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아름다운 기다림
본문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들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 서 있는 행렬 속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큰 기다림이 있습니다. 봄철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속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밤 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포부 속에도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기다림들 중에는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들이 있습니다. 갚을 길 없이 빚쟁이가 정해 놓은 그 날을 맞아야 하는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망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다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림들 중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다림들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날을 손꼽던 그 기다림은 설레임 그 자체입니다. 결혼 날을 잡아놓고 그 날을 준비하는 신랑신부이 기다림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전역할 날을 달력에 표시하며 학수고대하는 말년 병의 기다림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이런 기다림들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들입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25년을 기다려 이삭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약속을 믿고 광야 생활 40년을 기다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무려 모진 박해 속에서 약 15년을 기다린 후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려 성령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약속을 믿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그래서 저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교회사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예외 없기 기다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오고오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왔습니다.
교회는 이 기다림을 절기화했습니다. 이 기다림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확인하고, 온 교회가 더욱 철저하게 이 기다림에 매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 전까지 전 세계 모든 교회가 함께 지키게 됩니다. 그 옛날 메시야 강림을 기다리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이 믿음의 기다림은 다른 기다림과는 다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기다림은 일반 여느 기다림과는 다릅니다. 그 기다림 속에 주님의 축복이 담뿍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다림이 왜 아름다운 기다림일까요 어떤 면에서 이 기다림이 복일까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5절을 보면 “그 안에서”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신앙적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늘 주님이 계십니다. 늘 주님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 내가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주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삶이 활력 있게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 힘으로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한 할머니가 문병을 갔습니다. 벌써 몇 달째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는 친구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반갑게 맞으면서 이 할머니가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몇 달째 이 병실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어요. ” 친구 할머니가 펄쩍 뒤며 대꾸를 합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나처럼 홀로되고 나면 기다릴 사람조차 없어요. 마음이 텅 비어서 얼마나 쓸쓸한지 몰라요. 당신은 힘들어도 늘 남편 생각하며 살 수 있잖아요. 그 남편이 거뜬하게 일어날 날을 기다릴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 삶을 지탱시켜 줍니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힘겨운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합니다.
하물며 기다리는 대상이 주님일 때는 어떻겠습니까 그 기다림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 삶이 풍성해 집니다. 그 기다림이 놀라운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 40:31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영어 성경 KJV에 보면 “Wait upon th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주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 힘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저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개 짓하며 올라 가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힘차게 우리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최선을 다해 인생의 경주를 다 달릴 수 있게 됩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42. 195키로 그 먼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아무리 먼 길이라 할 지라도 달려갈 길을 다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5절에 “풍족함으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7절에 “부족함이 없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 삶을 살 때 주님 주시는 새 힘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표현대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곧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새 힘을 얻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희망을 갖게 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의 날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닌 그 날을 바라보며 비록 오늘은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지만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세계적인 임상심리학자인 브리즈니츠 박사는 인간의 희망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Monitor 4. 1984)
이스라엘 육군의 훈련병들을 4조로 나누어 완전군장을 하고 20km를 행군시켰답니다. 1조에는 행군할 때 도착거리를 미리 예고하고 5km마다 앞으로 얼마의 거리가 남았다고 알려주었고, 2조에는 “지금부터 먼 거리를 행군한다”고만 말했고, 3조에는 “15km를 행군한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를 행군한다”고 변경 통지를 하였고, 4조에는 “25km를 행군하겠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행군으로 오늘의 행군을 단축한다”고 발표했답니다. 이러한 실험에 의해 브리즈니츠 박사는 병사들이 상황에 따라 받는 사기와 스트레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20km라는 정확한 거리와 남은 지점을 알고 행군한 1조가 가장 사기가 높고 동시에 가장 적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행군거리를 전혀 모르고 간 2조가 가장 사기가 없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얼음 물에 손을 담그게 하고 얼마나 오래 견디는가를 테스트해 보는 실험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남은 시간을 계속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알게 된 사람이 훨씬 더 오래 견뎠다는 것입니다.
브리즈니츠 박사는 이런 실험 결과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어려움이나 편안함보다는 희망과 절망이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인간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려울 때가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이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때 주께서 늘 우리 곁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는 창대할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있다”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 ”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희망 속에서 우리는 힘겨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희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읍니다. 앉아있기도 힘겨워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눈에는 수건을 싸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비파 하나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파의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계속 그 비파를 타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지쳐있습니다. 줄도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포기할만도 한데 계속 비파를 타고 있습니다. 왓츠는 이 그림의 제목을 “희망”이라 붙였습니다. 그 남은 한 줄이 바로 희망의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해도 아직도 희망의 줄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의 줄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 희망의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또 다른 복입니다.
성숙해 갑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님과 교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든든히 서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그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그 삶이 더욱 온전해 져서 점점 성숙해 져 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4:43-44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역사가 깊은 교회 뜰에는 대체로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묘지에는 저마다 다른 글귀가 써있습니다. 한 묘의 비석에 이렇게 써 있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보는 사람이 당황해서 웃습니다. 다음 줄이 이어집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웃음이 가시고 긴장하게 될 때 다음 줄이 또 이어집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며 삽니다. 죽을 때를 생각하며 준비하며 삽니다. 더욱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삽니다.
그러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롬 13:11-14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한 마디로 말하면 나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을 앞 둔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고 준비하듯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설 텐데 그 때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 삶에 남아있는 어둠의 모습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하고 반대로 우리 삶 속에 빛의 모습들을 하나씩 둘씩 쌓아가야 합니다. 이 음난하고 방탕한 세상 풍조 속에 찌들려 있던 모습들,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모습, 욕심에 이끌려 이기적으로 살았던 모습... 이런 것들을 하나씩 둘씩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경건한 모습, 서로 사랑하는 모습,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하나씩 둘씩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2:1에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즉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몸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거룩한 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운동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 열심히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우리 자신을 경건하고 성결하게 가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숙해져 가게 됩니다. 이 또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새 힘을 얻으시고, 희망을 갖게 되시고, 그리고 더욱 성숙해 가시는 복된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큰 기다림이 있습니다. 봄철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속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밤 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포부 속에도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기다림들 중에는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들이 있습니다. 갚을 길 없이 빚쟁이가 정해 놓은 그 날을 맞아야 하는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망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다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림들 중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다림들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날을 손꼽던 그 기다림은 설레임 그 자체입니다. 결혼 날을 잡아놓고 그 날을 준비하는 신랑신부이 기다림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전역할 날을 달력에 표시하며 학수고대하는 말년 병의 기다림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이런 기다림들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들입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25년을 기다려 이삭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약속을 믿고 광야 생활 40년을 기다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무려 모진 박해 속에서 약 15년을 기다린 후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려 성령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약속을 믿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그래서 저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교회사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예외 없기 기다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오고오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왔습니다.
교회는 이 기다림을 절기화했습니다. 이 기다림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확인하고, 온 교회가 더욱 철저하게 이 기다림에 매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 전까지 전 세계 모든 교회가 함께 지키게 됩니다. 그 옛날 메시야 강림을 기다리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이 믿음의 기다림은 다른 기다림과는 다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기다림은 일반 여느 기다림과는 다릅니다. 그 기다림 속에 주님의 축복이 담뿍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다림이 왜 아름다운 기다림일까요 어떤 면에서 이 기다림이 복일까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5절을 보면 “그 안에서”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신앙적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늘 주님이 계십니다. 늘 주님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 내가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주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삶이 활력 있게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 힘으로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한 할머니가 문병을 갔습니다. 벌써 몇 달째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는 친구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반갑게 맞으면서 이 할머니가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몇 달째 이 병실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어요. ” 친구 할머니가 펄쩍 뒤며 대꾸를 합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나처럼 홀로되고 나면 기다릴 사람조차 없어요. 마음이 텅 비어서 얼마나 쓸쓸한지 몰라요. 당신은 힘들어도 늘 남편 생각하며 살 수 있잖아요. 그 남편이 거뜬하게 일어날 날을 기다릴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 삶을 지탱시켜 줍니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힘겨운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합니다.
하물며 기다리는 대상이 주님일 때는 어떻겠습니까 그 기다림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 삶이 풍성해 집니다. 그 기다림이 놀라운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 40:31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영어 성경 KJV에 보면 “Wait upon th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주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 힘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저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개 짓하며 올라 가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힘차게 우리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최선을 다해 인생의 경주를 다 달릴 수 있게 됩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42. 195키로 그 먼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아무리 먼 길이라 할 지라도 달려갈 길을 다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5절에 “풍족함으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7절에 “부족함이 없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 삶을 살 때 주님 주시는 새 힘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표현대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곧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새 힘을 얻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희망을 갖게 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의 날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닌 그 날을 바라보며 비록 오늘은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지만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세계적인 임상심리학자인 브리즈니츠 박사는 인간의 희망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Monitor 4. 1984)
이스라엘 육군의 훈련병들을 4조로 나누어 완전군장을 하고 20km를 행군시켰답니다. 1조에는 행군할 때 도착거리를 미리 예고하고 5km마다 앞으로 얼마의 거리가 남았다고 알려주었고, 2조에는 “지금부터 먼 거리를 행군한다”고만 말했고, 3조에는 “15km를 행군한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를 행군한다”고 변경 통지를 하였고, 4조에는 “25km를 행군하겠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행군으로 오늘의 행군을 단축한다”고 발표했답니다. 이러한 실험에 의해 브리즈니츠 박사는 병사들이 상황에 따라 받는 사기와 스트레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20km라는 정확한 거리와 남은 지점을 알고 행군한 1조가 가장 사기가 높고 동시에 가장 적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행군거리를 전혀 모르고 간 2조가 가장 사기가 없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얼음 물에 손을 담그게 하고 얼마나 오래 견디는가를 테스트해 보는 실험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남은 시간을 계속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알게 된 사람이 훨씬 더 오래 견뎠다는 것입니다.
브리즈니츠 박사는 이런 실험 결과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어려움이나 편안함보다는 희망과 절망이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인간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려울 때가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이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때 주께서 늘 우리 곁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는 창대할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있다”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 ”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희망 속에서 우리는 힘겨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희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읍니다. 앉아있기도 힘겨워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눈에는 수건을 싸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비파 하나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파의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계속 그 비파를 타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지쳐있습니다. 줄도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포기할만도 한데 계속 비파를 타고 있습니다. 왓츠는 이 그림의 제목을 “희망”이라 붙였습니다. 그 남은 한 줄이 바로 희망의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해도 아직도 희망의 줄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의 줄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 희망의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또 다른 복입니다.
성숙해 갑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님과 교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든든히 서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그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그 삶이 더욱 온전해 져서 점점 성숙해 져 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4:43-44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역사가 깊은 교회 뜰에는 대체로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묘지에는 저마다 다른 글귀가 써있습니다. 한 묘의 비석에 이렇게 써 있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보는 사람이 당황해서 웃습니다. 다음 줄이 이어집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웃음이 가시고 긴장하게 될 때 다음 줄이 또 이어집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며 삽니다. 죽을 때를 생각하며 준비하며 삽니다. 더욱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삽니다.
그러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롬 13:11-14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한 마디로 말하면 나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을 앞 둔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고 준비하듯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설 텐데 그 때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 삶에 남아있는 어둠의 모습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하고 반대로 우리 삶 속에 빛의 모습들을 하나씩 둘씩 쌓아가야 합니다. 이 음난하고 방탕한 세상 풍조 속에 찌들려 있던 모습들,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모습, 욕심에 이끌려 이기적으로 살았던 모습... 이런 것들을 하나씩 둘씩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경건한 모습, 서로 사랑하는 모습,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하나씩 둘씩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2:1에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즉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몸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거룩한 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운동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 열심히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우리 자신을 경건하고 성결하게 가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숙해져 가게 됩니다. 이 또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새 힘을 얻으시고, 희망을 갖게 되시고, 그리고 더욱 성숙해 가시는 복된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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