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대림절]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라

본문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절기를 만든 교회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주님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심의 주현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로 마칩니다. 교회력은 계속 반복함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지난주부터 2009년도 교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성탄절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라는 대림절입니다.
대강절이라고도 하는 이 절기의 특징은 기다림에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선지자들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고, 그 예언으로 백성들은 속히 주님이 오시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왔을 때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맞이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주님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기만 했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를 왜 수많은 사람들이 맞이하지 못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이래 수많은 이단들이 출현했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이단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날짜를 공포하여 사람들을 혼미케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다미선교회가 1992년 9월 28일에 주님이 오신다고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기존의 수많은 성도들이 다미선교회에 빠져 영육간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존재하는 나라마다 재림의 날짜를 발표하는 이단이들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강단에서 재림에 대한 설교가 듣기 어렵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종말론의 재림을 강조하는 이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중요하게 살아가지만 목적은 주님오심을 갈망하는데 있습니다.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든, 죽어서 주님을 맞이하던 중요한 것은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주님을 만날 것인가, 아니면 심판의 주님으로 만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신랑을 기다라는 열 처녀 중에 지혜로운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자격으로 신랑을 기다렸지만,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의 환경은 극과 극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영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불행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종말에 있을 사건을 비유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
유대인들은 혼인 날짜가 정해지면 먼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후 다시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와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벌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로서 신부의 집에서 나오는 신랑 일행을 맞아 신랑 집에서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중입니다. 보통 신랑은 저녁에 나오지만 때로는 늦을 때도 있는데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부들의 들러리들은 저녁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만일 들러리를 선 처녀들 중에 등불을 들지 못한 사람은 불청객 취급을 받아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를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인 종교이기 전에 내세적인 종교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죽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언제가는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영광스러운 만남이 있는가하면, 멸망으로 부끄러운 만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등을 신앙의 형식이라면, 불은 신앙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그들이 다 구원받고,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교회 등록이나, 세례가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습니다. 모태신앙이나, 목사의 자녀라 해도 그것은 등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등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 혹은 믿음,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참된 신앙의 행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자와 같이 당장 편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도 내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여지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이 교회당이 신앙의 등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요. 신앙의 등뿐만 아니라 이곳에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어떤 직분을 받았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신앙의 타이틀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2. 신랑을 맞이하는 다섯 처녀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분하기를 등을 준비하고 기름을 예비해 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출발은 똑같았습니다. 등과 등에 불을 붙여서 초저녁부터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초저녁에 신랑이 오므로 열 처녀가 다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게 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들은 늦게 올 것을 대비하여 기름을 예비해 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곧 오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대로 주님은 곧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대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과 바람으로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면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사건도 홍수의 날짜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노아도 방주에 들어간 지 일주일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림의 때를 노아홍수처럼 임한다고 했습니다. (마 24:37-39) 아무도 알 수 없는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준비된 사람만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마 24:42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기름을 준비하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현실을 도피하고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마 24:45-46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섬긴다는 말은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중요합니다. 일반 성도들 역시 성도로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섬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도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자신을 녹아야 비로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을 태워합니다. 자기희생 없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희생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정권의 실세들 비리가 들춰집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의 어느 한곳에 크고 작은 비리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우리는 정직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의식할 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나 그 때와 그 시는 알 수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는 전제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누구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보내주신 또다른 보혜사 성령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합니다.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내가 성령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나를 주관하소서, 나를 사로잡아 주소서, 더 깊이 임하소서 더 깊이 임하소서”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 곧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기다리며 갈망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오신다 해도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성령충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