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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희망을 찾는 사람들

본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흥분됩니다.
지금은 휴대폰이 등장해서 기다림의 긴장감과 초조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휴대폰이 나오기 이전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긴 기다림 끝에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의 안도감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다림의 여정입니다.
그 기다림은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님(연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대림절입니다.
교회는 절기는 크게 대림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오순절)입니다.
대림절(Advent)은 대강절, 혹은 강림절 이라고도 합니다.
성탄절이 오기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절의 의미는 2000년 전,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능력으로 임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 기간동안 우리는 자신을 돌이켜 보며,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 기간을 “겨울철의 사순절(Winter Lent)” 이라고도 합니다.
대림절과 사순절의 색깔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슬픔과 참회, 소망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들뜬 분위기가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며, 자신을 내어 놓고,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오늘은 대림절의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희망 속에 산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 상황에서 억압받고 핍박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세례요한의 광야의 외침과 더불어 약속하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던 무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집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실망하기도 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이후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자신의 재산을 팔아 드리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유무상통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 이라는 책에서 초대교회 교인들의 희망을 ‘여호와 하나님 나라’로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고 기다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몰트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앞으로의 시간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펼쳐 가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 속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희망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결코 사람의 미래에게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2명의 후보가 각종 공약을 내걸고 표심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유토피아를 만들 것처럼 장밋빛 공약을 쏟아냅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백성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공약을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현실성이 없는 말 그대로 빌공(空)자 헛된 약속 일 뿐입니다.
더욱이 그런 공약을 이행할 만한 능력이 있어보이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적인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들이 공약한 대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나라,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고, 이 땅을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실 때만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요 설교자인 무디의 과거는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교회학교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도 제대로 찾지 못했고, 교회학교 생활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려고 찾은 성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교육이 미흡하고 학교생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도 놀림을 받았습니다.
“너처럼 희망이 없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네가 우리의 친구라는 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무디는 늘 고독했습니다.
그는 그 고독한 시간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겸손하게 늘 기도하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무디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를 들어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는 희망의 재료였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무디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미래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인생을 살았고, 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별처럼 빛나는 희망의 닻을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희망은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인류의 진정한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며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합니다.
그 위기는 바로 재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던 성도들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희망이 사라져버릴 위기가 발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위기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짓선지자들의 속임수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있다 하니”
여기서 기롱하는 자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당시에 성도들이 철저히 믿고 있던 주님의 재림을 비웃으며 논리적으로 공격하는 이단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우선 거짓말로 교인들을 공격했습니다.
재림의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고 속입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여전히 무덤 속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창조 이후 우주 만물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내용으로 교인들을 유혹합니다.
결국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말에 현혹되어 희망이 흔들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는 지금까지 잘못된 재림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다미 선교회 같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득세로 사회적인 문제까지 야기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주님이 재림한다는 거짓 주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지만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재림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베드로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무덤에 잠들어 있는지가 언젠데 무슨 재림이 이뤄지겠는가 라는 무관심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태도입니다.
종말은 우주적인 종말이 있고,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우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우주적 종말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종말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개인의 종말을 맞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하루하루를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결국 재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면 현실의 삶에 집착하게 됩니다.
현실의 삶에 집착하면 결국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둘째로, 당시의 성도들이 직면한 극심한 환난과 핍박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가운데 극심한 박해가 생겼습니다.
주후 64년경에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씌워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어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당시 각 지방 정부 당국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요동치는 사회의 혼란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운 채 극심한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두려운 마음에 배교를 했습니다.
아직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희망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큰 동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인생의 위기가 올 때 희망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올 때 영적으로 위기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한 청년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실직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면서 자기는 인생의 실패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소피아라는 이름의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원하셨던 그 일,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셔야 할 때입니다. ”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격려와 기도에 힘입어 열심히 작품을 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0년 간의 칩거 끝에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걸작,
주홍글씨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타니엘 호손의 이야기입니다.
실패, 즉 인생의 위기가 오히려 그의 인생에 새로운 축복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위기는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을 한 차원 더 높게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늘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극심한 환난과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시 90:4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이다. ”
주님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이 있다 없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벌써 2천년이 지난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표로 볼 때는 불과 이틀 밖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이 길이 참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딤전2:4절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연기되는 이유는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녹아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희망은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기다릴 때 주어집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날을 기다리던 기억이 납니다.
일주일 전부터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2, 3일 전부터 하루가 얼마나 긴지 정말 지루합니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기다림을 이겨냅니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지루함보다는 소풍날의 즐거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를 마음속으로 미리 즐기면서, 기다림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납니다.
따라서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희망은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난 월드컵을 통해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꿈은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만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꿈은 깨집니다. ”
꿈이 이루어지는지 깨지는지는 당사자가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된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준비되지 못한 자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준비한 처녀는 신랑이 오는 것이 축복이지만,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할까요
11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입니다.
요한 계시록 19:8절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자’ 인데, 그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거룩한 옷을 입고, 진리를 붙잡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의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이 바로 주님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자임을 보여주십니다.
또 한 가지는 경건(godliness)입니다.
경건은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약1:27에 경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참된 경건은 약자를 배려하고 돌보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를 희망으로 축복의 시간으로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갈 수 있도록 옳은 행실을 위해 애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는 등불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셋째, 바라보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펼치실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천국입니다.
고환암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자전거 경주에서 승리한 랜스 암스토롱은 말합니다.
그는 ‘자전거, 그 이상의 이야기’ 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1%의 희망만 주어져도 나는 그 희망을 위해 달린다. ”
단 1%의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향해 달리면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습니다.
그 1%의 희망은 생명을 위협하는 암도 정복하게 만듭니다.
그 1%의 희망은 죽음도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를 희망 가운데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원치 않는 순간에 다가오는 인생의 위기로 인해 우리의 희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인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등불을 다시 켜십시오.
소망의 주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준비하십시오.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삶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영광스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며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요 구원이시요 피난처가 되십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소망하며 준비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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