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창조적인 삶
본문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서 대림절 셋째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또 다시 다가오는 시간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돌이킴과 반성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오스카 쿨만이라는 신학자는 구속의 역사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역사의 시간, 다가오는 미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의 틀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일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풀기 어렵고, 답을 찾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일어나야 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삶의 모퉁이에서 그저 아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일이든, 가정의 일이든, 교회 일이든, 사회, 국가, 민족의 일이든 간에 ‘고난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계획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아울러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계획 속에는 죄로 일그러진 인간의 소유욕이 빚어낸 온갖 죄성과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에 대해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크리스챤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자연과 인간 모든 창조물이 창조적인 삶을 향해서 살도록 베풀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을 요청하시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메시야를 대망하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이며 역사입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카이로스’ 즉, 때, 시점, 시간, 정점이라고 합니다. 이는 깨지고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인간과 역사에 찾아오셔서 창조적인 삶에로의 전환을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가 없다면, 이 같은 창조적인 삶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지극히 허무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버려지고, 불합리한 현실의 무책임과 무질서 안에 방치된다면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대림절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악과 불의로 얼룩진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을 회복시키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과 신약의 복음서, 그리고 계시록과 바울서신은 역사 안에서, 세상 속에서, 시간 속에서 찾아오시는 메시야의 임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 땅에 오실 초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을 통해 보여주셨던 창조적인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의 주로 오셔서 온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창조적인 삶의 구현자로써 세상을 완성시키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대림절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구역연합예배 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아프리카에는 ‘스프링 북’이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 대여섯 마리가 떼를 지어 지내지만 수백 수천마리까지 떼를 지어 큰 집단을 이루고 사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 산양에게는 특이한 기질이 있습니다. 무리의 수가 적은 처음에는 천천히 조용히 풀을 뜯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옮겨갑니다. 평화스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점점 양들의 숫자가 불어나면 앞에 가던 양이 뒤따르는 양들의 풀을 다 먹어치우기 때문에 뒤 따라가는 양은 먹을 풀이 없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뒤 따라가던 양들은 풀을 얻기 위해 앞으로 밀어붙이고 앞에 있는 양들은 앞으로 밀려납니다. 이렇게 해서 대열은 혼란스럽게 되고 모든 양들이 속도를 내 달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로 욕심 없이 풀을 뜯어먹겠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목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처음의 목적을 잊은 채, 맹목적으로 달립니다. 자신이 뜯어 먹을 풀을 다른 산양이 다 먹어치웠다는 사실에 급기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에 있는 풀을 자기만 먹겠다고 더욱 속력을 내며 달립니다. 초원을 지나 시냇가를 건너, 사막을 넘고 마침내 바다에 이릅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행렬을 멈추지 못합니다. 막지를 못합니다. 급기야는 바다를 향해서도 계속 내달립니다. 결국 수많은 양떼가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달리기는 막을 내립니다.
인간의 세상살이가 마치 산양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맹목적으로 세상살이에 쫓고 쫓기다 보면 어느새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타자와의 경쟁에서 내 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존경쟁에 휘말려 갈수록 소유하려는 욕심, 소유하려는 욕망에 얽매어 맹목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신 뜻, 창조적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잊은 채,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비극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적있는 삶을 잃고 사는 인생은 결국 허망한 인생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살이에 치이고 얽히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대림절은 많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전환시키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나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는 창조적인 삶을 위해 존재하며 성도들은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의 말씀에서는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이 전환의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그리고 전환에 내한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가짐으로써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자신의 생을 전환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북부 이락 지방인 메소포타미아 평야 북쪽입니다. 그곳은 유프라데스 강이 흐르고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중동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그곳의 부요한 족장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75년을 살았습니다. 갈대아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철저하게 소유적인 삶이었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재산을 늘리고, 땅을 늘리고, 식구를 늘리고, 종들을 늘리고, 많은 것들은 누리며 풍성한 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흔한 말로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본문 12절 부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의 본토를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땅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삶의 전환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관계는 4가지 과정을 통해서 성숙됩니다. 하나는, 부르심의 단계 곧 소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극적인 삶의 전환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성도들은 서로가 각기 다른 환경과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관계는 응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세우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 하고 그 부름에 응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순과 위선을 던져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 분은 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배경을 묻지 않습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가리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응하는 자세만 보십니다.
세 번째, 믿음의 관계는 결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은 과거에 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은 청산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수용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곧 결단과 선택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네 번째, 믿음의 관계는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복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믿음의 관계를 가짐으로서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미련을 버리고 집착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변하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전환점이 없어 보입니까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벗어던져야 할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유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집착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기 때문에 거기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바뀌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바꿔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합리주의적 사고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성의 한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하지만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에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삶을 새로이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 믿음의 관계가 성숙되면 성숙될수록 우리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갔을 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공동번역창 12:2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기서 복을 끼쳐 주는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복의 근원은 단지 복을 받는다는 말과 다릅니다. 나에게만 복이 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은 샘터란 뜻입니다. 샘물을 계속해서 솟아나게 하여 뭇 사람들에게 마시게 만들어 줍니다. 뭇 사람들을 시원케 해주고, 갈증을 해소해 주며, 허기짐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내가 뭇 사람들에게 샘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뭇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평하며,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봉사하는 삶이요 창조적인 삶입니다.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현실에서의 전환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리아의 포로된 삶으로인한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고 더 이상 예언자의 선포가 없고 활동이 없었던 400여년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를 지나면서, 그리고 로마의 통치와 핍박의 현장에서 억압받고 지배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창조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환난 많은 세상에서 인간에게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와 내용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오심’ ‘메시야의 도래’는 모든 인간에게 대변혁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통치를 뒤엎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었습니다. 메시야의 통치는 칼이나 검이 아니라, 인간 권력의 힘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창조적인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마가복음 10:43-45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섬기는 자의 삶으로 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섬김을 통한 창조적인 삶은 당시 메시야 사상에 있어서 대변혁적인 사건입니다. 힘으로 군림했던 로마 제국 앞에서, 진정한 율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인 것을 저버린 채, 종교적인 권위와 힘으로 군림했던 유대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허구 앞에서 메시야의 섬기는 삶이야말로 준비되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이며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 병든 자를, 소외된 자를 찾아 보살펴 주는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섬긴다’라는 말은 강제적인 사역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낮아짐의 자리에 내려가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섬김의 자리는 교회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세상 영역을 포괄합니다.
대림절 신앙은 ‘죽어서 천국 간다’와 같이 세상과 단절하는 차원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숨쉬는 이 땅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삶의 자리에서, 교회 밖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데 더욱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존재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실적 삶과 단절되고 소외된 이들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삶 속에서 그들과 연결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끝으로 대림절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할 줄 아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대림절에는 기다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삶이 힘들고, 괴롭고, 치지고, 곤할지라도 다시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기다림은 인내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희랍의 에픽테뚜스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한 송이의 포도나 무화과가 갖고 싶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서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 개의 무화과를 거두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인내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메시지인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공동번역계 22:20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가겠다 하시거늘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그리고 창조적 삶의 표본으로서 21절을 선언함으로 성경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공동번역계 22:21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기를 원하는 것은 창조적인 삶의 근원입니다. 축복의 근원, 창조적인 삶의 근원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샘터입니다. 창조적인 삶으로 대림절을 더욱 의미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또 다시 다가오는 시간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돌이킴과 반성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오스카 쿨만이라는 신학자는 구속의 역사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역사의 시간, 다가오는 미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의 틀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일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풀기 어렵고, 답을 찾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일어나야 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삶의 모퉁이에서 그저 아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일이든, 가정의 일이든, 교회 일이든, 사회, 국가, 민족의 일이든 간에 ‘고난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계획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아울러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계획 속에는 죄로 일그러진 인간의 소유욕이 빚어낸 온갖 죄성과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에 대해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크리스챤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자연과 인간 모든 창조물이 창조적인 삶을 향해서 살도록 베풀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을 요청하시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메시야를 대망하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이며 역사입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카이로스’ 즉, 때, 시점, 시간, 정점이라고 합니다. 이는 깨지고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인간과 역사에 찾아오셔서 창조적인 삶에로의 전환을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가 없다면, 이 같은 창조적인 삶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지극히 허무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버려지고, 불합리한 현실의 무책임과 무질서 안에 방치된다면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대림절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악과 불의로 얼룩진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을 회복시키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과 신약의 복음서, 그리고 계시록과 바울서신은 역사 안에서, 세상 속에서, 시간 속에서 찾아오시는 메시야의 임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 땅에 오실 초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을 통해 보여주셨던 창조적인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의 주로 오셔서 온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창조적인 삶의 구현자로써 세상을 완성시키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대림절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구역연합예배 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아프리카에는 ‘스프링 북’이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 대여섯 마리가 떼를 지어 지내지만 수백 수천마리까지 떼를 지어 큰 집단을 이루고 사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 산양에게는 특이한 기질이 있습니다. 무리의 수가 적은 처음에는 천천히 조용히 풀을 뜯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옮겨갑니다. 평화스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점점 양들의 숫자가 불어나면 앞에 가던 양이 뒤따르는 양들의 풀을 다 먹어치우기 때문에 뒤 따라가는 양은 먹을 풀이 없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뒤 따라가던 양들은 풀을 얻기 위해 앞으로 밀어붙이고 앞에 있는 양들은 앞으로 밀려납니다. 이렇게 해서 대열은 혼란스럽게 되고 모든 양들이 속도를 내 달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로 욕심 없이 풀을 뜯어먹겠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목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처음의 목적을 잊은 채, 맹목적으로 달립니다. 자신이 뜯어 먹을 풀을 다른 산양이 다 먹어치웠다는 사실에 급기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에 있는 풀을 자기만 먹겠다고 더욱 속력을 내며 달립니다. 초원을 지나 시냇가를 건너, 사막을 넘고 마침내 바다에 이릅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행렬을 멈추지 못합니다. 막지를 못합니다. 급기야는 바다를 향해서도 계속 내달립니다. 결국 수많은 양떼가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달리기는 막을 내립니다.
인간의 세상살이가 마치 산양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맹목적으로 세상살이에 쫓고 쫓기다 보면 어느새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타자와의 경쟁에서 내 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존경쟁에 휘말려 갈수록 소유하려는 욕심, 소유하려는 욕망에 얽매어 맹목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신 뜻, 창조적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잊은 채,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비극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적있는 삶을 잃고 사는 인생은 결국 허망한 인생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살이에 치이고 얽히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대림절은 많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전환시키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나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는 창조적인 삶을 위해 존재하며 성도들은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의 말씀에서는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이 전환의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그리고 전환에 내한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가짐으로써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자신의 생을 전환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북부 이락 지방인 메소포타미아 평야 북쪽입니다. 그곳은 유프라데스 강이 흐르고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중동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그곳의 부요한 족장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75년을 살았습니다. 갈대아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철저하게 소유적인 삶이었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재산을 늘리고, 땅을 늘리고, 식구를 늘리고, 종들을 늘리고, 많은 것들은 누리며 풍성한 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흔한 말로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본문 12절 부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의 본토를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땅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삶의 전환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관계는 4가지 과정을 통해서 성숙됩니다. 하나는, 부르심의 단계 곧 소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극적인 삶의 전환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성도들은 서로가 각기 다른 환경과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관계는 응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세우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 하고 그 부름에 응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순과 위선을 던져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 분은 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배경을 묻지 않습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가리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응하는 자세만 보십니다.
세 번째, 믿음의 관계는 결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은 과거에 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은 청산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수용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곧 결단과 선택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네 번째, 믿음의 관계는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복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믿음의 관계를 가짐으로서 소유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미련을 버리고 집착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변하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전환점이 없어 보입니까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벗어던져야 할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유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집착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기 때문에 거기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바뀌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바꿔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합리주의적 사고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성의 한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하지만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에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삶을 새로이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 믿음의 관계가 성숙되면 성숙될수록 우리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갔을 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공동번역창 12:2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기서 복을 끼쳐 주는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복의 근원은 단지 복을 받는다는 말과 다릅니다. 나에게만 복이 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은 샘터란 뜻입니다. 샘물을 계속해서 솟아나게 하여 뭇 사람들에게 마시게 만들어 줍니다. 뭇 사람들을 시원케 해주고, 갈증을 해소해 주며, 허기짐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내가 뭇 사람들에게 샘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뭇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평하며,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봉사하는 삶이요 창조적인 삶입니다.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현실에서의 전환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리아의 포로된 삶으로인한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고 더 이상 예언자의 선포가 없고 활동이 없었던 400여년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를 지나면서, 그리고 로마의 통치와 핍박의 현장에서 억압받고 지배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창조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환난 많은 세상에서 인간에게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와 내용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오심’ ‘메시야의 도래’는 모든 인간에게 대변혁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통치를 뒤엎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었습니다. 메시야의 통치는 칼이나 검이 아니라, 인간 권력의 힘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창조적인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마가복음 10:43-45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섬기는 자의 삶으로 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섬김을 통한 창조적인 삶은 당시 메시야 사상에 있어서 대변혁적인 사건입니다. 힘으로 군림했던 로마 제국 앞에서, 진정한 율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인 것을 저버린 채, 종교적인 권위와 힘으로 군림했던 유대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허구 앞에서 메시야의 섬기는 삶이야말로 준비되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이며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 병든 자를, 소외된 자를 찾아 보살펴 주는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섬긴다’라는 말은 강제적인 사역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낮아짐의 자리에 내려가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섬김의 자리는 교회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세상 영역을 포괄합니다.
대림절 신앙은 ‘죽어서 천국 간다’와 같이 세상과 단절하는 차원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숨쉬는 이 땅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삶의 자리에서, 교회 밖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데 더욱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존재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실적 삶과 단절되고 소외된 이들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삶 속에서 그들과 연결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끝으로 대림절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할 줄 아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대림절에는 기다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삶이 힘들고, 괴롭고, 치지고, 곤할지라도 다시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기다림은 인내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희랍의 에픽테뚜스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한 송이의 포도나 무화과가 갖고 싶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서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 개의 무화과를 거두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인내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메시지인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공동번역계 22:20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가겠다 하시거늘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그리고 창조적 삶의 표본으로서 21절을 선언함으로 성경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공동번역계 22:21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기를 원하는 것은 창조적인 삶의 근원입니다. 축복의 근원, 창조적인 삶의 근원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샘터입니다. 창조적인 삶으로 대림절을 더욱 의미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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