 모습은 분명 두 가지 일 줄 압니다. 첫 번째 모습은 런던 병원 응급실 환자처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시므온처럼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계속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뵙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서 만이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영혼을 여호와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게 합니다. 어느덧 성령의 빛이 임하시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2000년간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하심으로 당신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늘 선사하실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는 더욱 구체적인 표현을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쟁취함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데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때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리고 추구할 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도달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추구할 때 여호와 하나님 손안에 내 맡겨진 채 신비함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한편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2000년이 지난 이때까지 안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안타깝게 기다리는 자들에게 침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버리게 됩니다. 아울러 참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에 붙잡힌바 됩니다.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은 이 축복을 누립니다.
얼마 전 중동 지방의 크리스찬들의 생활에 대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중동 지방을 선교하셨던 분이 쓴 책이었습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입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크리스찬들을 핍박했던 곳입니다. 비잔틴 제국이 수세기 동안 이집트 크리스찬들을 박해했고 400년간 터어키 사람들이 핍박했고, 그후 페르시아 제국에게 핍박을 받아 왔고 Ottoman 제국, 현재는 아랍 국가 및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레바논에 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에 지쳐서 유럽으로 피신하기로 했습니다. 수 천명이 벌써 유럽과 미국으로 이민하였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비행기표도 다 샀습니다.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비행장에 가서 check-in을 하려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어려운 중동 지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당신들의 소명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중동 지방 선교를 위해 누구보다 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저는 이 분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러한 결정을 하게 하였을까 그들은 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침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체험했습니다. 침묵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어느덧 신비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에 붙잡힌 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성령의 빛이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빛에 이끌려 레바논에 교회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현재도 그는 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생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주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다립니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잡을 수 없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의 기다림을 통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함 안에 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추구하는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던 여러분이 그것을 잡은 후 여러분은 그것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햄버거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반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을 끝까지 기다린다면, 침묵 속에서 여러분은 손에 잡힐 수 없는 신비하신 분 안에 안겨져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은 기다리는 자들만이 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오래 서 계신 분들만이 누립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advent 촛불을 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촛불을 켜는 것은 기다림을 통해서만 켜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 있으신 분들의 영혼에는 불이 켜집니다. 이것이 advent의 신비한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두운 이 세상은 빛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끝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가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불이 켜져 있습니까 기다리십시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십시다. 우리의 영혼에 불이 켜질 것입니다. 그 빛으로 세상을 밝히십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비추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시길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기다리십시다.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것을 기다리십시다. 2천년 간 성도들이 잡지 못했던 것을 기다리십시다. 기다림의 신비한 세계 속으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시다. "당신이 켜 놓은 내 인생의 불꽃이 계속 타고 있습니다. "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