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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은혜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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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이 철이 바뀌면서 옷을 갈아입고 보니까 구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옷 색깔과 구두색이 맞지를 않아 기분이 나빠서 구두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두를 사러 나갔습니다. 나가서 이 가게 저 가게 가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구두가 없어서 불평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구두가 없을까
투덜투덜 또 다른 가게로 옮겨가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어디선가 아주 명랑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찬송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찬송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아서 돌아 보았더니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떤 청년이 마이크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보았더니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두 다리가 없어서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는 저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데 나는 그래 구두가 마음에 안든다고 그 많은 구두를 두고 이렇게 불평을 해야하나 해서 이 자매는 구두 사러 나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란 소유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사랑)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상과 자신의 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집니다.
어떤 형제분이 뇌일혈로 쓰러졌습니다. 다행히도 며칠만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뜨면서 감격스런 가슴을 안고 , 이제 천국에 왔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밀려드는 경이와 감탄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모든 것이 기적이구나, 만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 죽음에서 깨어난 그분은 이제 지금-여기가 천국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시일이 지나 퇴원하는 길에 거리의 사람들을 보자, 사람마다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그에게 살아 있음만으로 감격에 넘쳤고 삼라만상이 지어져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쁨이었고,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엔 사랑이 물결쳤습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감격은 새로 태어난 이의 감격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모든 우주 삼라만상, 세상사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오늘의 시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새로 태어난 시인이 세상과 자기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지은 시(詩)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깊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을 보았을 때 세상 전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공통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시인은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리고 그의 수난의 민족사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을 때 세상만사 그 어느 것 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악하고, 포학해서 그렇게도 세상을 망쳐놓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그 엄청난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했습니다.
자기 민족이 그렇게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자체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역 생활, 광야에서 격은 고난, 가나안 땅의 정착등 그의 민족사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게 찍혀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수난사를 보지 않고 민족의 구원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깨달은 사실을 글로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깨달은 바를 시(詩)로 남겼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들의 오늘의 삶 속에 재현시키기 위해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할 때 이 시편을 제사장과 함께 교창한 찬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처음 서두 1-3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4-9) 그리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의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되었던 기념할 만한 사실들을 찬양합니다. (10-24) 마지막으로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 시는 끝을 맺습니다. (25-2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 공동체 역시 그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역사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질병, 실패, 사고와 같은 것들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사람에 따라서 지나온 자신의 역사에 있었던 질병이나 사고나 성공이나 깜짝 놀랄 일등에 대해서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에는 후회가 있고, 죄책감이 있고, 즐거운 기억도 있는데 여기서 후회란 쓰라린 기억이고, 죄책감은 자신을 고소하는 기억이며, 감사는 즐거운 기억이라 했고, 이 모든 감정들은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 양식에 어떻게 통합하느냐는 방법에 따라 깊이 영향을 받는다. 고 했습니다.
오늘의 시편 본문에서 시인은 시인 자신과 그의 민족의 지난 날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긍정적인 통합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사는 비애와 수난의 역사였지만 미래의 희망을 위한 긍정의 역사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구구절절마다 감사하라. 는 찬양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로 제기 되는 것은 먹고, 입고, 거하는 것 외에, 수치, 분노, 억울함, 후회없는 오늘을 살 수 있는가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원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의 그러한 경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또는 국가적 고통이든지 잊어버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그 잊혀진 기억들이 독자적인 힘을 갖고서 우리가 인간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일을 가로막게끔 자신을 허용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우리가 꿈꾸는 환상에 맞추려고 유쾌하고 편안한 크기로 잘라내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일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선생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들과 직면하려 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감사절이 되면 우리에게는 부담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에는 즐거운 기억들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감사한다고 해도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 되곤 하기 때문에 내면과 일치되지 않는데서 오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감사절이 되면 다른 사람과 비교 가운데서 무엇 조금 나은 것을 찾아 감사하곤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거의 비교 가운데서 찾아낸 궁색한 감사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감사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가운데서 지나온 생의 역사에 있었던 일들을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로 보면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더 낫고, 뛰어나서, 모면해서, 더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수치와 비애, 상실,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경험한 가운데서의 감사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온 모든 날들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오늘 현재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드리는 감사 찬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은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세상 복을 많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가 아닙니다.
질병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실직 가운데서 지금까지 사랑으로 인도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죄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거짓과 불의의 삶 가운데 있었는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화해와 용서없이 살아온 나인데도 나를 받아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못나고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건강, 재능, 재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이러한 감사에서만 미래를 위한 새로운 다짐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감사에 새로운 삶에로 결단이 있게 됩니다. 새로운 삶에로 결단이 없는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절에는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새롭게 통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며 감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의 십자가 부활은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감사로 받아드리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새로운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비밀,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은 우리들의 지나온 날들의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진열장에 다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담대하게 드러내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미련함, 나약함, 어리석음, 부족함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한 감사입니다. 그러한 감사에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열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보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있었던 실패, 슬픔, 고통, 질병, 성공 등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후회, 분노, 부끄러움, 억울함, 고통스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손길이 수없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자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는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지난날의 우리의 과거를 받아드리게 하고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감사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미래를 새로운 각오로 맞이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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