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본문
지난 월요일에 출발해서 다녀온 미얀마는 본래 버마라고 부르던 나라입니다. 미얀마 아웅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1983년 10월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고 아웅산 국립모지를 참배하려고 하다가 17명의 우리나라 유능한 분들을 잃었던 곳입니다. 한반도의 3배, 대한민국의 여섯배의 크기로서 자원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 5천만 정도됩니다. 수도는 양곤이라는 곳인데 5-6백만 정도 됩니다. 월요일에 출발해서 태국 방콕공항에서 두 시간 기다렸다가 작은 비행기를 갈아타고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김상옥 선교사가 선교하는 지역에 가려면 다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 더 가야 하기에 선교사가 보낸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화요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선교지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약 80석 정도 되는 소형비행기로서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였습니다. 왠지 좀 불안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로 가는 중에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 수리를 해야 갈 수 있다고 해서 다시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선교사님은 휴대폰도 없고 전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30분 정도 기다리니다시 비행기를 타라고 해서 탔습니다.
이륙하다가, 아니 공중에 날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감고 기도하는 가운데 결국 비행기는 날았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미얀마 제2의 도시이자 지난2006년도에 양곤에서 약 320km 떨어진 만달레이였습니다. 선교사님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리다가 비행기 고장으로 늦어진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며 /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부터 기다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지나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메시야를 기다렸다가 만난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장 69-71절 말씀에 보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누가복음2장 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은 기다렸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역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과부된 지 84년 된 안나 할머니도 기다렸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사실 아기예수탄생하심을 기다렸던 사람들 중에 동방박사 세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그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 칭하는 절기를 오늘부터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 안에 크고 작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선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놓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이것 또한 우리에게 많은 소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일들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40편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오랫동안 기도해놓고 응답을 기다렸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놓고 기다릴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37편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면서 홍수를 기다렸는데 무려 12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릴 때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시편 130편 5-6절 말씀,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보초병들이 날이 빨리 새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하다고 고백하는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고난 가운데서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최대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왜 성도들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지, 성경 속에 나타난 약속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약속을 했더라도 그분을 만남이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있음을 기대하지 않고는 기다리지 않게 됩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이유는,
① 안식할 처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처소인 천국에는 눈물도 근심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안식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② 영광의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의 때에는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함의 대가로 주어질 영광의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충성을 다한 성도들은 자신의 행위대로 주어질 이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③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영생이 있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이제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는 영생이 온전히 주어지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하심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썩지 않을 참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망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망에 우리 이웃도 동참하게 해야 할 의무가 또한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하박국서는 하박국 선지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1장에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이방 백성들로부터 곤란을 겪고 있어 기도하는데 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방인들은 형통하고 자기들은 이방 국가의 공격을 받아 지배를 당함으로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왜 악한 자들이 오히려 왕성하고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의한 이방 나라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1장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장13-14절 말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은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보면 1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우선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하실지 반드시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3절입니다.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반드시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을 갈무리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가리켜 기록하기를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천국을 기다리는 자,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우리도 항상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한 기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한 기한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기엔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더딘데도 지체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체되는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시간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기다리면 사실 그렇게 간절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 기다림이 더 간절할 것입니다.
사실 기다림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서는 임신을 하면 출생을 기다리게 됩니다. 출산을 하면 빨리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배우자를 기다립니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 날자를 정해놓으면 결혼식 올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살다가 끝에는 죽는 날을 기다립니다. 물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요, 영생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죽음의 날을 기다립니다. 죽으면 인생무상으로 끝나버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우리들은 부활의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오시면 부활하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이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날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며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기다리는 자는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미얀마 김상옥 선교사님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잠잘 방과 이부자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공항에 내렸을 때 태워갈 차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사모님은 우리가 점심때가 다 되어 도착하니까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마태복음25장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가리켜 어리석은 처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결국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26장8절 말씀,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재림하심의 기다림도 중요하지만 순간순간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면 오고 안와도 괜찮다고 하면 이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빌립보서3장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한 것은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맛을 느끼게 만들고 그 삶을 보다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마그리트 히긴스라는 분은 한국 전쟁 때에 종군하면서 참전 취재해서 풀리쳐 상을 받은 유명한 기자입니다. 그녀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세가 불리해져서 후퇴작전을 하고 있는, 그리고 포위당해서 절망 속에 있는 미 해병 중대를 일선에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콩 통조림을 따먹고 있는 한 병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내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
그는 슬픈 낯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아주 유명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내게 내일을 주세요” 미래가 보장되면 이까짓 고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은 미래만 있다면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미래가 암울하고 이러다가 아주 망하는 게 아닌가, 아주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 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갇혀있던 악명 높았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 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픈 분들은 치료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사업이 잘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직장이 없는 청년들은 직장에 들어갈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고3수험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원서를 내면 합격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다립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문제는 기다림에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시련가운데서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로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37:7절 말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
소망은 기다리는 자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은 기다리는 자가 차지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그 약속이 더딜지라도 기다립시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 5천만 정도됩니다. 수도는 양곤이라는 곳인데 5-6백만 정도 됩니다. 월요일에 출발해서 태국 방콕공항에서 두 시간 기다렸다가 작은 비행기를 갈아타고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김상옥 선교사가 선교하는 지역에 가려면 다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 더 가야 하기에 선교사가 보낸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화요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선교지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약 80석 정도 되는 소형비행기로서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였습니다. 왠지 좀 불안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로 가는 중에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 수리를 해야 갈 수 있다고 해서 다시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선교사님은 휴대폰도 없고 전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30분 정도 기다리니다시 비행기를 타라고 해서 탔습니다.
이륙하다가, 아니 공중에 날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감고 기도하는 가운데 결국 비행기는 날았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미얀마 제2의 도시이자 지난2006년도에 양곤에서 약 320km 떨어진 만달레이였습니다. 선교사님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리다가 비행기 고장으로 늦어진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며 /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부터 기다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지나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메시야를 기다렸다가 만난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장 69-71절 말씀에 보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누가복음2장 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은 기다렸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역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과부된 지 84년 된 안나 할머니도 기다렸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사실 아기예수탄생하심을 기다렸던 사람들 중에 동방박사 세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그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 칭하는 절기를 오늘부터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 안에 크고 작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선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놓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이것 또한 우리에게 많은 소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일들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40편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오랫동안 기도해놓고 응답을 기다렸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놓고 기다릴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37편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면서 홍수를 기다렸는데 무려 12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릴 때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시편 130편 5-6절 말씀,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보초병들이 날이 빨리 새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하다고 고백하는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고난 가운데서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최대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왜 성도들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지, 성경 속에 나타난 약속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약속을 했더라도 그분을 만남이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있음을 기대하지 않고는 기다리지 않게 됩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이유는,
① 안식할 처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처소인 천국에는 눈물도 근심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안식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② 영광의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의 때에는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함의 대가로 주어질 영광의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충성을 다한 성도들은 자신의 행위대로 주어질 이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③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영생이 있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이제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는 영생이 온전히 주어지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하심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썩지 않을 참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망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망에 우리 이웃도 동참하게 해야 할 의무가 또한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하박국서는 하박국 선지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1장에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이방 백성들로부터 곤란을 겪고 있어 기도하는데 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방인들은 형통하고 자기들은 이방 국가의 공격을 받아 지배를 당함으로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왜 악한 자들이 오히려 왕성하고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의한 이방 나라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1장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장13-14절 말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은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보면 1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우선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하실지 반드시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3절입니다.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반드시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을 갈무리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가리켜 기록하기를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천국을 기다리는 자,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우리도 항상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한 기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한 기한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기엔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더딘데도 지체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체되는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시간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기다리면 사실 그렇게 간절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 기다림이 더 간절할 것입니다.
사실 기다림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서는 임신을 하면 출생을 기다리게 됩니다. 출산을 하면 빨리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배우자를 기다립니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 날자를 정해놓으면 결혼식 올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살다가 끝에는 죽는 날을 기다립니다. 물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요, 영생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죽음의 날을 기다립니다. 죽으면 인생무상으로 끝나버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우리들은 부활의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오시면 부활하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이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날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며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기다리는 자는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미얀마 김상옥 선교사님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잠잘 방과 이부자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공항에 내렸을 때 태워갈 차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사모님은 우리가 점심때가 다 되어 도착하니까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마태복음25장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가리켜 어리석은 처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결국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26장8절 말씀,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재림하심의 기다림도 중요하지만 순간순간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면 오고 안와도 괜찮다고 하면 이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빌립보서3장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한 것은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맛을 느끼게 만들고 그 삶을 보다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마그리트 히긴스라는 분은 한국 전쟁 때에 종군하면서 참전 취재해서 풀리쳐 상을 받은 유명한 기자입니다. 그녀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세가 불리해져서 후퇴작전을 하고 있는, 그리고 포위당해서 절망 속에 있는 미 해병 중대를 일선에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콩 통조림을 따먹고 있는 한 병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내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
그는 슬픈 낯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아주 유명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내게 내일을 주세요” 미래가 보장되면 이까짓 고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은 미래만 있다면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미래가 암울하고 이러다가 아주 망하는 게 아닌가, 아주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 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갇혀있던 악명 높았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 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픈 분들은 치료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사업이 잘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직장이 없는 청년들은 직장에 들어갈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고3수험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원서를 내면 합격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다립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문제는 기다림에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시련가운데서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로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37:7절 말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
소망은 기다리는 자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은 기다리는 자가 차지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그 약속이 더딜지라도 기다립시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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