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대림의 소망
본문
우리 나라 교회들 가운데는 소망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여기 저기에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 이름을 지을 때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많이 기도하고 지혜를 모을 것입니다. 그 교회의 목회철학, 그 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것을 이름에 담으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소망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저기 강남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교회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소망교회가 있는데 그 영향으로, 그 교회를 닮고 싶어서, 무엇보다도 그 교회처럼 빨리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소망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좋은 것, 꼭 필요한 것,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일산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이름을 한소망교회라고 했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크다, 바르다, 하나뿐이다, 이 목사님은 그것 말고 다른 뜻들을 많이 찾아내서 자기 교회 이름에 30여 가지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한국의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자, 한국민족은 한(恨)이 유난히 많은 민족인데 그 한을 소망으로 극복하자, 소망 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뜻들을 부여했습니다.
소망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교회 이름 가운데 제일 많은 것은 제일교회와 중앙교회라고 합니다. 어디가나 제일교회들이 있고 중앙교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그 교회들이 다 제일 되는 교회가 되고 싶어하고 중앙에 있는 교회들이 되고 싶어하는 소망이 담긴 것입니다.
인천은 감리교 도시입니다. 인천에는 6·25 사변 직후까지 장로교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1952년부터 인천에 장로교회들을 세울 때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를 제일장로교회, 그 다음에 세워진 교회를 제2장로교회, 이렇게 교회 이름을 정해 나갔습니다. 제칠 장로교회까지 세운 다음에 제일교회만 빼고는 교회 이름을 다 바꿨습니다. 인천 송도에 있는 송도장로교회는 원래 제3장로교회였습니다.
교회 이름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우리 교회가 왜 제일교회가 아니고 제이교회야' '우리 교회는 왜 제육 교회야' 이런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흐름에서는 벗어납니다만 교회 이름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지금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1979년에 처음으로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탄생했는데 지금은 우리 나라에 백 개가 훨씬 넘는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서울에만 22개 이상의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로 정하는 것은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의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하는 의지와 기도제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가 있어서 안디옥 교회라고 이름을 정한 교회의 담임목사님들에게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라고 정한 이유를 알아보았는데 대답이 한결 같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우리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라고 이름지은 것은 초대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가 되고자함입니다. 이 같은 소원을 갖게 된 것은 제가 목포에서 목회 할 때 목요일 저녁은 언제나 유달산에서 밤새워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마게도냐의 환상을 나도 보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이후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고 선교지향적인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양교회는 한국교회의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런 흐름에 앞장을 서야할 것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는 대로 러시아에 가서 모스크바에 있는 감리교 신학원과 로스토프에 있는 신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작년에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다음 번에는 이단에 대해서 가르칠 것입니다. 러시아와 중국 같이 아직 신학적인 훈련이 약한 곳에는 이단이 많이 날뛰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교회이면서도 선교에 힘쓰고 구제에도 힘썼는데 러시아의 교회들도 안디옥 교회처럼 되기 바랍니다" 하는 점을 강조했더니 '아직 이릅니다'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다시 소망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소망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소망은 성도들이 갖춰야 할 3대 덕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소망 가운데 가장 좋은 소망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가장 소망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수험생들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고 대학졸업생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농촌 총각들은 장가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분은 건강을 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자녀가 없는 가정은 출산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군복무 중인 청년들은 제대가 소원이고 사업하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소망입니다. 공직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은 진급이 소망입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이 잘 되고 교회가 부흥하기 바라는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런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소망보다 더 아름답고 큰 소망, 꼭 가져야 할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말슴 드린 것들이 가지 소망이라면 뿌리가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소망입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소망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이 소망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은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베들레헴 목동들, 동방방사들, 시므온과 안나가 주님을 만난 과거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오늘 묵상 중에 만나는 주님이 있고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만나는 주님이 있고 설교를 듣다가 만나는 주님이 있습니다. 신비체험 가운데 만나는 주님이 있습니다. 현재적인 만남입니다.
교회에서는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주님을 만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좋든지 싫든지 간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래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목사님,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죽는 것도 소망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절망이고 끝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호흡이 끝나는 것은 영생의 한 과정입니다.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차원 높은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사관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 21-24)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최근 교회 안에 장례를 만난 가정들이 참 많은데 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망도 필요합니다. 소망은 인생이라는 배가 앞으로 나가게 하는 돛입니다. 절망은 인생이라는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닻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에 활기를 줍니다. 사람들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매일 일하고 삽니다. 사람의 모든 활동, 모든 수고의 배후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망은 한계가 있습니다. 소망이 성취된 다음에 거의 빠짐없이 찾아오는 것은 허탈감입니다. 환멸의 비애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삶의 경험이 풍부한 분들은 소망이 성취되었을 때보다 소망을 가지고 힘쓸 때가 더 좋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상대적입니다. 여기 군대 생활을 체험한 분들, 훈련받을 때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훈련이 빨리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훈련소 수료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병 생활보다 더 힘든 초년병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절대적인 소망입니다.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이 소망이 이뤄졌을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만을 맛보게 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어느 주일에 교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왕은 목사님을 만나 오늘 나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퍽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일수록 주님의 재림을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여왕님, 왜 여왕님의 생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바라십니까" 했더니 여왕은 "그 분의 축복 받은 발아래 내 왕관을 놓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가지 교훈이 있는 대답입니다. "나는 영국의 여왕이지만 그 분은 왕중의 왕입니다.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분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는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인 나를 보고 '여왕은 왕이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겠다'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더 큰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 하는 믿음의 고백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겸손함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떳떳하게 기다릴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이번에 이차 상봉을 한 남북이산가족들 가운데는 헤어졌던 부부들도 여러 쌍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헤어진 다음에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룬 경우도 많습니다. 분단이 빚은 불가피한 일이지요. 통일을 위한 실무작업 가운데 하나가 가족법을 개정해서 이런 불가피한 이중결혼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들은 좀 멋 적어 하면서 미안스러운 마음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오십 여 년 간 수절한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들은 떳떳한 마음으로 ,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절하며 살아야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다시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세상과 결혼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려 세속적인 풍조에 따르는 것은 간음입니다. 간음한 몸으로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장차 나타나실 주님을 만날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고백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이런 예화를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전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꼭 다시 온다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을까' 궁금하지요. 지금 같으면 사진을 보면 되겠지만 그 때는 사진이 없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여러 사람과 함께 오신다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아들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나와 비슷하게 생기셨을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왜 우리 아버지니까!
또 내가 이렇게 아버지 만날 것을 갈망하는 가운데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을 것이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나와 비슷하게 생기셨을 것이라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영성훈련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성훈련을 신비체험 운동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른 의미의 영성훈련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새벽에 남선교회 12월 월례조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올해 마지막 월례조찬기도회에서 설교하면서 결산의 달이 되었는데 우리는 신앙의 결산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경건생활의 결산을 해야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었나, 기도생활, 봉사생활, 교회출석, 봉헌생활, 결산을 해 보아야합니다.
내 영이 얼마나 자랐나, 내 속 사람이 얼마나 새로워졌나 결산을 해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내 모습이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닮게 되었는지도 결산해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시작될 때는 내 모습이 예수님을 많이 닮지 않았다면 지금은 많이 닮아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영적 생활의 열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면에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내 모습이 예수님을 닮아 있을 줄로 안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요한처럼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 아들은 또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게도 훌륭한 아버지가 계셔! 이제 얼마 안 있어서 그 아버지가 당당한 모습으로 오실 거야!" 그리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살 것입니다.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숫자적인 성장이 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도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의 부흥을 원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가 부흥하기 원하고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목양신앙공동체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를 부흥하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주님을 강렬하게 기다리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교회 주보 5면에는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력 중심의 가정 예배"는 두어 주일부터는 실리지 않게 됩니다. 저희 교회가 전도에 힘써야 하는데 주보를 생생한 전도지로 만들기 위해서 마지막 면에는 교회 소개, 교회 오는 길, 버스 시간표 안내 등을 넣고 지면 구성을 일부 바꾸는데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는 일 년 동안 실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싣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거기에 기록한 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할 때 "마라나타!",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오 주여, 오늘 오시렵니까" 했고 밤이 되면 "주님, 이 밤에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주님선(朱南善)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주무실 때도 바지의 대님을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얼른 뛰어나가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간절한 믿음은 로마의 무서운 박해를 이기게 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를 부흥하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갈망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부흥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성서가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속사는 이제 재림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구원 열차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역을 출발해서 타락 역을 지나 심판 역을 지나 예수님의 초림(初臨) 역을 지나 십자가 역을 지나 부활 역을 지나 성령강림 역을 지나 이제 종착역인 재림 역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조금씩 진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기상이변 등 그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어느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 오신다고 하는 것이나 주님이 다시 오시니까 일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 갈 필요도 없다고 하는 주장들은 무서운 이단사상입니다. 우리는 이미 1992년에 그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불분명한 신앙, 예를 들어 주님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그런 이단보다 더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해야합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세 가지 강림을 기념하는데 첫째는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초림(初臨), 둘째는 지금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오시는 현림(現臨), 셋째는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再臨)입니다. 우리는 초림에 대해 감사하고 현림을 체험해야 하며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림신앙을 가지고 로마의 박해를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의 박해보다도 더 무서운 불신풍조와 물질주의와 퇴폐풍조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대 첫 해의 대림절이 재림신앙을 분명히 하고 기도하며, 재림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하며 깨어 있음으로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가 될 것을 다짐하는 절기가 되기를 다시 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망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저기 강남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교회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소망교회가 있는데 그 영향으로, 그 교회를 닮고 싶어서, 무엇보다도 그 교회처럼 빨리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소망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좋은 것, 꼭 필요한 것,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일산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이름을 한소망교회라고 했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크다, 바르다, 하나뿐이다, 이 목사님은 그것 말고 다른 뜻들을 많이 찾아내서 자기 교회 이름에 30여 가지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한국의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자, 한국민족은 한(恨)이 유난히 많은 민족인데 그 한을 소망으로 극복하자, 소망 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뜻들을 부여했습니다.
소망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교회 이름 가운데 제일 많은 것은 제일교회와 중앙교회라고 합니다. 어디가나 제일교회들이 있고 중앙교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그 교회들이 다 제일 되는 교회가 되고 싶어하고 중앙에 있는 교회들이 되고 싶어하는 소망이 담긴 것입니다.
인천은 감리교 도시입니다. 인천에는 6·25 사변 직후까지 장로교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1952년부터 인천에 장로교회들을 세울 때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를 제일장로교회, 그 다음에 세워진 교회를 제2장로교회, 이렇게 교회 이름을 정해 나갔습니다. 제칠 장로교회까지 세운 다음에 제일교회만 빼고는 교회 이름을 다 바꿨습니다. 인천 송도에 있는 송도장로교회는 원래 제3장로교회였습니다.
교회 이름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우리 교회가 왜 제일교회가 아니고 제이교회야' '우리 교회는 왜 제육 교회야' 이런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흐름에서는 벗어납니다만 교회 이름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지금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1979년에 처음으로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탄생했는데 지금은 우리 나라에 백 개가 훨씬 넘는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서울에만 22개 이상의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로 정하는 것은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의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하는 의지와 기도제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가 있어서 안디옥 교회라고 이름을 정한 교회의 담임목사님들에게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라고 정한 이유를 알아보았는데 대답이 한결 같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우리 교회 이름을 안디옥 교회라고 이름지은 것은 초대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가 되고자함입니다. 이 같은 소원을 갖게 된 것은 제가 목포에서 목회 할 때 목요일 저녁은 언제나 유달산에서 밤새워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마게도냐의 환상을 나도 보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이후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고 선교지향적인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양교회는 한국교회의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런 흐름에 앞장을 서야할 것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는 대로 러시아에 가서 모스크바에 있는 감리교 신학원과 로스토프에 있는 신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작년에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다음 번에는 이단에 대해서 가르칠 것입니다. 러시아와 중국 같이 아직 신학적인 훈련이 약한 곳에는 이단이 많이 날뛰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교회이면서도 선교에 힘쓰고 구제에도 힘썼는데 러시아의 교회들도 안디옥 교회처럼 되기 바랍니다" 하는 점을 강조했더니 '아직 이릅니다'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다시 소망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소망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소망은 성도들이 갖춰야 할 3대 덕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소망 가운데 가장 좋은 소망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가장 소망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수험생들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고 대학졸업생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농촌 총각들은 장가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분은 건강을 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자녀가 없는 가정은 출산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군복무 중인 청년들은 제대가 소원이고 사업하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소망입니다. 공직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은 진급이 소망입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이 잘 되고 교회가 부흥하기 바라는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런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소망보다 더 아름답고 큰 소망, 꼭 가져야 할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말슴 드린 것들이 가지 소망이라면 뿌리가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소망입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소망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이 소망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은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베들레헴 목동들, 동방방사들, 시므온과 안나가 주님을 만난 과거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오늘 묵상 중에 만나는 주님이 있고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만나는 주님이 있고 설교를 듣다가 만나는 주님이 있습니다. 신비체험 가운데 만나는 주님이 있습니다. 현재적인 만남입니다.
교회에서는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주님을 만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좋든지 싫든지 간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래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목사님,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죽는 것도 소망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절망이고 끝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호흡이 끝나는 것은 영생의 한 과정입니다.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차원 높은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사관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 21-24)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최근 교회 안에 장례를 만난 가정들이 참 많은데 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망도 필요합니다. 소망은 인생이라는 배가 앞으로 나가게 하는 돛입니다. 절망은 인생이라는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닻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에 활기를 줍니다. 사람들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매일 일하고 삽니다. 사람의 모든 활동, 모든 수고의 배후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망은 한계가 있습니다. 소망이 성취된 다음에 거의 빠짐없이 찾아오는 것은 허탈감입니다. 환멸의 비애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삶의 경험이 풍부한 분들은 소망이 성취되었을 때보다 소망을 가지고 힘쓸 때가 더 좋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상대적입니다. 여기 군대 생활을 체험한 분들, 훈련받을 때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훈련이 빨리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훈련소 수료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병 생활보다 더 힘든 초년병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절대적인 소망입니다.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이 소망이 이뤄졌을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만을 맛보게 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어느 주일에 교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왕은 목사님을 만나 오늘 나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퍽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일수록 주님의 재림을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여왕님, 왜 여왕님의 생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바라십니까" 했더니 여왕은 "그 분의 축복 받은 발아래 내 왕관을 놓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가지 교훈이 있는 대답입니다. "나는 영국의 여왕이지만 그 분은 왕중의 왕입니다.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분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는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인 나를 보고 '여왕은 왕이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겠다'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더 큰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 하는 믿음의 고백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겸손함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떳떳하게 기다릴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이번에 이차 상봉을 한 남북이산가족들 가운데는 헤어졌던 부부들도 여러 쌍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헤어진 다음에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룬 경우도 많습니다. 분단이 빚은 불가피한 일이지요. 통일을 위한 실무작업 가운데 하나가 가족법을 개정해서 이런 불가피한 이중결혼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들은 좀 멋 적어 하면서 미안스러운 마음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오십 여 년 간 수절한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들은 떳떳한 마음으로 ,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절하며 살아야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다시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세상과 결혼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려 세속적인 풍조에 따르는 것은 간음입니다. 간음한 몸으로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장차 나타나실 주님을 만날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고백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이런 예화를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전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꼭 다시 온다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을까' 궁금하지요. 지금 같으면 사진을 보면 되겠지만 그 때는 사진이 없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여러 사람과 함께 오신다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아들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나와 비슷하게 생기셨을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왜 우리 아버지니까!
또 내가 이렇게 아버지 만날 것을 갈망하는 가운데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을 것이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나와 비슷하게 생기셨을 것이라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영성훈련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성훈련을 신비체험 운동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른 의미의 영성훈련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새벽에 남선교회 12월 월례조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올해 마지막 월례조찬기도회에서 설교하면서 결산의 달이 되었는데 우리는 신앙의 결산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경건생활의 결산을 해야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었나, 기도생활, 봉사생활, 교회출석, 봉헌생활, 결산을 해 보아야합니다.
내 영이 얼마나 자랐나, 내 속 사람이 얼마나 새로워졌나 결산을 해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내 모습이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닮게 되었는지도 결산해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시작될 때는 내 모습이 예수님을 많이 닮지 않았다면 지금은 많이 닮아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영적 생활의 열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면에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내 모습이 예수님을 닮아 있을 줄로 안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요한처럼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 아들은 또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게도 훌륭한 아버지가 계셔! 이제 얼마 안 있어서 그 아버지가 당당한 모습으로 오실 거야!" 그리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살 것입니다.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숫자적인 성장이 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도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의 부흥을 원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가 부흥하기 원하고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목양신앙공동체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를 부흥하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주님을 강렬하게 기다리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교회 주보 5면에는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력 중심의 가정 예배"는 두어 주일부터는 실리지 않게 됩니다. 저희 교회가 전도에 힘써야 하는데 주보를 생생한 전도지로 만들기 위해서 마지막 면에는 교회 소개, 교회 오는 길, 버스 시간표 안내 등을 넣고 지면 구성을 일부 바꾸는데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는 일 년 동안 실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싣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거기에 기록한 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할 때 "마라나타!",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오 주여, 오늘 오시렵니까" 했고 밤이 되면 "주님, 이 밤에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주님선(朱南善)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주무실 때도 바지의 대님을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얼른 뛰어나가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간절한 믿음은 로마의 무서운 박해를 이기게 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를 부흥하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갈망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부흥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성서가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속사는 이제 재림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구원 열차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역을 출발해서 타락 역을 지나 심판 역을 지나 예수님의 초림(初臨) 역을 지나 십자가 역을 지나 부활 역을 지나 성령강림 역을 지나 이제 종착역인 재림 역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조금씩 진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기상이변 등 그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어느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 오신다고 하는 것이나 주님이 다시 오시니까 일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 갈 필요도 없다고 하는 주장들은 무서운 이단사상입니다. 우리는 이미 1992년에 그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불분명한 신앙, 예를 들어 주님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그런 이단보다 더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해야합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세 가지 강림을 기념하는데 첫째는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초림(初臨), 둘째는 지금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오시는 현림(現臨), 셋째는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再臨)입니다. 우리는 초림에 대해 감사하고 현림을 체험해야 하며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림신앙을 가지고 로마의 박해를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의 박해보다도 더 무서운 불신풍조와 물질주의와 퇴폐풍조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대 첫 해의 대림절이 재림신앙을 분명히 하고 기도하며, 재림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하며 깨어 있음으로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가 될 것을 다짐하는 절기가 되기를 다시 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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