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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하나님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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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회력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이란 라틴어 adventus를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상의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을 시작으로 새로운 해로 접어들었습니다. 한 해의 새로운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주의 부활과 탄생입니다. 우리는 부활과 탄생이라고 하지만, 교회력에서는 탄생과 부활입니다. 그러다가 한가지가 더 추가되었는데 교회가 시작된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입니다. 이 세 가지 특별절기가 주축이 되어서 교회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이 그것입니다.
1998년을 보내고 1999년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연말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1999년은 새로운 천년을 기다리는 징검다리 해라고 말합니다. 오는 2001년은 역사적인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벌써 올해도 다 지나보내고 어느덧 12월이 되었습니다. 이 때가 되면 한 해를 보내며 크리스마스다, 연말 연시라 하여 들뜬 분위기를 타고, 진지한 자기 반성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 지나가고 또 다시 정신없는 중에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조명하고, 삶의 가닥을 잡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종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적인 종말론은 낙관론과 비관론을 넘어 죄와 사망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사적 희망론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좌절과 포기는 금물입니다. 끈질긴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역사를 개척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심히 연약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강하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길이 우리와 다르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는 것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보람있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볼 때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아름다울 것이며, 지난날이 보람있었던 것처럼 미래는 더 알차고 의미 있는 날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로서 나타난 십자가의 도리를 깊이 명상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탄절 12월 25일을 우리 주님의 탄생일로 지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 축제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라고 합니다. 기독교회가 시작된 후 300년 동안에는 지금과 같은 성탄절 축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교회와 성도들이 사모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육신하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로마 정부로부터 고인을 받고 믿어도 좋은 종교로, 나중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될 때보니, 그들의 신앙을 교리로 정립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신 분이시냐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공인을 받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도 성육신의 교리의 심오한 진리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소아시아 지방, 그리스 등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교회는 성탄절을 기쁨과 경이로써 축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서방 교회에서는 12. 25일을 동방교회에서는 1. 6일을 주의 탄생일로 지켜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날이 12. 25일이기 때문에 12. 25일을 성탄절을 주님의 나심을 생각하면서 그 날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좋은 것입니다. 12. 25이 '아니다, 맞다' 하면서 날짜에 연연하게 기분 나쁘게 여기거나 다른 날을 지키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 은 전세계 교인들의 정착된 문화가 되었기에 거기에 걸 맞는 의미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성탄절은 먹고 마시고 떠들라는 날이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신 구주가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주 예수님이 베들레헴 낮고 천한 마구간으로 오신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었고, 천국천사가 기뻐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날입니다. 그리고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목사들이 찾아와 경배하였고, 멀리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축하하신 날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주인공이시지, 사람은 잠시 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처럼 성탄절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 예루살렘에는 많은 바리새인, 율법학자들,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는 능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지식에 불과하였고, 산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의 많은 시민들은 아기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구려워 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려면 또 다시 피에 피를 부르는 혁명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대 땅 베들레헴에 이스라엘의 왕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한 사람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편히 나실 수 있는 여관하나 드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보호자가 되는 요셉을 마구간으로 내 몰았습니다. 우리도 인색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향락의 성탄절로 보내고 있습니다. 악한 사단 마귀가 믿는 성도들을 타락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고 세상으로 유혹하는 시절이 바로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그리고 베들레헴의 목자처럼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물을 드리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나심을 널리 증거하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박사들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역사적인 현장인 인류의 구세주가 나시는 그 자리에 찾아가 보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머나먼 팔레스타인까지 경배하러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물을 준비하여 구세주의 사명에 가장 적합한 선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의 말에 순종하여 올 때의 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하여 고국에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시간을 내어야 하고, 우리도 물질을 준비하고, 직접 찾아가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찾아가서 크리스마스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당시에 바울이 1년 6개월 간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로 유럽의 관문인 그리스의 남부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다가 그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남쪽 아가야 지방으로 내려와 오직 십자가의 도리만 증거하겠다고 다짐하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동원하여 말씀을 증거할 때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에배소에 왔을 때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리는 소식은 고린도 교회는 분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 고린도 전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교리서신이면서도 속죄의 체험에서 흘러나오는 성령 안에서의 생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서 고린도 전서는 실제적인 책입니다. 교리를 다루면서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만 가르치는 임기웅변식의 처방이 아니라 오고 오는 시대를 관통하는 신앙생활의 원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사의 말씀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형제라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1:10 이하에서 교회 안에 고질적이고 암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는 분파 작용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10절에서 원칙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사도 권위와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가지고 분명한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가지며 하나되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에 속하였다, 아볼로에게, 베드로 즉 게바에게,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대략 4개의 분파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에게 속한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기 때문에 자연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부임한 교역자입니다.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언변에 능하였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이 파는 수사도인 베드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모여진 사람으로 그동안 다른데서 베드로의 지도를 받았던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이들은 다른 당파에 초연하는 이들로 교회 안에 파벌은 무슨 파벌이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다보니 또 하나의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어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나는 그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적게 세례를 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알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교회 주의자들처럼 세례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최후의 명령에도 분명히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라든지 세례라든지 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힘써 감당해야 하는 일은 복음전파에 있지, 어떤 제도나 조직에 충실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신학자 C. S. 송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한 번 비교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연꽃은 물위에 떠 있으면서 물결에 따라서 꺾이지 않고 상함이 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자신을 순응하면서 적응시키되, 결코 거역하거나 충돌이 없습니다. 매우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십자가는 땅위에 서 있습니다. 반석 위에 서 있으면서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나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연꽃처럼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어떤 환경에 휩싸여서 따라가거나 변질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거기에 적응하고 순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하게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흔들림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 나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십자가라고 하면 실패와 희생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언뜻 보기에 십자가란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반드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는 희생 이후에 반드시 축복이 뒤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마는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한 사건을 종결지으면서 사도 바울은 만세에 길이 남을 귀한 교훈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원의 도리, 구원의 진리를 십자가에서 이루었기에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좀더 고상하고 어렵고, 무언가 더욱 심오한 진리가 들어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좀더 철학적이고, 사변적이고, 힘들게 깨달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기에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도리는 너무 쉽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우리 구원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인간적인 힘이요, 마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것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힘 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란 예수님 이전에는 로마사람들이 죄인을 처형하던 사형도구였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못 박혀 죽는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요, 또 부끄러운 치욕의 상징이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하는 이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성경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비웃으시고 이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명은 언젠가 그 종국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쌓은 바벨탑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중단되었고, 인간을 흩어놓고 마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은 인간의 지혜보다 우월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참이고 세상의 지혜는 거짓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가 너무 단순하고 어리석다고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지혜를 다 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들의 작은 지혜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큰 지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대의 동양 사상에서도 대현(大賢)은 대우(大愚)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어 보이는 지혜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지혜였습니다.
여기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할 때 "전도"라는 말은 유명한 케뤼그마라고 하였습니다. 케뤼그마라는 말은 복음 전파를 말하지만, 전파하는 행동보다는 그 내용을 가리키고 있으며 십자가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정신문화를 구별해볼 수 있습니다. 세계 문화사는 유대인들의 헤브라이즘과 그리스인들의 헬레니즘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영적이고, 내세지향적이으로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헬레니즘은 육적이고, 이 세상적으로 과학문명을 발전 시켰습니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람들이었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지적인 욕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면 처음부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면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지, 어찌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냐고 말합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엄청난 사건, 큰 표적이 나타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런 메시아가 될만한 표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아주 귀를 즐겁게 하는 지식이 있어야 들을만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도리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자요, 패배자로 보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뛰어 내릴 정도의 쇼킹한 사건을 연출하였으면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지혜가 없고, 웅변도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똑똑한 지혜로 구원하려고 아니하셨습니다.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미련한 것, 여호와 하나님의 약한 것이라도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리로 구원받는 것은 표적 중에도 표적이며, 십자가의 진리는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셨고, 우리를 치료하셨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6:14절 말씀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하신 것처럼 십자가만 자랑하고 나가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그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학의 주제로 삼은 신학자가 있는데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받지 못하며 또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만이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그 당시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은 '거슬리는 것',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고자 하며, 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신학이 되고자 한다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돌아와야 하며, 그리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자유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고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에게 들어서 어려우면 사실 미련한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하시고 용서하셨다고 믿는 이들은 모두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신 참된 지혜요,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는 지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고 화해하시는 능력, 치료하시는 능력, 승리하시는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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