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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인자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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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일 감사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특별히 한 날을 정해서 감사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이런 날을 정하여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감사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감사를 잊고 살 때가 많다. 사실은 어느 날이나 어버이날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날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날을 정해 놓는 것은 평상시 잊기 쉬운 일들을 한 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함일 것이다.
많은 경우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농사 잘 짓고 평안하게 잘 살게 해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인간 중심적이다.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할 때, 만일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많은 소득을 거두었다면 당연히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얻은 것과 잃은 것을 평균해 볼 때 잃은 쪽이 훨씬 더 많다면 과연 그 사람은 감사할 수 있겠는가 손해본 사람이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가 결국 인간 중심이 되다 보면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은 감사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없는 사람은 오히려 불평을 해야 맞을 것이다. 실제로는 감사한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고 하니까 감사한다"는 식으로 감사헌금을 한다면 그 사람의 감사는 결국 외식적(外飾的)인 감사가 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만일 우리가 한 해 동안 손해본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망하고 싶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큰 벌을 내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원망도 못하면서 외식적으로 감사헌금을 할 수도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땅의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많이 받은 사람과 적게 받은 사람은 감사의 양이나 질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농사나 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인 반면, 어떤 사람은 수해를 당하고 사업에 부도가 나서 엉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많이 얻은 자는 감사하고, 잃은 자는 덜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능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은 학생의 부모와 잘못 받은 학생의 부모는 감사의 양이나 질이 당연히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감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되다 보면 사실은 감사하지도 않은데 억지로 감사의 제목을 만들어 감사하게 된다. 내년에는 더 잘 되게 해 주실 줄 확실히 믿고() 감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희망일 뿐이다. 믿음이 아니라 자기확신(自己確信)일 뿐이다. 이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감사는 인간 중심적인 감사이다. 사도들은 자기확신을 근거로 감사하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감사는 언약과 관계되어 있었다.
시편 136편 전체의 후렴구는 하나같이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감사의 출발점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이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2)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4)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5)
이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했음을 노래하고 있다. 16절 이후에도 계속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나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소출을 얻게 된 것은 결코 이스라엘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로 가나안에서 열매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열매 그 자체보다도 언약을 이루셔서 그 땅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중요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원망 투성이 삶이었다. 조금 힘들면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런 원망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이끌어내셔서 가나안땅까지 인도하시고야 말았다.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에서는 뒤따르는 애굽 군사들은 수장시키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사람들도 내쫓으시고 그 땅으로 인도하셨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키셨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처음부터 끝가지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감사는 자기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은 '인자하심'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마음이 넓은 분이 포근하게 감싸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턱수염이 허옇게 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곤 한다. 좀 잘못한 것이 있어도 다 용서해 주시는 그런 너그러운 분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의 의미는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치셨다(10). 본문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신 행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좋다고 생각되지만,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아들을 잃은 것은 슬픔이다. 애굽 사람들 역시 자기 아들 귀한 줄은 당연히 알았다. 그러면 애굽은 치신 것을 어찌 인자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자하심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자하심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애굽 군사들을 수장시키시고, 가나안의 왕들을 치시고 죽이시는 인자하심이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물리치시는 그 일이 바로 인자하심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반대하고 막아서는 대적자들을 치시는 일을 인자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막았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모든 장애물들을 치셔서 약속을 이루셨다. 결국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의지이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붙들어두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신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시면 더 이상의 진전이란 없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멸망만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채워진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위에서 돈이나 보석에 깔려 죽었다는 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의지(뜻)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일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내 개인에게 유익한 것이 많은 것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음 구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5)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6)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7)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8)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9)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덕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일들을 보면 감사할 수 있다. 땅 위에 사는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덕분이다. 모두가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에게만 적용시킨다면 감사할 일이 별로 없겠지만, 우리같이 죄인인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크신 뜻을 펴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다 감사한 일이다. 하늘, 땅, 빛, 해, 달, 별 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감사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세상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늘이 부자들의 하늘만 되고, 가난한 자들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당신이 약속하신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가 가정을 꾸러 나가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주관해 나가신다. 우리는 이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보다는 내 개인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며 천체가 있는 것을 감사하기보다는 당장 내 자식 공부 잘하는 것이 더 기쁘고 주식 시세가 오른 것이 더 기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를 사하시게 하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게 하신 일보다도 승진한 것과 월급이 많이 오른 것이 더 기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성적이 오른 것은 기쁜 일이며, 돈을 많이 벌게 된 것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무시하고 나에게만 기쁨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다.
사람이 땅만 바라보고 살면 남들과 비교만이 있게 된다. 좋은 차 탄 사람이 눈에 보이고 성공한 사람이 눈에 보인다. 자신은 그렇게 되지 못함에 대해 한탄하며 낙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늘이나 별들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우리에겐 그 원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감사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늘을 매일 쳐다보고 살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탐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잘 되는 것이 남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한다. 그것이 바로 욕심인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가정을 잘 다스려 나가자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형제들끼리 다른 형제에게 주어질 것을 자기만 차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질서가 깨지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감사란 것이 당장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에게 줄 것까지도 나에게 갖다 주시면 그걸 감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막아서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하신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이끌어나가시는 것을 마다하고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해 주기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은 아닌가 우리의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런 감사가 없다. 우리의 감사는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져야 할 것이 나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에 의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와는 달리, 비록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배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성도라면 당연히 희생의 모습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모습이 사도들의 삶이었다. 오늘 우리 새생명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희생하는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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