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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하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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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다음주에 있을 창립20주년 기념예배를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2가지 주제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오늘은 우리가 감사를 하는 자가 되기 위한 신앙적 자세요 다른 하나는 다음주에 있을 창립기념일에 우리들이 선언할 교회에 대한 비젼의 내용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는 감사를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보다는 아직도 우리들의 손안에 쥐어진 것이 작은 것 같아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청구서를 보여드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것이 넘치건만 그 은혜는 보이지 않고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것에만 우리들의 불편이 연이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표현이 되는 지 모릅니다. 감사합시다. 감사는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책임입니다.
성경의 살전5:18절에 말씀을 하시기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해야 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이 해야 할 자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삶의 여분이 생깁니다. 감사의 반대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것은 불평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불평하는 사람은 그의 삶의 자리를 보면 불평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은 아예 불평으로 만들어집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음에도 불평은 그에게 살며서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불평하라 그대여 불평하라.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의 삶의 모양을 분석을 하여보면 나보다 갖은 것 더 많구요, 나보다 아는 것 더 많구요, 나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평을 한다구요. 거참 이상하지요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감격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늘 무엇을 감사하기를 원하시는가 말입니다. 시편136:23절에 보면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소원을 하고 계십니다.
비천이라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낮은 토지에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낮은 땅에는 무시를 당하여 기억되지 않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애굽의 시대에 기억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사 때에도 기억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때에도 기억도 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처럼 낮은 땅이라고 여겨지던 곳을 기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은 곳에 있는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지배아래서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내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는 데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출3:7절을 보면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 낮은 곳은 고통과 부르짖음과 우고가 있는 곳을 이야기합니다. 낮은 곳이란 버려진 곳을 이야기합니다. 외면당한 곳을 이야기합니다. 잊혀진 장소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은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있었던 장소를 낮은 곳이라고 합니다. 포로가 되어서 그발강 가에서 고민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사건을 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편126:1-3절의 말씀을 보면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였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눅15장의 집나간 둘째아들의 모양을 기억을 하고 계십니까
그가 있는 장소는 비천한 장소입니다. 쥐엄 열매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장소가 비천한 장소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기억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비천한 곳에서 건져내시고 그를 어떻게 격상을 시킵니까 종이 아닙니다. 천한 일꾼으로 그를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아들이라는 말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을 하여 주셨습니다. 기억한다는 말은 "자카루나누"라는 희브리어 입니다. 낮은 땅에 있는 자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버려진 땅을 이야기합니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기억도 할 수 없는 자들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있나요 비천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들에게 영적인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비천한 곳은 영적으로는 버림받은 곳입니다.
아골 골짜기 같은 곳입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곳입니다. 인간이 죄를 통하여 얻은 곳이라고는 바로 이곳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입니다. 이세상의 영역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를 안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지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 비천한 곳으로 버릴 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의 대가를 지물한곳으로 우리는 인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 낮은 곳에 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실낙원 하는 아담의 부부를 위하여 양의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애정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니 이것 하나만을 가지고 있어도 참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저와 우리는 모두가 비천한 곳에 버림바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바 되었으니 감사의 자리는 우리가 분명히 행하여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여리고에 바디매오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소개하기를 시각 장애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는 그 순간에 예수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말입니다. 그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음을 감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천국은 아무에게나 주는 은총입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천국을 가보았습니까 아직도 아무 사람도 천국을 가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천국을 알려 주십니다. 천국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곳이 천국임을 믿는다고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곳은 천국은 우리가 아직은 가보지 못하였어도 천국은 어떤 곳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은 참으로 감격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곳을 준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시편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 오늘의 우리의 대적은 어떤 것입니까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히 많은 대적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혹은 같은 대적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것들이 대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대적을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의 생명을 파멸하는 대적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그들에게 구체적인 대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애굽, 아모리, 아말렉, 에돔, 모압 백성들이 그들에게는 대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시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하거나 번성을 하면 시기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방해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그 대적을 막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위기를 아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만들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대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대적을 마귀라고 선언을 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벧전5:8) 우리를 파멸케 하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믿음의 사람들이 잘되는 일들을 배아파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마다 안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마귀의 수단이요 그들의 삶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날마다 세워 가시는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들은 참으로 위대하심을 인정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139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데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통촉하신다고 그는 말을 합니다. 익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 십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말을 하시기를 내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거기서 나와 함께 하시고 바다 끝에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지옥의 자리에까지 나를 찾으러 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입니까 나의 전 영역에서 나를 건지시기 위하여 세밀하게 나를 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볼 수 있는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같은 경우는 우리들에게 대적이라는 것들이 참으로 더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시대입니다. 그 중의 하나는 불안입니다. 오늘날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불안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안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지 못하여서 불안하기도 하고 가져서 불안하기도 한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불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때에 이런 위로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통하여 더 확실한 자리에 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고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내일 때문에 염려스럽습니까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주님이신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보다 앞서 갈릴로 가셔서 그들을 위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준비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하였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따라 다니던 주님이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아무런 기척이 없는 무덤을 보던 베드로는 그 불안을 안고 낙향을 하지 않는가 그렇다가 그들이 고기를 밤새도록 잡아도 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하는 불안! 주님이 부활하신 것도 알지를 못하며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아도 잡히지 않는 그 불안! 그런데 그곳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을 해결하시려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베드로에게는 이한마디가 그의 불안 전체를 해결하여 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왕상19:에 보면 아합 앞에 서있던 엘리야는 참으로 초라한 자로 변하고 그럴때 그는 로뎀나무 아래로 도망을 하였고 하나니은 그를 위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을 해결하시려는 주님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이와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들이 살게되었고 살아온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비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확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신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불안이라는 것이 엄습을 합니다. 요사이에 우리들의 이야기 거리인 전쟁에 의한 불안입니다.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 앞에서 당하는 아픔을 우리는 실상은 경험을 하고 잇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하십니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하6:에 보면 도단에 아람 군대에게 포위되어있던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 말미암아 엘리사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전쟁도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불안한 미래 때문에 확답을 할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을 하고 불안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을 하신,s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이런 은혜로 지금까지 살았지요. 감사를 하십시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하는 감사입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한 감사입니다. 25절의 말씀을 보면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지금은 다 지나 갔습니다. 우리들이 어릴 적에 경험한 가난은 말할 것도 없는데 성경의 당시에는 산다는 자체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해결이 의식주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지금은 이 말이 우리들에게는 그리 의미부여를 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심각한 삶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의식주로 인하여 걱정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예전의 그 때를 아십니까 시골 이야기를 할까요 제 어렸을 땝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 것도 없고 배는 채워야 하겠고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양똥말 어느 집 두엄 싸놓는 근처에 아주까리가 잘 자랐는데 그 아주까리가 탐스럽게 열렸더라구요 제 마음가운데는 그 아주까리를 따먹으련 배를 채울 수가 있을 것 같아서 하염없이 그 아주까리를 따먹지 않았겠습니까 아 그런데 그 알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먹을 것이 그리도 많아도 잘 안 먹지요. 넉넉하여서 안 먹어도 배가 불러요. 연세 많으심 우리 권사님들은 더했겠지요. 여기 젊은 여자 집사님들은 알기는 뭘 알아요. 모르지. 입는 것은 어떠하구요. 대대로 입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막내이기 때문에 복은 받았습니다. 좀 시원치는 않아도 입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으니깐요.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옷이 지금은 얼마나 많은지! 겨울에 추우니깐 옷은 있는 대로 껴입지 않는가 혹은 좀 새 옷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입을까해서 껴입고 벗지도 않고 자잖아요.
그래서 겨울에는 옷을 벗지도 않고 자다보면 그 옷안에는 무언가 꿈틀거리는게 생기지요. 그게 생기면 간단합니다. 글그면 되구요. 그렇지 않으면 추운 겨울날 밖에 내 놓았다가 털어서 입는거 말입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앉아서 등잔불에 죽 태웠지 않습니까 여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너무 감사하지요. 너무 큰 은혜를 입고 살지요. 그 은혜가 너무 크다보니 그 은혜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 평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식물을 주셔서 평강의 은혜를 주셨는데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골3:15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찬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명기16:16-17절을 보면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신명기 기자는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복을 헤아리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몸을 드리십시오. 마음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감격을 드리십시오. 물질을 힘대로 드리십시오. 감사를 언어공수표로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감사를 허락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넘치는 것으로 더 많은 것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고 복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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