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의 자세
본문
어린 시절에는 소풍가는 날이나. 운동회 하는 날, 방학하는 날, 설날 등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청년 시절에는 친구나 애인을 기다리기도 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승진의 날이나 출세의 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군대 나간 아들이 제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노인이 되어서는 자식의 성공의 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옛 친구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날을 담담하게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루하루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작은 기다림도 있습니다.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찻집에서 약속한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민족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강대국에 의해 설음을 받던 민족은 해방의 날을 기다릴 것이고. 분단된 민족은 통일의 날을 기다릴 것이며. 전쟁중인 민족은 평화의 날을 애타게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보다 더욱 절실한 기다림이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인간이 갖는 기다림이란 자신의 불완전함을 해소하려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리워하는 존재를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충족해 지기를 바래서 무엇인가 기다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존재를 만나더라도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이 갈증을 충족시켜 주실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것입니다. 초월 자를 통해서만 비로써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불 완전성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은 삶의 조건이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에게, 건강한 자보다는 병든 자에게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이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 특출하였다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척박하고 건조한 광야에서 사면에 적들로 애워싸인체 살아가야 했으므로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절대적인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초월 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관심을 기우리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애3:24-26)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다림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도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의 불 완전성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기다림은 잠깐의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줄뿐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30:18)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살고 있던 시므온과 안나라고 하는 두 노인이 바로 그 복된 주인공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기다리는 자’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5). 그들은 구세주의 오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위로 받기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물론 구세주를 기다린 사람들은 시므온과 안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셨을 때에는 그 분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동방의 박사들 몇 명과 양치는 목자들 몇 사람만이 인간의 몸을 입고 초라하게 탄생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구세주를 배척하고 대적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구세주의 오심을 진정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은 구세주를 만나 기뻐하며 영접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시므온과 안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 안으로 들어오자 단번에 그 아기가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 아이가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을 그토록 기다렸던 시므온은 너무나 감격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 라고 했습니다(29-32, 공동번역).
안나 역시 예수님을 보는 순간 구세주이심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아기에 대해 증거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 그것도 시골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평범한 아기 예수를 보고서 단번에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었던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는 정말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오심을 진심으로 기다렸고 마침내 그분을 만나 뵙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기다린 보람도 없었지만 그들은 기다린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정말 복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들도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시므온과 안나의 기다림이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저가 구세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듯이 구세주를 보게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구세주가 꼭 오신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자기가 죽기 전에 곧 오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구세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도 신실한 믿음입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믿는다하더라도 자기의 생애에는 해당이 없는 아주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맞이할 만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세주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에서야 성경을 찾아보고. 그때서야 구세주가 오셨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느냐고 하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한 사람도 구세주를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시므온 이나 안나 처럼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 이나 안나 처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안나는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84년 동안이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으니(37). 그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믿음으로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안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주여, 이 종은 구세주를 보게되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실롤 그들은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린 결과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믿는 우리들도 시므온이나 안나 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예고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은 반대로 생각하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는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지 않으므로 의심이 생기고 회의가 생겨 마침내 포기상태에 빠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현실성이 없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의 재림은 조금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시길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만이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삶으로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답게 그들의 삶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였으며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나는 과부 된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의롭고 경건한 삶을 영위했기에 영감이 충만했을 것이고. 그러기에 구세주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이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단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려면 깨어있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마24:42-43). 그리고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단장하라고 하였으니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계19:6-9).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기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도성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과 같아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가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도 알게 모르게 죄악의 물결에 깊이 오염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자만이 재림하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넷째. 그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요즘은 교회보다도 호텔이나 술집, 백화점 같은 곳에서 성탄절 준비를 더 빨리 합니다. 또 그런 곳이 더 요란하게 성탄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이 성탄절 오기를 더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텔이나 술집 같은 곳은 성탄절 예약 손님들이 언제나 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호텔이나 술집같은 곳이 구세주의 오심을 맞이할 장소가 된단 말입니까 어찌 그런 곳이 구세주의 오신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단 말입니까
시므온과 안나는 구세주의 오심을 성전에서 기다렸고.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구세주를 기다린 장소도 성전이었고 만남의 장소도 성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장소도 역시 성전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의 장소를 계시 받았다고 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고. 광야로 나가는 이도 있으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는데 가장 적합한 기다림의 장소는 성전입니다.
주님을 잃었던 그의 부모가 주님을 다시 찾은 곳도 성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시길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될 줄 알지 못하였나이까” 라고 하셨습니다. (눅2:49)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아들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장소로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전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엡1: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마16:18). 이곳이야말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유일한 장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도와 예배와 섬김으로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이 자리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는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말고 이곳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들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영광중에 구세주를 만나는 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루하루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작은 기다림도 있습니다.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찻집에서 약속한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민족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강대국에 의해 설음을 받던 민족은 해방의 날을 기다릴 것이고. 분단된 민족은 통일의 날을 기다릴 것이며. 전쟁중인 민족은 평화의 날을 애타게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보다 더욱 절실한 기다림이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인간이 갖는 기다림이란 자신의 불완전함을 해소하려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리워하는 존재를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충족해 지기를 바래서 무엇인가 기다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존재를 만나더라도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이 갈증을 충족시켜 주실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것입니다. 초월 자를 통해서만 비로써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불 완전성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은 삶의 조건이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에게, 건강한 자보다는 병든 자에게 초월 자에 대한 기다림이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 특출하였다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척박하고 건조한 광야에서 사면에 적들로 애워싸인체 살아가야 했으므로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절대적인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초월 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관심을 기우리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애3:24-26)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다림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도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의 불 완전성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기다림은 잠깐의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줄뿐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30:18)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살고 있던 시므온과 안나라고 하는 두 노인이 바로 그 복된 주인공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기다리는 자’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5). 그들은 구세주의 오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위로 받기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물론 구세주를 기다린 사람들은 시므온과 안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셨을 때에는 그 분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동방의 박사들 몇 명과 양치는 목자들 몇 사람만이 인간의 몸을 입고 초라하게 탄생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구세주를 배척하고 대적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구세주의 오심을 진정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은 구세주를 만나 기뻐하며 영접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시므온과 안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 안으로 들어오자 단번에 그 아기가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 아이가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을 그토록 기다렸던 시므온은 너무나 감격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 라고 했습니다(29-32, 공동번역).
안나 역시 예수님을 보는 순간 구세주이심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아기에 대해 증거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 그것도 시골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평범한 아기 예수를 보고서 단번에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었던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는 정말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오심을 진심으로 기다렸고 마침내 그분을 만나 뵙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기다린 보람도 없었지만 그들은 기다린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정말 복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들도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시므온과 안나의 기다림이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저가 구세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듯이 구세주를 보게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구세주가 꼭 오신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자기가 죽기 전에 곧 오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구세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도 신실한 믿음입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믿는다하더라도 자기의 생애에는 해당이 없는 아주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맞이할 만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세주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에서야 성경을 찾아보고. 그때서야 구세주가 오셨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느냐고 하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한 사람도 구세주를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시므온 이나 안나 처럼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 이나 안나 처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안나는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84년 동안이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으니(37). 그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믿음으로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안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주여, 이 종은 구세주를 보게되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실롤 그들은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린 결과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믿는 우리들도 시므온이나 안나 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예고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은 반대로 생각하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는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지 않으므로 의심이 생기고 회의가 생겨 마침내 포기상태에 빠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현실성이 없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의 재림은 조금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시길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만이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삶으로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답게 그들의 삶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였으며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나는 과부 된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의롭고 경건한 삶을 영위했기에 영감이 충만했을 것이고. 그러기에 구세주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이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단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려면 깨어있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마24:42-43). 그리고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단장하라고 하였으니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계19:6-9).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기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도성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과 같아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가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도 알게 모르게 죄악의 물결에 깊이 오염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자만이 재림하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넷째. 그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요즘은 교회보다도 호텔이나 술집, 백화점 같은 곳에서 성탄절 준비를 더 빨리 합니다. 또 그런 곳이 더 요란하게 성탄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이 성탄절 오기를 더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텔이나 술집 같은 곳은 성탄절 예약 손님들이 언제나 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호텔이나 술집같은 곳이 구세주의 오심을 맞이할 장소가 된단 말입니까 어찌 그런 곳이 구세주의 오신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단 말입니까
시므온과 안나는 구세주의 오심을 성전에서 기다렸고.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구세주를 기다린 장소도 성전이었고 만남의 장소도 성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장소도 역시 성전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의 장소를 계시 받았다고 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고. 광야로 나가는 이도 있으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는데 가장 적합한 기다림의 장소는 성전입니다.
주님을 잃었던 그의 부모가 주님을 다시 찾은 곳도 성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시길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될 줄 알지 못하였나이까” 라고 하셨습니다. (눅2:49)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아들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장소로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전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엡1: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마16:18). 이곳이야말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유일한 장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도와 예배와 섬김으로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이 자리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는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말고 이곳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들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영광중에 구세주를 만나는 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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