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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본문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당신이 다시 오실 그 날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46) 라고 하셨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앞에 1장에서 말한 부겔로나 허모게네 같이 배은망덕하고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고, 오네시보로 같이 부지런히 찾아와 즐겁게 해 주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만 바라보고 생각하다 보면 신앙에 굴곡이 심하다.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을 만나면 힘이 솟고, 부겔로나 허모게네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야 한다. 쇠를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서 담금질하거나 열처리를 한다. 열처리를 하면 같은 쇠지만 다른 쇠를 깎는 공구로 쓰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를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강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강한 성도, 능력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1.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자세
 첫째,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
웨렌 위어스비는 "기독교인의 인생은 놀이터가 아니고 싸움터이다"라고 말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말하기를 "우리의 신앙생활은 화려한 여객선을 타고 휴가를 즐기는 생활이 아니라 전투함을 탄 해군 생활이다"라고 했다. 여객선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지만 군함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다. 모두 목적이 있고 임무가 있다. 우리 교회는 여객선이 아니다. 군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다. 이분이 대장이다. 이 분을 위해 싸워야 한다. 군사는 대장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대장을 지키고 대장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좋은 군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라면 결코 '아니오' 할 수 없을 것이다. 항명죄는 곧 총살형에 해당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1) 좋은 군사는 싸움의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누구와 싸우는지 모른다면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대장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싸워야 하며,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하셨다.
(2) 좋은 군사는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미 군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고난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의 고난은 혼자 받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 군사된 사람들이 함께 받는 것이다. 서로 격려하고 잡아주며(살전 5:14)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다.
(3) 좋은 군사는 항상 임전태세(臨戰態勢)를 갖춘 사람이다. 유비무환, 출전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성도의 싸움 대상은 ① 죄와 싸우는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하였도다"(히 12:4)라고 하였다. ②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하였다. ③ 원수 마귀와 싸워야 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18-19)고 하였다.
(4) 좋은 군사는 강해야 한다. 강한 군인을 만들기 위하여 훈련한다.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훈련에 있다. 군인은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은 군인은 자신의 목숨을 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격이 되는 것이다.
(5) 좋은 군사는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직 모집한 자 즉 대장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훈련 잘 받고 의무에 충실한 군인은 절대로 군의 규율을 어기면서 함부로 밖에 나가지 않는다. 탈영하지 않는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제자양육훈련을 잘 받은 성도는 함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 자기 뜻대로 편한 대로 자기 기분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 믿지 않는다. 이러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이다.
 둘째, 좋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
(1) 좋은 선수는 목표를 분명히 바라볼 줄 안다. 선수의 목표는 면류관이다.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뛰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2) 좋은 선수는 무엇보다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 적당히 반칙을 이용하여 경기해야 하는 것은 프로레스링 밖에는 없다. 아무리 경기를 잘했다 해도, 아무리 성적이 좋다 해도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상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마 7:23). 지난 88 올림픽대회에 캐나다 벤존슨은 달리기에 분명히 1위를 하였으나 법대로 경기하지 않았기에 그만 탈락되고 말았다.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쉽게 '거짓'을 부린다거나 자기 꾀를 쓰면 안 된다.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다. 교단에는 교단법이 있다. 사회에는 사회통념과 규범이 있고 국가에는 국법이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법은 다 지켜야 하는 것이다.
 셋째, 좋은 농부가 되어야 한다.
좋은 농부는 부지런한 농부이다. 좋은 농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이다. 농사처럼 수고해야 하는 직업도 흔치 않다. 기회를 놓치면 농사는 망친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아예 농사지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때를 놓치지 않고 수고하는 농부에게는 곡식을 먼저 받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
훌륭한 농부는 부지런하다. 새벽별을 보고 들녘에 나가서 저녁 늦게 별을 보면서 돌아오는 농부는 부지런한 농부이다. 이른봄이 되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부풀게된다. 보리가 뿌리 내리지 못해 말라죽으므로 끊임없이 보리밟기를 하여 얼어붙었던 땅을 차곡차곡 다져 준다. 이렇듯 성도의 마음 밭에 죄악의 봄바람으로 들뜬 것을 열심히 자기 자신을 밟아 짓눌려야 한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과 또한 솟아오르는 지열 속에서 몸이 익을 정도로 화끈거리면서도 김을 맨다. 논에는 벼 잎사귀에 얼굴과 팔뚝이 다 찔려 상처투성이가 된다. 이렇듯 성도는 어려운 난관 중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십자가 주님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로서 일을 해야 한다. 추수하는 가을에는 익은 곡식 거두는 기쁨에 피로한 줄도 잊고 몸을 아끼지 않고 땀흘려 추수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타작에 몰두한다. 이렇듯 성도는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 수확에 여념이 없어야 하며 알곡타작에 몰두하여야 한다. 농부가 이른봄부터 늦가을까지 바쁘게 부지런한 결과 추운 겨울이 와도 양식걱정 없이 평안히 엄동설한을 지낼 수 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복음의 씨를 울면서 눈물로 뿌리며 부지런히 가꾸고 물주며 김매준 결과 즐겁고 기쁜 천국의 평안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는 두 가지 권면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에 빠져 예수는 잊어버릴 때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염려한 것이다. 결혼식을 위해 예식장, 아름다운 드레스, 많은 축하객들, 신혼살림들이 준비되었다 해도 주인공인 신부를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신실한 일꾼들일수록 종종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기억해야 한다.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이다. 살아 나셨던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지금도 내 곁에 함께 계신 그리스도이다.
또한 다윗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인간성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던 그리스도, 온갖 모욕과 천대를 받으시고도 묵묵히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를 기억해야 한다. 수 없이 눈물을 흘리셨으나 한 번도 웃으신 일이 없는 주님이다. 아니 웃으실 일이 한 번도 없던 분이다. 그런 중에도 항상 주님 뜻만 따르시던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기억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있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했다. 이번 2차 투옥은 사도행전 28장에 나오는 1차 투옥 때와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 때는 셋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그들에게 담대히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고 했다.
그러나 다시 옥에 갇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A. D. 64년 7월19일 로마시에는 대화재가 일어나 일주일동안 타면서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신성한 신전도, 유명한 건물들도, 특히 수많은 시민들의 가옥이 불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타 죽고 부상당했다. 이 때 네로 황제는 탑 꼭대기에서 화재를 지켜보면서 불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있었다. 네로의 고용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 때 네로는 이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고 그 유명한 기독교 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때 바울은 다시 잡혀 옥에 갇힌 것이다. 이제 다시 풀려나거나 살아날 소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 " 몸을 가둔다고 복음이 가두어지지 않다. 설교자를 가둔다고 설교하는 말씀까지 가두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추방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진리를 추방할 수는 없다. 사람을 죽인다고 진리가 죽지는 않다. 무엇이 복음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가 시간도, 돈도, 환경도, 온갖 박해도 복음의 뜨거운 열정 앞에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오늘 말씀을 마친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 주간을 보내고 있다. 이미 2000년 전에 오신 주님도 기억해야 하겠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복음의 열정을 되찾자. 군사와 같이 농부와 같이 운동선수와 같이 최선을 다하면서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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