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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왕의 오심(The Coming Of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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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 절기 중에 ‘대강절(待降節, Advent)’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이 절기는 서방교회에서는 4세기부터 지켜왔습니다. 부활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서 사순절을 지키는 것처럼,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서 대강절을 지킵니다. 이 대강절을 영어로 ‘Advent’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원래 이 말은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BC 68~AD 14) 시대이후에 생겨난 말입니다. 로마 황제가 즉위한 후 로마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할 때, ‘황제가 도착했다’, ‘’황제가 왔다‘는 의미로 “His Advent”라고 표현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라고 생각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 단어의 개념을 “구세주의 오심(The Coming of our Savior)”이라는 의미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Advent‘라는 말에 나타난 대강절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성탄절 4주 동안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절기로 대강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대강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이 아침에 ‘The Coming Of The King(왕의 오심)’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침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요한이 출생할 것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엘리사벳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1:31~33)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조금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으로써 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브리엘 천사가 예언한 대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신 줄 아십니까
약속대로 오신 왕
 첫째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탄생하셨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는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가 로마를 다스리며, 전 세계를 호령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는 상당히 거칠었지만, 황제에 오른 다음에는 탁월한 행정가로서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구조사였습니다. 그가 인구조사를 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군대를 쉽게 동원하기 위한 것과, 많은 세금(인두세)을 거두기 위한 것 등,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의 모든 백성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호적을 하기 위해서 각각 자기들의 고향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요셉도 황제의 명령에 의해 호적을 하기 위해서 고향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다윗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160Km나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160Km 정도는 자동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이지만, 당시에 걸어서 가려면 최소한 3~4일, 최대로 1주일은 족히 걸렸습니다. 요셉은 해산할 날이 가까워 무거운 몸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오랜 여행 끝에 다윗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기를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왜 무엇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까지 와서 출산했을까요 물론 그들은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호적을 하기 위해 자기들의 조상들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와서 출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유일 뿐 진정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와서 원정출산을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요즈음이야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혹은 군대 면제를 받기 위하여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원정출산을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원정 출산한 것은 약속을 이루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창세기 49장 10절을 보면 야곱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예언하며 축복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 말씀은 유다지파에서 한 다스리는 자, 곧 왕이신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1,860여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또 민수기 24장 17절에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그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탄생하신다는 예언입니다. 또 미가 선지자는 미가서 5장 2절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고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유대 땅의 베들레헴에 탄생하신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할 때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년 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정확히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하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랜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계획대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오셨습니다.
수년 전에 ‘유진 랑(Eugene Lang)’이라는 백만장자가 뉴욕의 빈민가 어느 초등학교에서 6학년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학교는 빈민가 한 가운데에 있었고, 건물은 다 쓰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어린이들은 아무 희망도 없이 살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시당국의 보고에 따르면 그 학교를 졸업반 어린이들 대부분이 3년 이내에 조직폭력단에 들어가거나 마약을 팔거나 매춘 행위를 하거나 교도소에 수담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지역의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20세 이전에 사망했습니다. 만약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현재 6학년인 어린이들 역시 언니, 누나, 오빠, 형들의 전철을 밟아 어두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유진 랑은 그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강연을 하다 말고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를 떠나지 마십시오. 학교네 남아 있으세요. 여러분 가운데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든 학비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결국 유진 랑의 이 말은 학생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후에 유진 랑은 그가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그 초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책임져주었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들은 학생들 90% 이상이 학교에 남았고, 유진 랑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인 유진 랑도 약속을 지키는데, 하물며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어기시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약속하신대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기필코 이루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기기 바랍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즉흥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오신 왕
 둘째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터키 박물관에는 오스만 터키시대의 왕자들이 누었던 황금요람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요람은 각 가지 보석을 박아 만든, 매우 호화로운 요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마다 자기 자식을 거기에 눕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화려한 곳에 눕지 않으셨습니다. 다같이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요셉과 마리아가 자신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묵을 여관을 찾았지만, 이미 여관마다 호적 하러 온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요셉은 출산 직전에 놓인 아내를 위해 이 집 저 집으로 뛰어다니며 노크를 했지만, 아무도 산모에게 방 한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마리아는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해산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말들이 여물을 먹는 구유에 누였습니다. 이처럼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화려한 궁궐에서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냄새나고 보잘것없고 초라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왕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지난 2004년 11월에 ‘골프황제’라고 불리 우는 타이거 우드가 ‘MBC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타이거 우드는 무급유로 태평양 횡단이 가능한 초특급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지원부대인 ‘타이거팀’과 함께 제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그가 한국에 체류하는 3일 동안, 한국은 타이거 우드 신드롬에 빠진 것처럼 난리였습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 등의 매스컴에서는 그가 묵는 호텔 방을 취재하여 방영하고, 그가 먹는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을 취재하여 방영하고, 그가 개그 프로그램에 나가서 개그맨들 앞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장면을 방영하기도 하는 등,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별명에 걸맞게 ‘골프황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10여명의 개인 경호원들과 국내 경찰의 밀착경호를 받았고, 공식 협찬사인 볼보자동차에서 제공하는 최고급 리무진을 탔고, 85. 8평 규모로 하루 숙박료가 580만원, 뉴질랜드 달러로 하루에 9,000불이 넘는 서귀포 롯데호텔의 로열스위트룸에 묵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1월12일부터 14일까지 딱 3일 동안 한국을 방문하는 대가로, 무려 18억원, 뉴질랜드 달러로 300만 달러나 되는 초청료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금액도 그가 일본에서 열리는 던롭피닉스토너먼트 참가 차 한국을 경유하는 이유를 들어 원래 초청료보다 대폭 인하된 금액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타이거 우드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2박3일 동안 ‘골프황제’ 대접을 받고 한국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대접을 받습니다.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스타로서, 인기가수는 인기가수로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만왕의 왕이셨지만, 왕의 대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있지 못하고 더러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파라독스(paradox)’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비우심‘과 ’낮아지심‘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보좌를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하야(下野)‘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야하셨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그런 비참한 곳에서 탄생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왕은 왕이지만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고전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 우는 조만식 선생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인연이 깊은 관계였습니다. 조 선생이 오산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을 무렵, 주 목사님은 그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또 주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 조 선생은 그 교회의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교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급한 손님이 찾아와 한 10여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대화를 마치고서 조 장로님은 황급히 교회로 왔습니다. 헐레벌떡 도착한 조 장로님이 뒷문을 살짝 열고 보니 벌써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이크, 설교가 시작되었구나.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지’ 이렇게 생각한 조 장로님은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주기철 목사가 설교를 하다말고 갑자기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 조 장로님은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예배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 장로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호통을 치는데도,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꼬박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1시간 동안의 예배 시간이 조 장로님에게는 끔찍이도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거의 예배를 다 마치게 될 즈음, 주 목사님은 조 장로님에게 ”조 장로님, 예배 마치기 전에 기도를 해주십시오. ”라고 대표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조 장로님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히 여긴 이 못난 죄인을 용서 하옵소서..... 또한 이 일로 주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사오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 흑흑..... ” 조 장로님은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교인들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겸손의 본을 보인 조만식 선생은 이로 인하여 더욱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낮추면 낮출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왕의 왕이셨지만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 냄새나고 더러운 말구유에 누우셨던 주님의 겸손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왕
 셋째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저주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비천한 자리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오시지 않고,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끌어올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1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여기 ‘구주’라는 말은 영어로 ‘Savior’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2,000년 전 하늘에서 땅으로 하야하셨습니다.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물 투성이에다 파리가 윙윙거리는 더러운 말구유에 핏덩이 같은 여러분들의 자녀를 눕힌다면 얼마나 비참할까요 그런데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비참한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필이면 그런 비참한 곳에서 탄생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장벽을 허무시기 위해서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세대간의 장벽, 학벌의 장벽, 남녀간의 장벽,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등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이런 장벽들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갈등합니다. 사로 다툽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벽들보다 가장 큰 장벽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벽을 허무시기 위해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더러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앞서서 읽은 11절을 보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라는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이란 시제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과거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또한 미래에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더 중요합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영원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배신해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도,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분당만나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김병삼목사님이 쓰신 글에서 김봉준이라는 분의 “온 세상에서 끌어 모은 감동”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어렸을 때의 운동회 경기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장애물 경주이다. 우리 반에서 두 명의 선수가 나갔는데, 한 아이는 육상선수였고, 또 다른 아이는 키가 가장 작은 아이였다. ”땅“하는 신호음과 함께 육상 선수인 한 아이는 당연히 먼저 뛰어나가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어 가마니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 저만치 앞에 놓인 쟁반 위의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는 접혀진 종이를 입술로 물었다. 그리곤 관중석을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접힌 종이를 펼치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뿔사! 접힌 종이 속엔 ‘할머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 친구가 아무리 잘 뛰면 뭣하나 할머니가 뛰질 못하는 걸.... 결국 그 아이는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에 키가 작은 아이는 종이를 펼치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체육 선생님’이란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씨구나하고 선생님 손을 잡고 뛰는데, 아이의 걸음이 시원찮았던지 체육 선생님은 ”얘, 안 되겠다. 내 등에 엎혀라!“ 하시곤 그 아이를 들쳐 엎고 뛰기 시작했다. 1등으로 들어온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다보면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혜로, 그 장애물들을 통과하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임마누엘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뛰어가십니다. 그러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얘, 안 되겠다. 내 등에 엎혀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임마누엘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맡겨야 우리가 임마누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장애물 앞에서도 우리를 엎고 뛰어가시는 주님께 여러분들의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해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경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000년 전 베들레헴의 조그마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새롭게 탄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각자 각자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성탄의 은혜와 평화와 임마누엘의 복이 충만하게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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