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대림절의 묵상
본문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대림시기에 우리는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특별히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이천년 전의 “사건”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현실 가운데, 찾아오시고 탄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 가운데, 우리 현실 가운데 찾아오시고 탄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인생은 집짓기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 부부가 멀리 여행을 떠나면서 목수에게 집 한 채를 잘 지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수는 주인이 안보니까 얼른 날림으로 지어놓고 겉칠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와서는 이 집의 열쇠를 주면서 “이 집은 자네에게 줄 선물이네”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은 단순히 우리가 거주하는 집만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지어가는 인생이라는 집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해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가면서 내가 짓고 있는 집은 결국 내 집일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리 저리 핑계대고, 남 탓하고, 하루하루 날림으로 지어 놓는 그 집이 결국 내 집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부인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안내하는 천사를 따라가는데 크고 좋은 집은 그냥 지나치고 허름한 오두막집을 안내하더랍니다. 내가 왜 이런 집이냐고 했더니 부인이 보내준 건축자재로는 이집 밖에 지을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 꽤 잘 살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남부럽지 않는 부와 지위를 누리면서, 교양 있고 세련되게, 남보란 듯이 선행도 하면서... 게다가 신앙생활까지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집 말고 또 다른 집을 우리가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 내 집이고, 진짜의 내가 사는 집을 우리는 우리도 모른 채 짓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가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자세히 보면 집을 짓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집을 짓는 이야기로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로 고생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는 그 당시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건설 현장에서 잡부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렸습니다.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 밭 일,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백성을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빠져 나와 시내산에 머물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그들은 또 다른 집을 지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마지막 장인 40장 까지는 그 집을 짓는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 집은 바로 성막입니다.
처음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지은 집은 바로의 설계에 따라 짓는 거대한 집이었습니다. 비돔과 라암셋은 바로가 이집트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을 저장하는 저장 창고로서 바로로서는 아주 자랑스런 건축물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비돔과 라암셋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 규모나 견고함은 유명합니다. 그 당시 바로였던 라암셋 2세는 얼마나 유명했던지 지금도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상이 남아 있고 그의 미이라가 남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성공한 사람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역하며 집을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짓는 집이었습니다.
반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지은 집은 아주 작은 소박한 집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천막으로 지은 이동식 간이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지은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중에 현존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이스라엘의 자발성에 의해 기쁜 마음으로 지어집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집이 어떤 집인지, 내 집이 누구의 설계에 따라 지어지고 있는지 집인지, 우리는 다시 한번 멈추어 잠시 알아차려 봐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노예가 되어 온갖 고역으로 이집트 전역의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저장 창고를 건축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거기서 그 거대한 집을 설계하고 짓는, 그러자니 히브리인들을 온갖 고역으로 고통 속에 몰아넣는 바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늘 우리를 몰아세우는 우리 안에 있는 면박꾼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설계가 그 면박꾼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그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우리를 온전히 살아있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알아차림은 없습니다. 내 생명에 대한 생생한 알아차림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예언자 학개가 말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학개라는 예언자의 이름이 붙은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전 건축이 늦춰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성전재건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개’라는 이름의 뜻은 ‘명절에 속한’ 즉, ‘명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배경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50여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주전 536년에 첫 귀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돌아온 사람들은 고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잃어버린 채 멀리 이국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사는 곧 난관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생존의 염려와 정치적인 어려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밖으로는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이 있었고, 안으로는 흉작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계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초만 놓고는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은 지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 학개가 등장하여 성전 건축을 다시 재건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역사적인 사건과 분명히 맥이 닿아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출애굽기의 말씀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개가 꾸짖는 말,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 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깊은 현존의 느낌 없이, 생생한 삶의 느낌 없이, 실재와 접촉하는 느낌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관성의 힘에 자신을 맡긴 채 정신없이, 그러면서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듯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여러분, 이런 삶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공허한지요 그러나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도 곰곰이 돌이켜 보면서 우리의 손에 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진짜의 “나 자신”과 가까운지, 그 안에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대림절 기간은 우리가 하던 대로 관성으로 가던 힘과 방향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짓고 있는 집이 어떤 집인지, 누구의 설계대로 짓고 있는지를 잠시 알아차리는 시기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춤사위를 따라 하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밝은 별이 비치는 밤에 혼자 있을 때에, 가을에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쉬러 곱향나무 작은 숲으로 내려앉는 것을 우연히 볼 때에, 아이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볼 때에, 우리 가슴 속에 사랑이 있음을 알 때에, 일본 시인 바쇼처럼 고요한 연못, 개구리 나라에서 늙은 개구리 한 마리가 텀벙 하고 물튀기는 소리를 들을 때, 이럴 때 깨우침, 가치관의 전도, 새로움, 비움 그리고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순수한 시각이 여호와 하나님의 춤사위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번 성탄을 기다리면서, 대림의 시기에 우리 안에 이런 알아차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며 빈 가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캄캄한 밤에 별 하나를 우연히 볼 때에, 아파트 사이 사이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안에 슬픔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 이 모든 것을 통해 여러분 안에 영혼의 느낌이 올라올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림절에 여러분을 찾아 오셨음을 알아차리고 여러분 안에 지어지는 성막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인생은 집짓기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 부부가 멀리 여행을 떠나면서 목수에게 집 한 채를 잘 지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수는 주인이 안보니까 얼른 날림으로 지어놓고 겉칠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와서는 이 집의 열쇠를 주면서 “이 집은 자네에게 줄 선물이네”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은 단순히 우리가 거주하는 집만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지어가는 인생이라는 집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해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가면서 내가 짓고 있는 집은 결국 내 집일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리 저리 핑계대고, 남 탓하고, 하루하루 날림으로 지어 놓는 그 집이 결국 내 집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부인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안내하는 천사를 따라가는데 크고 좋은 집은 그냥 지나치고 허름한 오두막집을 안내하더랍니다. 내가 왜 이런 집이냐고 했더니 부인이 보내준 건축자재로는 이집 밖에 지을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 꽤 잘 살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남부럽지 않는 부와 지위를 누리면서, 교양 있고 세련되게, 남보란 듯이 선행도 하면서... 게다가 신앙생활까지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집 말고 또 다른 집을 우리가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 내 집이고, 진짜의 내가 사는 집을 우리는 우리도 모른 채 짓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가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자세히 보면 집을 짓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집을 짓는 이야기로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로 고생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는 그 당시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건설 현장에서 잡부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렸습니다.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 밭 일,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백성을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빠져 나와 시내산에 머물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그들은 또 다른 집을 지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마지막 장인 40장 까지는 그 집을 짓는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 집은 바로 성막입니다.
처음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지은 집은 바로의 설계에 따라 짓는 거대한 집이었습니다. 비돔과 라암셋은 바로가 이집트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을 저장하는 저장 창고로서 바로로서는 아주 자랑스런 건축물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비돔과 라암셋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 규모나 견고함은 유명합니다. 그 당시 바로였던 라암셋 2세는 얼마나 유명했던지 지금도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상이 남아 있고 그의 미이라가 남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성공한 사람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역하며 집을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짓는 집이었습니다.
반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지은 집은 아주 작은 소박한 집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천막으로 지은 이동식 간이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지은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중에 현존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이스라엘의 자발성에 의해 기쁜 마음으로 지어집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집이 어떤 집인지, 내 집이 누구의 설계에 따라 지어지고 있는지 집인지, 우리는 다시 한번 멈추어 잠시 알아차려 봐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노예가 되어 온갖 고역으로 이집트 전역의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저장 창고를 건축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거기서 그 거대한 집을 설계하고 짓는, 그러자니 히브리인들을 온갖 고역으로 고통 속에 몰아넣는 바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늘 우리를 몰아세우는 우리 안에 있는 면박꾼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설계가 그 면박꾼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그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우리를 온전히 살아있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알아차림은 없습니다. 내 생명에 대한 생생한 알아차림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예언자 학개가 말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학개라는 예언자의 이름이 붙은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전 건축이 늦춰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성전재건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개’라는 이름의 뜻은 ‘명절에 속한’ 즉, ‘명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배경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50여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주전 536년에 첫 귀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돌아온 사람들은 고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잃어버린 채 멀리 이국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사는 곧 난관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생존의 염려와 정치적인 어려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밖으로는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이 있었고, 안으로는 흉작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계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초만 놓고는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은 지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 학개가 등장하여 성전 건축을 다시 재건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역사적인 사건과 분명히 맥이 닿아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출애굽기의 말씀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개가 꾸짖는 말,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 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깊은 현존의 느낌 없이, 생생한 삶의 느낌 없이, 실재와 접촉하는 느낌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관성의 힘에 자신을 맡긴 채 정신없이, 그러면서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듯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여러분, 이런 삶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공허한지요 그러나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도 곰곰이 돌이켜 보면서 우리의 손에 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진짜의 “나 자신”과 가까운지, 그 안에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대림절 기간은 우리가 하던 대로 관성으로 가던 힘과 방향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짓고 있는 집이 어떤 집인지, 누구의 설계대로 짓고 있는지를 잠시 알아차리는 시기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춤사위를 따라 하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밝은 별이 비치는 밤에 혼자 있을 때에, 가을에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쉬러 곱향나무 작은 숲으로 내려앉는 것을 우연히 볼 때에, 아이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볼 때에, 우리 가슴 속에 사랑이 있음을 알 때에, 일본 시인 바쇼처럼 고요한 연못, 개구리 나라에서 늙은 개구리 한 마리가 텀벙 하고 물튀기는 소리를 들을 때, 이럴 때 깨우침, 가치관의 전도, 새로움, 비움 그리고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순수한 시각이 여호와 하나님의 춤사위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번 성탄을 기다리면서, 대림의 시기에 우리 안에 이런 알아차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며 빈 가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캄캄한 밤에 별 하나를 우연히 볼 때에, 아파트 사이 사이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안에 슬픔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 이 모든 것을 통해 여러분 안에 영혼의 느낌이 올라올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림절에 여러분을 찾아 오셨음을 알아차리고 여러분 안에 지어지는 성막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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