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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기다린 자의 보람

본문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아주아주 어리석은 두 사람을 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왜 이 두 노인네가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냐고 여러분은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평생은 조금도 내세울 게 없는 그러한 모습이 아닙니까 자녀들에게 무언가 유산을 남겨 놓지도 않았고, 안나라는 할머니의 경우는 결혼한지 8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84년을 살아온 그야말로 가정의 행복이란 거의 느껴 보지 못하고 살았던 불행한 할머니가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리석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 한번 못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마냥 기다리다가 갓난아기의 얼굴만 보고 죽어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이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요, 인생의 목적이라면 어딘가 좀 아쉽지 않겠습니까
기다렸지만 그 기다렸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혜택이란 조금도 누려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40년이나 광야 생활 하다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은 모세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마치 이런 모세처럼 이 시므온이란 할아버지와 안나라는 할머니 역시도 그러합니다. 특히 시므온 할아버지의 경우, 여호와 하나님께 받았다고 하는 계시라는 것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게 됨으로 누릴 수 있는 benefit이란 보는 순간의 그 즐거움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다리는 정성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께서 평생을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시간과 물질을 바쳐서 교회에 봉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돌아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속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야속하다고 하겠습니까 또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남들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고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긴 믿어야 되겠고, 교회에 나가긴 나가야 되겠는데 어찌 열심히 해 보자니 어딘가 아깝고 아쉬운 것 같기도 한 모습들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을 좀 오래 하신 분들 중에는 이러한 기분이 더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딱 부러지는 신앙의 놀라운 체험도 없고, 흔히 말하는 복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그만 두자니 지금까지 믿어온 날들이 아까운 것 같기도 한 것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시므온과 안나라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에게 도전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치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어떤가에 따라 이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부터 60여 년 전, 1943년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목사가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쓴 편지를 옥중서신(Letters & Papers from Prison)이라 하는데 거기서 본회퍼 목사는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라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It is only when one knows the unutterability of the name of God that one can utter the name of Jesus Christ). "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십계명의 제 3계명 '너희는 여호와 곧 너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자에게만이 인간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주의 성탄을 곧 맞이하게 되는 이 때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이, 함부로 부르는 모습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 할아버지는 어떻습니까 25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안나 할머니는 어떻습니까 37절,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섭리를 기다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적인 배경 속에서 맞이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기 예수를 맞이하는 시므온 할아버지나 안나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분들은 이 '아기 예수'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아기 예수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이하에, "主宰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또 38절에,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 이렇게 시므온과 안나는 아기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시므온 할아버지의 경우 아기 예수는 이 할아버지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요 그리고 생애의 마침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지녀왔던 마음속의 체증이 가시게 되었고,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안도감을 지녔으며,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그 소망이 이루어짐을 감사하며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 - 그 메시아를 아기 예수에게서 발견한 이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분들은 누가 뭐라 해도 그 인생을 값있고 의미 있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었기에 아기 예수를 보고 그 예수를 중심으로 말하고 노래하고 전파하는 귀한 모습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행복이란 이렇게 추구하고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누군가가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행복이 없다면 바로 이러한 삶의 의미와 추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우리의 삶의 대상인지를 이번 성탄절을 앞둔 가운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기를 "예수 없는 성탄절"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맞이하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성탄절을 맞이한다는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 예수를 우리의 삶의 주변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근거가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삶의 방법론이 이 예수에게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때문에 우리는 삶의 피로와 아픔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때문에 우리의 삶의 질이 변화되고 성숙해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중심에 놓을 때에 가능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예수에게 바른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른 메시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 아기 예수의 부모에게 이 예수에 대해 말씀합니다. 34절-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진실이란 귀한 것이지만 때로는 아픈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복하자마자 그 아기의 앞날의 어려운 운명에 대해 이야기 듣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라는 아픔의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아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에 어머니로서의 감격과 뿌듯함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머니로서의 자기의 모습은 포기되어야 하는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자기 평생에 기다리던 메시아를 보고 기뻐했지만,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이 아기 예수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아픔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탄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들도 성탄의 기쁨을 지녀야 하는 모습도 지녀야 하겠지만, 또 이 성탄이 주는 의미를 우리 스스로 아로새길 뿐 아니라,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도 함께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34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흥하고 망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십자가의 삶을 우리 스스로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탄을 맞이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권리, 주장, 신분, "-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아기의 어머니이지만 그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자기 포기', '자기 부정'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므온 할아버지가 평생을 이 아기 예수를 기다리면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발견하게 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분명히 약속 드리지만, 내년 이맘때에도 성탄절이 분명히 옵니다. 하지만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지녀할 자세와 태도는 '내가 십자가를 지니고 아기 예수를 맞이할 때만이 그 성탄절이 우리에게 크리스마스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사건으로 부딪힐 때만이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감각과 모습과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물어 보십시다. 우리 스스로 이 시므온 할아버지나 안나 할머니처럼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살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인생을 보내신 이 두 노인네의 모습을 보면서, 이분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예수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만족과 추구의 대상을 이 예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고 따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즉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아픔이지만 거기에 영원한 행복과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한 판단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다. 이럴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며 발견한 기쁨과 감격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면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전개되겠습니까 이제 3일 후로 다가온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와 같은 자세로 맞이할 수 있도록 기다림의 모습에 충만함을 더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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