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아기를 품에 안을 때까지
본문
여러분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흔히 '목이 빠질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학수고대'(鶴首苦待)라고 합니다. 학이 머리를 쭉 내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애절한 기다림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작은 기다림들이 우리 인생을 지탱해주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주부인 아내는 일터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승진할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 자식을 학교에 보낸 부모는 자식들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막내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엄마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게 기다릴 것입니다.
- 삶이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은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 기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은 주일이 기다려지고, 애인을 만나는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날 것을 기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쉬임 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이 다 행복하고 희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 불안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빚 갚아야 할 날을 불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 또 의미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에 희망이나 기쁨을 주지 못한 것들입니다.
- 일시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기다림은 보다 영원한 소망이요 생명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읽은 시편 137편의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땅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지은 찬송시입니다. 그들은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바벨론 강변에 모여 고향땅 예루살렘을 추억하며 울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더욱 그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큰 수치를 겪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또 다른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시편 137:3절에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리갯감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잔치자리에 불러다 놓고는 광대짓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너희 노래를 불러서 흥을 돋구어 보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방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는 '바벨론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까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그들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치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비단 바벨론 포로 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인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의 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는 로마에 지배를 받는 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오늘 신약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그런 기다림이 간절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대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힘썼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므온 역시 경건하게 신앙생활하던 중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왕도 로마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우리나라가 옛날에 일본 사람들에게 곡식을 다 빼앗긴 것처럼 로마 사람들에게 막대한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당연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시켜주고, 빼앗겼던 이 나라에 자유를 되찾아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당연히 그런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그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도 그랬습니다. '하루빨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셔서 이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우리 민족에게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동족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26절에 말씀하고 있는 "주의 그리스도"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리스도라는 말과 메시야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모두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아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가리킬 때에는 '메시야'라는 말로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인류 구원이라는 신앙적인 메시야를 가리킬 때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지시는 시므온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실 참된 구세주가 오실텐데, 너는 그분을 기다리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혹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자꾸만 정치적인 목적을 첨가합니다.
-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자식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비천했던 자신이 마치 대통령을 만나 한 자리 얻는 것처럼 뭔가 큰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난 후에 사업도 잘 될 수 있고, 병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잘 믿음으로 자식들이 복을 받아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일 뿐,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시므온의 기다림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시므온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간절한 꿈 -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로한 시므온이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인생,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생은 기쁨과 설레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과 기대(기다림)은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됩니다. 꿈과 기대는 현실의 문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꿈과 기대는 삶의 목표를 잃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삶의 참된 가치와 목표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시므온이 메시야를 만날 것이라는 꿈과 기대를 가졌던 것처럼,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이런 꿈과 기대를 꼭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꿈은 우리를 늘 희망으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좌절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솟아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어떤 일로 인해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주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품음으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을 받게 됩니다. 주님 만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시므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면 언젠가 이 성전에 나타나실 거야'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예배당에 오실 때에 그런 희망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오늘 내가 주님을 만날 거야' '오늘 주님은 분명 나를 만나 주실거야. '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시므온은 매일같이 성전을 출입하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레이는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에게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아기가 장남일 경우에는 아이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행하기 위해서 아직 난지 8일밖에 되지 않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 안으로 들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전에 들어가면 메시야를 만날거야'하는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에 그 날따라 성전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살피던 시므온에게 눈에 띈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본 순간 시므온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벅찬 감격과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자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노인이었던 시므온은 천천히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 아기를 내가 좀 안아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 예수를 얼굴도 알지 못하던 노인 시므온의 품에 안겨줍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감격은 처음 느껴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미 오래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죽기 전에 꼭 보게 될 것이라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금 이렇게 가슴에 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비록 가슴에 안은 아기 예수는 다른 아기와 모양새가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둠의 땅인 이방에까지 빛을 비춰줄 그 영광스러운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안에 아기 예수는 다른 어느 아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의 가슴만큼은 달랐습니다. 온 세상을 안은 것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안은 것같은 충만함이 가슴 가득히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시므온에게 어떤 부귀나 권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다 품은 것같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시므온은 품에 안은 그 아기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 이제 난지 겨우 8일밖에 되지 않는 정말 '갓난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 아기에게서 죄악과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빛이 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기를 품에 안음으로 해서 이제는 모든 인생의 굴레를 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먼저 이렇게 외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이제야 드디어 저에게 참된 해방을 주셨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기를 품에 안은 것은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린 - 그래서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온전히 자유를 만끽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기쁨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우리의 품에 안는다면, 그건 우리가 아기를 안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에 꼭 안아 주시는 새로운 감격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전에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그 사건이 도대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에게 어떤 관련이 있길래 온 세상이 그렇게 떠들썩합니까 우리는 그 아기에게서 우리가 그렇게 목마르게 찾고 있는 이 우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아기를 우리의 품에 안는 순간 우리의 모든 세상 걱정과 근심이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우리에게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시므온과 같은 감격과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월드컵 이후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들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여러분의 품에 안고 그 감동과 기쁨을 회복하심으로, 남은 생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애절한 기다림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작은 기다림들이 우리 인생을 지탱해주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주부인 아내는 일터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승진할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 자식을 학교에 보낸 부모는 자식들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막내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엄마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게 기다릴 것입니다.
- 삶이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은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 기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은 주일이 기다려지고, 애인을 만나는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날 것을 기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쉬임 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이 다 행복하고 희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 불안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빚 갚아야 할 날을 불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 또 의미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에 희망이나 기쁨을 주지 못한 것들입니다.
- 일시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기다림은 보다 영원한 소망이요 생명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읽은 시편 137편의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땅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지은 찬송시입니다. 그들은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바벨론 강변에 모여 고향땅 예루살렘을 추억하며 울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더욱 그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큰 수치를 겪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또 다른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시편 137:3절에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리갯감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잔치자리에 불러다 놓고는 광대짓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너희 노래를 불러서 흥을 돋구어 보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방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는 '바벨론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까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그들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치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비단 바벨론 포로 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인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의 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는 로마에 지배를 받는 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오늘 신약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그런 기다림이 간절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대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힘썼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므온 역시 경건하게 신앙생활하던 중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왕도 로마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우리나라가 옛날에 일본 사람들에게 곡식을 다 빼앗긴 것처럼 로마 사람들에게 막대한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당연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시켜주고, 빼앗겼던 이 나라에 자유를 되찾아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당연히 그런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그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도 그랬습니다. '하루빨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셔서 이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우리 민족에게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동족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26절에 말씀하고 있는 "주의 그리스도"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리스도라는 말과 메시야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모두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아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가리킬 때에는 '메시야'라는 말로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인류 구원이라는 신앙적인 메시야를 가리킬 때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지시는 시므온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실 참된 구세주가 오실텐데, 너는 그분을 기다리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혹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자꾸만 정치적인 목적을 첨가합니다.
-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자식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비천했던 자신이 마치 대통령을 만나 한 자리 얻는 것처럼 뭔가 큰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난 후에 사업도 잘 될 수 있고, 병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잘 믿음으로 자식들이 복을 받아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일 뿐,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시므온의 기다림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시므온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간절한 꿈 -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로한 시므온이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인생,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생은 기쁨과 설레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과 기대(기다림)은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됩니다. 꿈과 기대는 현실의 문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꿈과 기대는 삶의 목표를 잃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삶의 참된 가치와 목표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시므온이 메시야를 만날 것이라는 꿈과 기대를 가졌던 것처럼,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이런 꿈과 기대를 꼭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꿈은 우리를 늘 희망으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좌절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솟아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어떤 일로 인해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주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품음으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을 받게 됩니다. 주님 만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시므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면 언젠가 이 성전에 나타나실 거야'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예배당에 오실 때에 그런 희망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오늘 내가 주님을 만날 거야' '오늘 주님은 분명 나를 만나 주실거야. '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시므온은 매일같이 성전을 출입하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레이는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에게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아기가 장남일 경우에는 아이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행하기 위해서 아직 난지 8일밖에 되지 않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 안으로 들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전에 들어가면 메시야를 만날거야'하는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에 그 날따라 성전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살피던 시므온에게 눈에 띈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본 순간 시므온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벅찬 감격과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자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노인이었던 시므온은 천천히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 아기를 내가 좀 안아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 예수를 얼굴도 알지 못하던 노인 시므온의 품에 안겨줍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감격은 처음 느껴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미 오래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죽기 전에 꼭 보게 될 것이라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금 이렇게 가슴에 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비록 가슴에 안은 아기 예수는 다른 아기와 모양새가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둠의 땅인 이방에까지 빛을 비춰줄 그 영광스러운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안에 아기 예수는 다른 어느 아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의 가슴만큼은 달랐습니다. 온 세상을 안은 것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안은 것같은 충만함이 가슴 가득히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시므온에게 어떤 부귀나 권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다 품은 것같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시므온은 품에 안은 그 아기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 이제 난지 겨우 8일밖에 되지 않는 정말 '갓난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 아기에게서 죄악과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빛이 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기를 품에 안음으로 해서 이제는 모든 인생의 굴레를 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먼저 이렇게 외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이제야 드디어 저에게 참된 해방을 주셨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기를 품에 안은 것은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린 - 그래서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온전히 자유를 만끽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기쁨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우리의 품에 안는다면, 그건 우리가 아기를 안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에 꼭 안아 주시는 새로운 감격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전에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그 사건이 도대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에게 어떤 관련이 있길래 온 세상이 그렇게 떠들썩합니까 우리는 그 아기에게서 우리가 그렇게 목마르게 찾고 있는 이 우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아기를 우리의 품에 안는 순간 우리의 모든 세상 걱정과 근심이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우리에게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시므온과 같은 감격과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월드컵 이후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들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여러분의 품에 안고 그 감동과 기쁨을 회복하심으로, 남은 생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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