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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불의를 고발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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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란 단순히 미래를 먼저 내다보고 그 미래를 먼저 알고 그리고 먼저 예고하는 자만이 아닙니다. 예언자란 오히려 오늘의 역사의 현실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냉철히 파악하고 있는 자입니다. 인류역사의 과정 속에 쌓여 가는 고통을 몸에 체득하고 그 고통을 소리 높이 외치는 자가 예언자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가 무섭고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새로운 사태를 유발시킵니다. 바로 이런 힘이 예언자 속에 언젠가는 사태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한다는 확신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런 확신을 통해서 예언자는 다가오는 자유의 가능성을 얻습니다. 이미 예언자는 그의 비전 속에서 자유를 봅니다. 자유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이 그에게 환히 보입니다. 곧 나타날 것처럼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언이 선포되고 예언자가 탄생됩니다. 예언자는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통을 심판하면서 그 고통을 만드는 자에게 준엄한 경고를 내립니다. 한마디로 예언자란 자기 시대의 부정적인 현상을 올바로 보고 거기서부터 그 부정적인 것을 극복시키는 적극적인 것을 비전으로 보면서 그것을 미리 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말세의 예언자”라고 알려줍니다. “때가 찼다. 곧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역사에 등장한다” 라고 선언하면서 인간의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분명히 예언자였습니다. 사람들 속에 쌓여진 고통이 이젠 한계점에 도달하여 무엇인가 변화되지 않으면 질식할 수밖에 없다는 비전을 예수님은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언자 예수님의 첫 성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선언의 뜻이 이해됩니다. 그 첫 성은 다른 말로 “고통의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제까지의 상태에서, 이제까지의 길에서 떠나라. 아니면 너희들의 삶은 끝장이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으면 멸망밖에 없다는 예언의 선포입니다. 이제까지의 삶이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며 머지 않아 산산 조각날 삶인데 이제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라. 회개하라. 180도 돌아서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 오라.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닥쳐올 것이다’ 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예언자 직전에 요한이라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선언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곧 닥쳐올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과 자비의 예언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구원과 해방과 자유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란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이 성전은 예수 탄생 20여 년 전부터 재건을 시작해서 예수 탄생 수 년 전에야 예배드릴 수 있도록 공사가 진척이 됐었다고 합니다. 이 성전의 재건이 완공된 것은 예수님 승천 후 30여 년이 넘은 주 후 64년이었고 완공되어 6년째인 주 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괴멸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한창 재건축 중에 있는 성전을 제자들과 함께 마주 대해 보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에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저 성전의 쌓여 가는 돌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집니까” 이러한 질문에는 성전에 대한 유대교적 기대와 열망이 깊숙하게 배어있었습니다. 이 성전이 완공되면 어떤 새로운 변화와 축복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저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나중에 이 말이 예수님을 재판하고 심문하는 유대인들의 고소 중 제일 중요한 죄목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큰 실망을 던져주었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후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라고까지 말씀하심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의 마음을 더욱 분노케 했습니다.
예수님이 본 미래는 유대인들이 본 미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 아름다운 돌로 이룩되는 성전의 완공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율법의 완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가 예언한 비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시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고통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빨리 떠나서 초월의 세계에로의 탈출을 암시한 것인가요 고통스러운 세상을 등지고 영원한 저 나라 천국으로 직행하라고 명하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누누히 강조된 “샬롬” 즉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자들에게 전해지는 복된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칼이 보습이 되고 창이 낫으로 바뀌어집니다. 거기서는 늑대와 어린양과 사자가 함께 먹고 함께 거하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는 세계,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기쁨을 함께 누리며 사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예언자 예수님의 행동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평화의 나라가 구체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곧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대충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르쳐준 주기도문 속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집니다. 형제들의 잘못이 용서되는 곳입니다. 또한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 주어집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동체입니까
이 세상이 추악하고 살맛 안 나는 나라가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지 못하고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약한 자들이 짓밟히고 힘없는 자들이 착취당하고 조그만 잘못도 용서받지 못하며 심지어 생명의 줄인 하루의 끼니를 위한 양식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그토록 기다렸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주기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거짓된 인간 사회의 마스크가 제거됩니다. 이제까지 가려졌던 추악한 모습이 들어 납니다. 그 때문에 역사를 자기 욕심대로 지배하던 세력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두려워합니다. 거짓된 자들이 저지른 불의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눌렸던 백성들이 그 거짓된 자들의 정체가 들어 날 때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은 자기네들의 가면을 벗기려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인간 고통의 한가운데 버티고있는 권력의 핵을 향하여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불의한 통치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했던 것입니다. 어진 백성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통치를 거부하고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로 다스려서지고 자유하고 충만된 삶을 살도록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런 자세에서 예수님의 예언자적 메시아의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의심하면서 제자 둘을 보내면서 확인작업을 하는 장면이 오늘의 신약의 본문에 나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저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줘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떠난 후에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실망하면서 말씀했습니다: ”광야에는 왜 나갔느냐 바람에 날리는 갈대같이 흔들리는 불쌍한 인생이구나! 너희들이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옳다. 내가 예언자다“ 라고 말씀함에서 스스로 예언자로서의 메시아의 성격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비전은 오늘의 역사 한가운데에서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불의가 종식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예언했습니다. 지금 당장 병자들이 일어나고 배고픈 자들이 배불리 먹고 철 장에 억울하게 갇힌 자들이 해방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외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의 대가를 저 죽은 후의 나라에서 보상받으라는 식의 메시지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영생의 진리를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감에서 얻은 죽음이 저 나라에서 부활로 바뀌어진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으니 땅위의 불의와 부자유를 눈감아주면서 살라는 말씀은 절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설교만 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처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세력의 불의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오래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선포는 한갓 이상적인 환상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끝까지 따르던 일군의 사람들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에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 즉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살고 계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체험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는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예언자의 사명을 다 하셨습니다. 그를 따르던 일군의 제자들도 차차 저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 저들의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찼고 기쁨으로 가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마음은 더 이상 세상의 권력자들이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젠 담대합니다. 이젠 당당합니다. 총칼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들은 지금 땅위에서 평화를 맛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토록 저들이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맛봄으로서 저들도 대예언자 예수님을 따라서 작은 예언자들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심어주는 불의한 정부, 불의한 세력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불의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서 불의를 저지르는 권력에 항거하고 저항하는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간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선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언의 소리를 쉬지 않고 외쳐오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일제하에서 민족운동,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중, 배민수목사님과 김구선생님의 자서전과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 두 분도 예언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불의한 일제와 맞서서 싸워나가신 것을 감동있게 읽었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세력인 일제를 향하여 정의를 외치면서 이 삼천리 금수강산이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어 평화롭게 온 백성들이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분들입니다. 이들은 대 예언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예언자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외칠 수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이 악마에 의하여 뒤덮이더라도 교회는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예언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합니다. 그렇게 함에서 이 세상에 평화를 심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바꿔가야 합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 예언자 예수님이 오시고 있습니다. 이 땅의 불의를 고발하시려고 오십니다. 그 예언자를 맞음에서 예언자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예언자 예수님을 우리 민족 속에 모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장에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 평화와 자유,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일에 공헌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민중들이 억울하게 당하지 않고 평안히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예언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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