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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삶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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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 둘째 주간을 지나면서, 대강절의 의미를 하나 하나 깨달아 갑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이 땅에 오심을 기리고, 감사하며 축하하는 절기의 의미가 있으며, 둘째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또 회개하는 심령으로 귀한 절기를 보내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이나, 마지막 종말에만 이 땅 가운데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우리 가운데 늘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강절 절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여기서 오심은 초림도 의미하고, 재림도 의미하며, 현재 오늘날의 임재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현재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저희들을 새롭게 해 주시는 주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제목을 삶의 재해석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삶의 재해석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은 성경 말씀, 곧 계시라 말할 수도 있고, 쉽게 신앙이라 말 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늘 해석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해석이 늘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재해석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이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재해석을 찾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님에 의해 재해석된 삭개오가 아니라, 삭개오가 예수님을 해석할려고 했던 부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재해석하고자 했습니다. 3-4절에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하는데, 이것은 삭개오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재해석 해보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만 들었고, 나름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키가 작기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눈으로 예수님의 외모도 보고,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귀로 들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어떤 말씀을 하실런지 그것도 듣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혹시 병자를 고치면 그것도 큰 구경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서 품겨나오는 인품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 이해도 하고, 또 해석도 하면서 좋은 분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문보다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되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나의 입장과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거나 이해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나의 주관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혹 실수를 할 때가 종 종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들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대할 때도 이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분인지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경험으로 유비시켜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 틀렸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실제 한계에 도달하고, 잘못하면 성경과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면에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시지 않으시면 인간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해석하거나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도 삭개오는 에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적극적인 행동으로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말만 있지,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해석했는지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살펴보는 것은, 삭개오를 어떻게 해석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삭개오를 세상 가치관이나, 일반적인 관점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느냐를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절과, 7절에 보면, 삭개오를 “세리장, 부자, 죄인”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삭개오를 바라보는 이해는 “동족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 로마에게 상납하고 남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남겨 부자가 된, 아주 몹쓸 인간,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죄인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바라보는 삭개오는 있는 그대로 진단하고, 또 판단하며 해석하는 정도입니다. 세상의 해석은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면 아주 잘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판단할 때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만 이해하고 바라봐 준다 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실제 이러한 것도 잘 되지 않습니다.
사실, 삭개오는 죄인이 였습니다. 삭개오 자신이 자신을 봐도 양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였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상담을 하거나 누군가가 충고를 해 준다 해서 자기 자신이 쉽게 바뀌지 않은 것도 삭개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전혀 새로운 해석이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감을 통해 삭개오가 예수님에 의해 해석되었습니다.
8절에 보면,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재산의 문제가 재해석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이 재산이 자신을 위한 것이였기에, 타인이 힘들든, 고통을 당하든, 아니 죽어도, 자신의 배만 불리면 되는 세리장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새롭게 해석됨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재산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돈을 근거로 하는 경제의 삶이 재해석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사건이 였습니다. 우린 삭개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대단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단순히 결단한다고 가능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1회적으론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으면 성의껏 여호와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에 의해 삭개오가 근원적으로 변화되고, 그의 삶 가운데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재산의 문제가 새롭게 재해석됨에 따라, 그는 놀라운 결단과 함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는 정도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구원과 연관되는 것 이였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눔을 통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새롭게 해석되고, 특별히 자신의 삶에 가장 크게 지배하고 있었던 돈의 문제가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짐에 따라, 자신의 소유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 곧 구원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기에 더욱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을 해석하고자 노력하진 않습니까 아니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해석할 때 상처 받진 않습니까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것은, 예수님에 의해 나의 삶이 어떻게 해석되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들어도, 나의 삶이 말씀과 예수님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이 살아간다면 안되겠죠. 특별히 대강절을 맞이하여서 예수님의 오심, 즉 임재 가운데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삭개오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삶 하나 하나가 재해석되고 새로워져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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