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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나눌수록 커지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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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류 소설작가 조지 엘리엇이 쓴사일러스 마아너 : 1861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아너는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고향을 떠난 옷감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짠 옷감을 파는 일 외에는 마을 사람들과 아무런 왕래도 없이 외딴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하루에 16시간씩 꼬박 앉아 짠 직물을 팔아서 번 금화를 쓰지 않고 냄비에 담아 마루 밑에 감추어 두고 밤마다 꺼내어 어루만져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 자체이던 금화를 누군가 훔쳐간 것입니다. 비탄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하며 잃어버린 금화를 찾아다니다 허탕치고 돌아온 어느 날 밤, 그는 난로 옆에 잠들어 있는 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아이의 반짝이는 금발을 금화로 착각하고 순간적으로 들떴던 그는 그 아이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고아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아너는 그 아이를 키우기로 작정합니다.
그때부터 마아너는 딱딱하고 차가운 금화 대신에 딸 에피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며, 자기를 버렸던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도 마아너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는 에피를 통해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준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함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에 선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 나는 이제 그걸 알아. 세상에는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도 분명 선은 있어.
이 소설에서 강조되는 점은 돈에 집착했을 때 고립되고 의미 없는 삶을 살던 마아너가 그 돈이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실된 인간관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투명한 유리에 금이나 은을 칠하면 거울이 됩니다. 유리를 통해서는 바깥세상도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웃고 손을 내밀면 상대방도 웃고 손을 내밀어 줍니다. 그러나 거울에는 자기만 보입니다. 금은으로 사방에 벽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거울 속 사람들처럼,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돌보며 감옥인 줄도 모르는 채 감옥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일러스 마아너는 에피를 통해서 거울 속 감옥에서 벗어났고, "누가 뭐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고백합니다.
삶에는 두 종류의 방식이 있습니다. 소유의 가치에 집착하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힘이 세냐, 얼마나 높으냐
눈에 보이는 가치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사일러스 마아너가 딸 에피를 만나기 이전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거울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로 덧칠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나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항상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사일러스 마아너가 에피를 만나고 난 후에는 소유의 가치에서 존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돈보다는 사랑이, 금화보다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소유보다는 사랑의 나눔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삶을 살고 있습니까 소유의 가치입니까 아니면 존재의 가치입니까
쉽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이용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면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가
내가 일을 할 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맡겨주신 소명으로 알고 일하는가
내가 봉사를 할 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식해서 하는가 아니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하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존재보다는 소유의 가치에 집착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조합니다. “주라, 나누라, 베풀라, 섬기라, 봉사하라, 구제하라”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선조들은 나눔을 강조했고,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만석군 최씨집안
까치밥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전에 시골에 가면 감을 딸 때 나무 끝에 매달린 감을 서너개 남겨 놓습니다. 요즘처럼 흔하지도 않은데 왜 남겨 놓았을까요 겨우네 까치가 먹고 살으라고 남겨둡니다. 그래서 까치밥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콩을 심을 때 보통 세알씩 심습니다. 하나만 심어도 되는데 왜 세알을 심었을까요 한 알은 하늘의 새가 먹고, 한 알은 땅속의 벌레가 먹고, 나머지 한 알은 심은 사람이 먹는답니다.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사람이 혼자만 먹겠다고 한 알을 심으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미물까지 생각하고 더불어 살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나눔의 중요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신명기 24장 19-22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
여호와 하나님은 당시에 사회적인 약자들인 나그네, 고아, 홀로된 자들을 위하여 곡식과 과일을 남겨둘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눔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어 종의 모습으로 가장 비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항상 당시의 사회적인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각종 병든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같이 멸시받던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마지막 물 한방울, 피한방울까지 다 주셨습니다. 주님의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갈보리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라고 명하십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입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주님은 약한 자를 도우라고 명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
우리 주님은 주는 자에게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주님 앞에서 계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축복은 바로 나눔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유한 것을 지키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눠보십시오.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이 생겨납니다.
나눔은 모든 행복의 근원입니다.
재물을 나누는 것은 조금 나누는 것이고,
지혜를 나누는 것은 많이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모두 다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가진 것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많이 가졌고
어떤 사람은 지식과 지혜를 많이 가졌고.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이나 지식은 없어도
인간에게 꼭 필요한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만 있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나누어 줄 때 느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은 숲속의 옹달샘 같습니다. 길가는 나그네가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깊은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러나 퍼내지 않는 우물물은 금방 썩어 버립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동네 앞에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우물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뒷산에 깊은 샘을 파서 수도 파이프를 연결했습니다. 따라서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물을 먹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우물은 썩고 말았습니다.
우물을 퍼낼 때 새로운 생수를 계속 공급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내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퍼올려서 자꾸 나눠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채워 놓으면 금방 부패합니다. 악취가 납니다. 자신도 먹지 못하고 남도 먹지 못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등등, 이루 다 헤아리 수가 없습니다
매스컴에 많은 재산을 장학금, 또는 좋은 일에 써달라고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
기가 종종 보도됩니다. 그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공통된 대답이 있습니다.
'이 재산은 사회가 내게 준 재산이니 그 일부를 사회에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는 할머니가 많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가니까 그 할머니는 '이 학교 학생들 덕분에 이 분식집이 잘 되고 우리 집이 먹고살고 있는데 학생들 덕분에 번 돈의 일부를 가지고 그 학생들이 공부 잘 하도록 하는 일에 써달라는 것이 무슨 유별난 일이라고 취재를 오셨나요' 오히려 반문하더랍니다.
영안모자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백성학(白聖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6·25 때 혼자 월남해서 거지 생활,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생활을 거쳐 모자 가게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루에 18시간씩 일해 열아홉 살 때 자신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이 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1년에 모자 1억 개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모자회사로 미국지역에서 판매되는 모자의 70%가 한국 영안모자 제품이라고 합니다.
이 분에게 변하지 않는 신조가 있는데 '내가 번 돈의 20%는 다시 사회에 기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이 사회가 내게 준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섬김과 나눔의 바른 자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한신대학 신학연구소에서 ’한국 개신교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조사'라는 것을 실
시했습니다. 그 결과는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지역사회를 향한 나눔과 섬김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17-18절은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뇨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섬김과 나눔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섬김과 나눔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필수과목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교회 부흥을 필수과목으로 여기고 섬김과 나눔은 선택과목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로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시 한번 나눔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
안 먹고 안쓴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비결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기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집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더욱 윤택해 집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3대 부자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결코 대물림되어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현대그룹이 해체될 줄 알았겠습니까
이미 내게 주신 복을 누리는 것이 지혜요 행복입니다. 나 자신 만을 위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함께 나눌 때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나눌수록 감사는 더욱 커집니다. 나눌수록 기쁨은 배가 됩니다. 나눌수록 축복은 더욱 확대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잘 견뎌왔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눔을 통한 더욱 큰 감사와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금번 추수감사주일에는 ‘나누는 기쁨 풍성한 감사’의 절기로 지키기를 원합니다.
구역별로 과일 바구니 한 개씩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과도 좋고, 감도 좋고, 배도 좋습니다. 정성껏 준비해서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작은 사과하나 일지 모르지만 이것을 받는 분들에게는 큰 기쁨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준비한 과일 바구니를 우리의 전도대상지역인 3단지에서 7단지까지 노인정과 수고하시는 아파트 경비원들, 그리고 관리 사무소, 파출소, 동사무소 등 우리를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누는 사랑 속에 우리의 기쁨과 감사는 더욱 커지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나눔은 여호와 하나님의 예금통장에 적금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우리는 작은 것을 나누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더욱 놀라운 축복으로 되돌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눈덩이를 굴릴수록 점점 커지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커지는 기쁨과 감사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해인 님의 “사계절의 기도” 라는 시를 통해서 나눔의 고귀함에 대해서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주고도
한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언제나 자신을 주는 행위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미소, 나의 기쁨, 나의 재능, 나의 지식
그리고 나의 물건과 그밖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의 일부를 주는 경건한 행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의 정성과 나의 노력과 나의 시간과 나의 마음을 더 많이
바칠수록 남에게 더욱 빛나는 선물이 됨을 항시 기억하게 하소서
나눔은 언제나 겸손의 행위입니다
당신과 이웃에게 나를 주려 할 때엔 잘난 체하는 마음 없애시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하고 진실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숨어서도 만족하는 기도의 행위입니다
자신의 善을 과장하여 떠벌리고 다니거나
타인에게 은근히 보답을 강요하여
인사 받길 좋아하는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
나눔은 언제나 용기있는 행위입니다
남의 비위를 맞추려 눈치를 보며 체면 따위에 얽매여 움츠러드는
비겁한 겁쟁이가 아니되게 하소서
나눔은 끝없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줄것이 남는 연인들의 마음처럼 더 주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더 나누지 못해서 고민을 하는 풍요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주님!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참다운 나눔의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과의 만남이,
영적인 성숙이 천국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주신 신앙과 은총의 선물만 가지고도
이웃과 충분히 나눌 것이 많은 부자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 사랑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하신 주님
당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나눔의 신비가
우리의 매일 속에 실현되게 해 주소서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신비를 우리 모두 체험하고 맛들이게 하소서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이승의 순례자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께 빌려 받은 것임을 항시 기억하게 하소서
벗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당신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주어진 처지에서 인간과 사물을 깊이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나눔의 기쁨으로 말미암은 평화가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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