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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약속된 메시야

본문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요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비추는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빛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빛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탄의 절기를 보내며 교회 월력으로 대강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왜 오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엿세째 되는 날에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최고의 정성을 쏟아서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좋으셔서 “내가 보기에 심히 좋더라!”라고 감탄사를 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기에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사람을 거기에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가 바로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거기는 생존 때문에 아귀다툼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생로병사의 문제도 거기에는 없었습니다. 전쟁도 기근도 고통도 눈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복을 허락하시고 거룩한 통치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계약을 지킬 때에 이 에덴 동산에서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계약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최초의 행위 계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께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계약은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 계약을 여호와 하나님께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어긴 것입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셨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 땅엔 동족 상잔의 살인과 미음과 시기가 시작되었고, 불안과 공포가 시작되었고, 유리하고 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 했으며, 남을 죽이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서로 빼앗기고 뺏는! 울고 웃는! 죽이고 죽는 악순환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여인은 해산하는 고통이 있어야 할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며, 땅은 저주를 받아 엉겅퀴를 내고, 채소를 먹으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는 노동을 해야 했으며, 수고하고 애쓰나 만족함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셨으니 결국 남는 것은 한 줌의 흙일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범죄한 인생들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증표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죄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혔습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가 지었는데 죽기는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니라. ”(창3:21)라고 하셨습니다. 이 속에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꽃을 피우기 위한 한 알의 씨를 뿌린 것을 봅니다. 우리는 창세기라는 밭에서 구원의 씨앗을 우리는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3:15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니라. ”(창3:21)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창22:18)라고 하신 말씀들이 그 말씀입니다. 창49:10에 보면 “홀이 유다의 자손을 떠나지 아니하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 ”라고 하신 말씀도 구원의 씨였습니다.
그러나 이 씨앗은 생긴 형태가 너무나 적어서 어둠에 사는 죄인들이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이 구원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발전 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점진적인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라고 하는 밭으로 가면 좀더 확실하게 보입니다. 마치 구원의 씨앗이 싹이 나서 꽃이 피려고 봉오리 진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만 사7:14에 보면 그 메시아가 어떻게 오실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하셨으니 귀에 익은 말씀이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계약을 깨뜨린 인생들에게 또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시는 구세주는 처녀의 몸에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시기 정확하게 750여년 전 뒤에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라고 하는 정결한 처녀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53:1-9입니다.
1절에 보니 예수님은 그 모습이 초라했답니다. 연한 순과 같고 마른땅에서 나은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53:2) 수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53:3) 사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런 괴롬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인데 사람들은 그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수군거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53:4)
예수님은 오셔서 양손에 못을 받으시고, 양발에 쇠못을 받으시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찔리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그렇게 곤욕을 치르고 아픔을 당하셨으나 입을 열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53:7)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 가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에게 끌려 가 심문을 받으시고, 또 헤롯에게 끌려 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무도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심문 받으시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도 모인 군중들에게 “바로 너희들의 죄 때문인 것을 알아 달라”고 말 한마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이사야는 말하기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말씀이 없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게 주님은 강포를 행치 아니하시고, 궤사도 없으셨습니다. (사53:7-9) 이 예언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는 미가서라고 하는 밭으로 가 보십시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장소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미5:2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니라.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말구유가 있는 곳은 수많은 순례객들이 그곳을 방문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 예수님이 나신 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폭이 80cm, 높이가 120cm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문입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구부려야 하고 머리를 숙여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원래는 성문과 같이 넒은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신앙이 없는 장군들이나 권력가들이 말을 탄 채로 당당한 자세로 교회에 들어가는 일들이 많았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높이와 넓이를 낮추고 작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제도, 개선 장군도,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해 주셨고, 그대로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황제 아구수도의 호적령에 따라 요셉의 고향 땅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기 위해서 만삭의 몸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진통은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몸을 풀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여관은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겨우 얻은 곳이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이고 누울 곳이 없어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뉘었다고 하였습니다.
말구유! 이것은 짐승의 밥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누우셨습니다. 요6:53-55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은 인류의 밥으로 말구유에 누우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사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메시아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첫째로 그 어께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28:18에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요일3:8),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강퍅한 나의 마음을 통치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이십니다.
기묘자(wonderful)라는 말씀은 놀라운 분! 이적을 행하시는 신비로우신 분이시라는 말씀이요, 모사(counseller)라는 말은 지혜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사28:29에 보면 “...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시도다. ”라고 했으니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워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우리의 각 사정을 살피사 들으시고 상담해 주시는 상담자가 되십니다.
이 세상에 나를 가정 잘 아는 분은 우리 부모님도 아니요, 그렇다고 본인 자신도 아니요, 우리의 모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37:5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된 메시아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영존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힘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고, 영존 하시는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빌2:6에 이르시기를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 하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 ”이시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 무궁하면서 진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영혼의 아버지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안되면 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줄 수 없는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시는 영존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롬8:32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약속하신 메시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평화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실 때에 선포하신 말씀이 평화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엡2:14에 “...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평안을 전하시... ”었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하시는 말씀도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을 받은 이 축복을 신령한 축복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에 제일 귀하고 큰복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복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는 노래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3-6)하면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셨습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나신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약속된 대로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동정녀에게서 나실 것과 그것도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과 십자가에 사역과 그 이유에 대해서 정확하게 성경은 예언하셨고 예언하신 대로 오신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영존 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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