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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기다림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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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질상 혼자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 기다림이 막연한 기다림일지라도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카뮈는 그의 비망록에서"기다림으로 지새는 이 생활, 나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잠자기를 기다린다. 막연히 희망을 안고 깨어날 때를 생각해본다.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모르겠다. 아침잠에서 깨어나며 또 점심식사를 기다린다. "라는 말로 기다림의 무료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글에서 인간의 삶의 특징을 기다림으로 정의한 것처럼 인간은 기다림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를 기다리고 성장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을 기다리며 삽니다. 이렇듯 기다림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정서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속에는 갖가지의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 본 적이 있습니까 기다릴 때 그 때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황지우라는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기다림의 심정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 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처럼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입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리도 모두 기다리는 임의 소리가 되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어떤 아름다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기다림을 고통스럽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하였는가 봅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또 그리워한다는 것은 또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가만히 보면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내일을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리고 천국을 기다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희망을 키워 가기도 하고, 그 기다림 속에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기다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다림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삭막하고, 얼마나 허전하고,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그러한 기다림이 때로는 간장을 태우듯 온 몸을 녹아 내리게 하고, 뜬눈으로 밤을 설치게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래도 기다리며 기대하며 산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편으로 기다림이란 신앙적으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영성입니다. 사실 기다림도 평안 할 때는 그것이 낭만이 될 수도 있고 견딜만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의 기다림, 절망 가운데서의 기다림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급합니다. 내 마음이, 내 상황이 용납지를 않아요. 하지만 신앙인 이란 기쁨 속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고난 중에서 더 더욱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기다림의 역사였습니다. 저들은 수 없는 침략을 당하면서 그리고 생활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오로지 예언자들의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저들이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 생각한 것은 진정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의 죄 값으로 오늘의 고통이 우리들에게 임하였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슬픔과 좌절 속에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낙담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기다림 속에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해 줌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였습니다. 신앙인 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기다림으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러한 기다림이 헛된 소망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이란, 막연한 허공을 쳐다보는 그러한 기다림이 아니라 분명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기다림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시대입니다. 소망도 없어진다고들 애석해합니다. IMF라는 말이 우리들의 마음을 삭막하게 하더니 이제는 도덕도 윤리도 무참히 깨어져가고 있습니다. 시대의 애국자들은 나라가 어디로 가느냐고 한탄합니다. 이 때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합니까 어디에다가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까
오늘 본문도 먹장구름 속에 휩싸여 도무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한줄기 빛을 붙잡고 희망을 노래하는 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적국의 손에 초토화되고 조국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적군의 손에 붙잡혀 갔으며 동포들은 모두 바벨론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을 보아도 절망, 뒤를 보아도 절망, 좌우 옆을 보아도 절망, 어디를 보아도 연달아 절망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도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18절에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소망은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진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레미야의 신앙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절망했지만 아직 그의 기다림은 있었습니다. 본문3:19-21은 그의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고백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
그는 깊은 기도를 통해 희망의 줄을 붙잡았습니다. 그 희망의 줄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노래인데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선입견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신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신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
현대는 속도전입니다. 모든 것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합니다. 노래를 불러도 빠르게 부르고 운전을 해도 빠르게 합니다.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기다림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초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기다림 속에서 때때로 지쳐버리게 합니다. 사실 어떤 경우의 실패이든, 실패한 현실 속에서 다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기다림으로서 사랑을 되찾으라는 말은 정녕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거나, 건강에 실패했거나, 경쟁에서 낙오되었거나, 입학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기다리라는 말은 하나의 고초요, 재난이요, 쑥과 담즙을 마시듯 쓴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를 방황하며 술취함 속에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신앙이 없이 단순한 기다림으로 버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 사람입니다.
실패의 자리를 벗어 날 수 있는,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그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기다림입니다. 이것을 동적(動的)기다림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앉아서 당하는 정적(靜的)인 인내를 택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요구되는 인내는 동적(動的)인 인내 즉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아픔을 절망하고 앉아서 통곡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내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앉아서 기다리는 포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처럼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성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이 바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그러나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함께 한 무리들과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 이 사나이가 바로 누구인줄 아십니까 그가 바로 유명한 탐험가 콜롬부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5세기말에 유럽남부는 두 차례에 걸친 커다란 지진을 겪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시킨 사람이 바로 콜롬부스였습니다. 바로 이런 그는 마침내 그 광활하고 위대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절망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과 좌절을 거부하고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희망의 세계를 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그 희망의 세계, 희망의 고지 위로 올라갑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좌절합니까
그것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얼마든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팔자와 운명을 비관하며 좌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외모, 생김새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모, 집안환경, 태어난 고장 때문에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절망만 하고 살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을 기다리며 사십니까 기다림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기다림의 동기를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의미한 것들, 썩어 없어 질 것들, 그것들은 진정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절망 가운데서 건질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기다림의 동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꿈과 환상을 근거로 막연하게 앞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기다림의 동기는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질고와 아픔을 아시고 친히 대신 짊어지신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심을 대망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고, 때로는 절망도 있는 부족한 우리 인생의 중심에 언제나 그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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