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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인자 앞에 서기 위하여

본문

기독교는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사도행전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 곁에 두 천사가 당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적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지고 살기가 어렵더라도, 신앙생활하기가 힘들고 핍박이 심하여 곤고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력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12월이 시작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기다릴 때 우리는 무작정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시는 그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일한 삶을 살다가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 앞에 서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말의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21장의 본문 내용이 마태복음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종말의 때에 나타날 현상과 대책에 대해 기록해 놓은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5절부터 시작됩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5-19절까지는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징조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징조는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이 있다(8절)고 했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민족 분쟁과 국제적 전쟁이 발발한다(9-10절)고 했습니다.
세 번째 징조는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발생한다(11절)고 했습니다.
네 번째 징조는 성도들이 여러 사람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수난을 겪게 된다(12절)고 했습니다. 특히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징조는 가족들과 불신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16-17절)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20-24절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3:34-35절 말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19:41-44절 말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와 유대전쟁에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어떻게 망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큰 환란과 백성들에게 진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칼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또는 이방에 사로 잡혀간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힌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밟히는 기간이 자그마치 몇 년이 되었는지 아세요. 70년에 망해서 1948년도에 이스라엘이 새롭게 세워지기까지였으니, 나라 없이 적어도 1880여 년 동안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이스라엘이 국가로 새롭게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회복되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하나의 징조라는 사실입니다. 29절 이하에 보면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고 다른 나무들에게도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고 했습니다. 여름이 가까워 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강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31절에 보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꼭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흥하게 되면 결국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종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25-28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이 다가올 때 나타날 징조는 5-19절 까지의 내용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월성신에 이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주적 질서에 대 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에 혼란에 빠지고 곤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몇 년 전에 서남아시아에 발생한 바다가운데 지진으로 인해 일어난 해일을 기억하십니까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통계를 살펴보면, 1868년 4월 2일 하와이 81명 사망
1868년 8월 13일 칠레 25,000여명 사망
1906년 1월 31일 에콰도르, 콜롬비아 500명~1500여명 사망
1952년 11월 4일 러시아 캄차카반도 해안 사망자수 미확인
1960년 5월 22일 칠레 중남부 해안 칠레 2300여명, 하와이 61명 사망
1964년 3월 28일 알래스카 동남부 120여명 사망
1976년 8월 16일 필리핀 민다니오 5000~8000여명 사망으로 추정하며,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인근에 발생한 것으로 당시 사망자 수가 보고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도네시아 220,000 명, 스리랑카 30,880명, 인도 10,694 명 등 12개 국가에서 27만 여명입니다.
앞으로 남극의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지고 그러면 육지의 3분의 1일 덮인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것을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천체에 굉장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기절할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도 여기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3:10절 말씀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6장12절 이하에 보면 요한이 받은 계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가지고 하나씩 뗄 때마다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때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영광과 능력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영광중에 구름타시고 / 천사들을 세계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이와 같은 때에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들림 받아야 합니다. 들림 받아야 할 우리가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인자 앞에 서기 위해서 살아야 할 행동 지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징조가 있을 때 해야 할 행동지침이라고 할까요.
 첫째,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28절 말씀에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즉 징조가 일어나거든 일어나 멀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때에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저앉아 있거나 패배한 사람처럼 있으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일어나 머리를 들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징조들이 기절하게 만들지라도 성도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떨지 말고 새 시대에 희망과 용기를 갖고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속량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것은 이런 엄청난 재난과 혼란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화가 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구속의 날이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자들에게는 멸망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능력이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힘든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머리를 들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4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우리의 심령이 무디어져서 종말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여 준비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도들에게 구원이 약속되었고, 따라서 일어나 머리를 들고 확신에 차서 기쁨으로 인자의 강림을 맞을 것이나, 조심하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인자의 날이 구속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덫과 같이 임하여 두려움의 날이요, 재난의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의해야 할 유혹들이 술취함과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경고의 메시지는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8:13-14절 말씀에 보면 밭에 씨뿌리는 비유를 하실 때 바위 위에 뿌렸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술취함은 방탕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퇴폐적이고 안일한 삶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삼가 조심스럽게 시대와 상황을 잘 헤아리면서 자신의 삶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술취함과 방탕함과 생혈의 염려가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둔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둔하여 진다는 이 표현의 단어가 구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7장과 8장과 9장에서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보내지 않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 도다” 여기서 ‘완강하다’는 표현이 ‘둔하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결국 술취함과 방탕함과 생혈의 염려는 무거운 짐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케 하고 결실하지 못하게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바로왕의 마음처럼 굳고 단단해져서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성도라 할지라도 마음이 둔하여지면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둔하여져서 어떤 징조가 오더라도 그것이 “인자의 날”임을 감지 못합니다. 여러분 2004년 12월에 인도네시아에 발생한 쓰나미 때 짐승들은 오히려 재난을 감지하고 산으로 올라갔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뜻밖에 임하는 인자의 날을 감지 못하면 그 날이 덫과 같이 되어 자신을 심판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재난과 시련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적 상황에 편승해서 살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이미 이런 일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노아시대입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창세기6:5말씀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인간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지적했습니다. 11절에 보면 노아 시대에는 온 땅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려 120년의 세월동안 방주를 짓게 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홍수가 나서 방주에 들어가야 할 그때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았고 다른 모든 인간은 죽었습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성경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삼손의 경우를 봅시다. 나실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별된 자로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례를 어기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게 함으로 인해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솔로몬 왕을 보세요. 인간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은 신실한 믿음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드렸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큼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로움과 권세의 맛을 알아 정신이 마비되고 마음이 둔하여져서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비극적 결망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대로 번쩍이는 지혜의 제일인자였습니다. 잠언을 무려 3천이나 남겼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타락하여 수많은 여인들의 치맛자락 에서 딩굴었고, 괴물 같은 우상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마음이 마비되니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그런 방심을 경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시대의 문화들입니다. 경계해야 할 문화가 많습니다. 물질중심의 생각, 돈 중심의 삶, 쾌락중심의 삶, 자기중심의 삶, 한마디로 말하면 향략에 젖어들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36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마26: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몸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애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셨고 마지막 임종직전까지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분입니다. 22장39절에 보면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할 동안에 같이 기도하라고 했으나 그들은 결국 졸았습니다. 그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결국 시험에 빠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는데 내어주었고 자신들은 십자가 앞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신 후에는 기도의 사람들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 다락방에 들어가 예수님의 가족들과 은혜 받은 여인들 중심으로 약 120여명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능력으로 그들은 남은 생애를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증인의 삶을 살다가 순교하는 제자들이 다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소망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대림절을 맞아 우리 모두 주님 맞을 준비된 삶을 살도록 합시다. 삼가 조심합시다. 세상 향락에 빠지거나 돈버는데 혈안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이 둔하여져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깨어 기도하지 못하여 결국 덫과 같이 임하는 주님의 날을 맞아 후회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오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마라나타의 모습입니까 롬13:11절 말씀에 있는 대로 지금은 잘 때가 아닙니다. 놀 때가 아닙니다. 깊은 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깰 때입니다. 기도의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아직도 새벽에 잠을 깨우지 못하고 자고 있다면, 아직도 금요기도회를 깨우지 못하고 자고 있다면 이번 대림절에는 다 깨웁시다.
당신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합니다. 어떤 성도님이 남편이 11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픈 곳도 하나 없었다고 합니다. 돈도 잘 벌었다고 했습니다. 그 날도 큰집에 도울 일이 도와주러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녁에 집으로 오시다가 차사고가 나서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은 덫과 같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의 웅변으로도, 그의 열성으로도, 그의 틀림없는 교리로도 또한 그의 힘으로도 측정할 수 없고, 그의 기도로만 측정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올바른 기도 없이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개인 전도와 그 외 많은 일을 할 수 있더라도 이 중 한 가지도 기도가 없는 한 진정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부흥의 더딤을 이상히 여깁니다. 부흥을 가로막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기도의 결핍뿐입니다. 모든 부흥은 기도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영적 삶을 위한 개인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대구시, 강북지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한숨만 지을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경제가 왜 이러냐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왜 이러냐고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이 왜 이모양이냐고 자신을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역대하7:14 말씀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새벽기도는 자신과의 싸움이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의 훈련으로는 더 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새벽기도는 주님이 친히 본을 보여 준신 아름다운 경건의 훈련장입니다.
야곱은 그의 생애의 위기, 막다른 골목에서 당신이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다고(창 32:26) 밤새워 여호와 하나님과 씨름한 일이 있습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한 도시나 민족의 부흥의 배후에도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1859년 미국 뉴욕지역을 휩쓸었던 부흥운동의 진원지는 한 무명의 성도가 창문에 현수막을 치고 기도 동지를 구하면서, 성령의 부흥을 주실 때까지 물러가지 않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 버티고 연속기도한데서 터지게 됐습니다.
1904년에 영국의 웨일즈를 휩쓴 성령과 영적 부흥의 열풍의 진원도 이반 로보트와 4인의 친구들이 넉달 동안 얍복강 가의 야곱 같은 기도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이 땅에 기도의 샘이 터지고 성령의 생수가 터질 때까지, 엘리야의 갈멜산에 비가 내리고 불이 내릴 때까지, 기도의 동지들이여 어게인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다시 우리교회 임하도록 100일 기도하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시다.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기도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직분을 받을 때는 성도들의 본이 되어 모든 영적생활에 본이 되는 삶을 위해서 받은 것입니다. 유명무실한 직분이 되면 여러분의 영적생활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실족하는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화가 미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지 않은 곳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시대를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오는 시험과 환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에 맞는 일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일에 맞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는 죄악으로 넘실거리는 죽음의 파도속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삼가 조심하면서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 앞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가 주님 앞에 다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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