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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어라

본문

대림절 둘째 주일 복음서의 주제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어라”난 말로도 해석된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는 것은 세상의 어느 임금님의 행차할 길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 행차하실 길을 예비하라는 전갈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속도로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을 비롯해서 호남 고속도로, 중부 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 남해 고속도로를 비롯해서 지금 고속도로는 전국적으로 거미줄처럼 건설되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고속도로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은 고속도로가 그 나라 국력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세계 각국은 고속도로 건설에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옛날엔 도로 사정이 나빴기 때문에 나라의 임금님이 행차를 하려면 먼저 임금이 행차할 길을 닦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선구자였던 세례요한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 누구요”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이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요. ”(마3:3)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또한 주의 길 곧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예비하라는 길은 차가 다닐 고속도로를 건설하라는 말이 아니다. 비행기가 다닐 항로를 개척하라는 말도 아니다. 배가 다닐 뱃길을 개척하라는 말도 아니다. 이는 성탄에 찾아오시는 주님이 내 마음에 드실 수 있는 심령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선언 속에는 심령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라는 구체적인 설계가 명시되어 있다. 그의 설교는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주님이 강림하시는 길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지금 요단강가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군인들과 세리들, 공무원과 어부들, 창녀와 병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무엇을 회개하란 말인가
지금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유대인만을 성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강한 선민의 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만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사랑하시고 그의 후손인 유대인만을 사랑하신다는 우월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름 때문에 구원을 보장받은 양 우쭐대는 종교적인 원만주의, 편의주의, 그리고 적당주의에 사로자빈 저들에게 회개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구원받는 것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름 때문이 아니라 너희 개개인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거듭나고 출생하는 인간 개혁이 선행하지 않은 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 나와 앉은 우리도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고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를 줄 알고 성경 좀 알고 주일마다 헌금 좀 드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나 한 사람 한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말짱 헛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비결은 회개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의 기쁨 속에 사는 비결도 또한 회개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세리들이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눅3:12), 세금을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지 말라고 하였다. 군인들이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것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월급으로 족한 줄을 알라고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왕은 어떠했는가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부도덕한 통치자였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을 향하여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이나 회개하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은 타서에 얽매인 종교인을 향해서도, 돈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부자들을 향해서도, 군인과 세리들에게도, 부정한 통치자를 향해서도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헬라어에서 말하는 회개(메타노이아)의 원어는 “처음부터”, “위로부터 새로이”라는 뜻이 있는데 회개란 인간의 근본적인 개심을 뜻한다.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삶의 새 길을 향해 전진함을 회개라 한다.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돈만 알던 수전노가 변하여 타인을 향해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됨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나의 주의주장만을 고집하던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전향함을 뜻한다. 현세에만 소망을 두고 살던 사람이 현세를 초월하여 영원한 미래를 향해 마음을 정하고 사는 삶을 회개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관심이 이 세상에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전향함을 뜻한다. 우리가 주일이면 의례적으로 생각 없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에 출석하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 드리는 의식인 그것이 곧 구원받는 조건일 수는 없다. 우리의 내면생활이 중생을 체험하고 내 정신, 내 사상, 나의 언행심사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될 때,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는 한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수 있다는 확신이 올 때 그것이 참으로 회개한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700여 년 전 예언한 말씀(사40:3-4)을 인용하여 “주의 길을 닦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을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고 하였다.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면
 첫째. 높은 산과 언덕을 낮추어야 한다(5절).
자고로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지점인 추풍령은 구름도 쉬고 간다고 할 정도로 높은 고개였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뚫을 때 높은 산과 바위를 깨내기 위하여 콤프레샤로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터트려 높은 산을 낮추어 가면서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심령의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면 우선 교만이란 언덕을 낮추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벧전 5:5)고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는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0)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낮추어 겸손해져야한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기를 원하는가! 겸손해져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받기를 원하는가! 겸손해져야한다. 대림절의 주 되시는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태어나시기를 원하시는가! 겸손해야한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아는체하고 잘난체하고 잘 믿는체하는 그 교만은 여호와 하나님이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16:18)하였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 되게 하지만 겸손은 악마를 천사되게 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만의 언덕을 낮출 수 있을까 높은 산을 이루는 암반을 깨뜨려 낮추려면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터뜨려야 한다. 그러나 교만한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교만하고 저 잘난체하며 사는 사람이라 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다보면 자연히 겸손해지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불순물을 불태워버리는 불이요, 교만이란 바위를 쳐부수는 방망이라. ”(23:29)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양날 선 검보다도 더 날카로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드러내게 한다. ”(4:12)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만이란 마음의 수술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들판에 심은 곡식이 속이 차면 찰수록 머리를 숙이듯이 진실한 크리스천 또한 오래 믿은 분은 믿은 대로, 성경을 많이 알면 아는 대로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높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사람은 높아지리라. ”고 하신 말씀은 매우 역설적인 말과 같지만 이 말이 진리임이 틀림이 없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란 언덕과 요지부동의 바위 같은 교만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콤프레샤로 뚫고 폭발시켜 교만의 언덕이 낮아지게 해야 비로소 겸손의 주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찾을 수가 있고 그 사람의 마음에서 탄생할 수가 있다. 한 번은 주님이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이 말씀은 다른 뜻이 아니라 천국은 예수님을 모신 마음에 있고 예수님이 계신 가정인데, 이는 교만의 언덕이 무너져야 주님이 들어가실 수 있고 주님을 모신 겸손한 마음에 천국이 깃든다는 말이다.
 둘째, 모든 골짜기는 메워져야 한다(5절).
산이나 언덕에서 깎아낸 흙이나 바위덩이는 골짜기에 매워야 한다. 그래서 길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듯이 주님이 왕림하실 주님의 길을 만드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도 불평과 불만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리고 절망과 원망의 골짜기도 있다. 이들 골짜기도 메워야한다.
한때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여려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요셉도 인간인지라 그때 마다 원망할 수도 있었고 절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어 언제인가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그 꿈이 성취될 날이 있으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어떤 처지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았기에 마침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지 13년 만에 애굽의 총리대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동방의 의인이라 칭하는 욥의 생일은 어떠했는가! 그는 하루아침에 그가 사랑하는 열 남매를 잃었다. 종들과 많은 소 떼와 양떼들을 이웃의 불한당들에게 빼앗겨 빈털터리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욥 자신은 무서운 악창이 생겨 문둥병자같이 되고 말았다. 그때 욥의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한 때 동방의 의인이라 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겨왔는데 이 꼴이 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으며,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얼마나 저주스러웠겠는가! 그러나 그는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서도 끝내 그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욥은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던 것, 여호와 하나님이 가져가셨으니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찬양할찌라. ”(1:21)고 하지 않았던가! 참 신앙은 불평할 수밖에 없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도우시고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망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길이요, 원망과 절망하지 않는 믿음이 골짜기를 메우고 주님이 왕림하실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는 비결이다.
 셋째, 굽은 길을 곧게 해야 한다(5절).
고속도로를 건설함에 있어서 굽은 길은 곧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굽은 길에서는 사고발생률이 높고 차가 씽씽 달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은 길 위에서는 차가 잘 달리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시자면 우리의 삐뚤어진 마음도 곧게 개수해야한다. 삐뚤어진 마음을 고쳐먹어야 대림절의 주님이 찾아오실 수가 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부정직한 마음의 소유자가 있다. 삐뚤어진 마음이 소유자도 있다. 꽈배기처럼 꼬인 마음의 소유자가 있다.
구약의 야곱이 한 때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인이었다. 형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권을 가로채기 위하여 늙은 아버지를 속였다. 외삼촌의 살찌 양들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라반을 속였다. 이와 같이 야곱이 한 때는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을 속인 사기꾼이요 부정한 약탈자였으나 후일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부정했던 지난날을, 부정직했던 과거를 회개하기 시작했다.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천사와 씨름하여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보내드릴 수 없다’고 강청하며 매달린 나머지 회개하며 뉘우치는 야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았던가! 복음서에서 굽은 길을 곧게 하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정직했던 사람이나 비양심자들은 회개하라는 말이다.
한 때 여리고성의 삭개오는 돈만 아는 수전노요 피도 눈물도 없는 착취자요, 부정부패한 관리였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였을 때 예수님은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축복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뜻 깊은 대림절에 교만한 자는 겸손해지고, 불평불만의 사람은 감사와 찬양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부정직하고 삐뚤어진 마음의 소유자가 정직해질 때 비로소 성탄에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가 그런 사람의 마음을 찾아 탄생하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아기 예수님의 정신을 품은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면 자연히 양심의 단지가 조성되고, 자연히 지상낙원이 건설될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건설될 이상적 세계를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11:6절 이하에 보면 “그때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어울리고, 표범과 숫염소가 함께 뒹굴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암소와 곰이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뒹굴며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니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 그 날이 언제일까 “바다에 물이 차고 넘치듯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게 될 때. ”라고 하였다.
이 지상에 아기 예수의 계절이 오고 복음의 소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때 바로 그때가 오늘 성서가 말하는 낙원이 회복되는 때요,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미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아기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정에 충만하고 직장에 충만하고, 공장에 충만하고 모든 각계각층에 충만해서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악한 자가 선해지고, 불평불만의 사람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고, 게으른 자가 부지런해지고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날 지상에서 잃었던 낙원이 다시금 회복되는 날이 우리라는 예언이다.
따라서 대림절을 맞는 나부터 예수님이 나의 마음에 들어와 탄생하실 수 있도록 회개를 통하여 심령의 고속도로를 뚫어야한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실 수 있는 고속도로를 뚫어야한다. 예수님이 우리 직장과 사회 구석구석에 들어오실 수 있는 심령의 고속도로를 건설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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