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다니엘의 감사
본문
감사는 감사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원망의 마음을 품으면 모든 것이 원망과 불평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에 대해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두 가지 감사
첫째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줄줄 나오는게 아주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수도꼭지를 트는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세수하기 위해서, 양치질하기 위해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또 화장실의 일을 볼 때도 꼭지를 틀어야 됩니다. 이런 경우에 물이 제대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면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매미 태풍이 휩쓸고 갔을 때 경남지방의 어느 동네에서는 6일 동안 수돗물이 안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찾아가서 형편을 물었을 때 주민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돗물이 안나오니까 지옥입니다. ” 아무리 입을 옷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고 타고 다닐 승용차가 있어도 수돗물이 안 나오면 우리의 생활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하나도 제대로 되는게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데도 감사하는 마음을 못 느끼고 살아오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두 번째는 안경을 쓰고 사는 것이 감사합니다. 안경 쓴 자체는 불평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경이 없이도 사는데 왜 나는 일찍부터 안경을 끼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불평할 일인데 제 눈은 안경 때문에 사람노릇을 하는 눈입니다. 만약에 안경이 없다면 저는 사람노릇을 못할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고 난시가 많아서 안경을 안 쓰면 독서를 못합니다. 안경을 안 끼면 운전을 못합니다.
제 생활의 모든 부분에 마비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안경을 꼈을 때는 안경알이 두껍고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예전의 안경을 끼면 알이 두꺼워서 여러분들이 저의 눈동자를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경기술이 개발이 되어서 지금은 전보다 안경알의 두께가 삼분의 일로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무게도 줍니다. 요즘 플라스틱 안경알은 무게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발달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저는 안경을 끼고 사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는 농담을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 눈을 가지고 어떻게 안경을 안 끼고 사느냐”고.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을 해봅시다. 요즘 우리 생활은 리모콘 시대입니다. 구형의 전자제품은 버튼을 눌러 사용하지만 세탁기, 가스레인지, 냉장고 등 요즘 나오는 것들은 모든 것을 다 리모콘을 가지고 사용합니다. 승용차도 리모콘을 가지고 엽니다. 우리의 생활환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발전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아기 키우는 것을 보니까 귀저기 하나까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아기용품을 가지고 편안하게 아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저가 자랄 때 어머니께서 식구들의 옷을 빨아서 입히는 것을 다 보고 컸습니다.
옛날에 옷이라 해봤자 시장에 가도 바지저고리 입고 가야 되고, 밭에 일하러 가도 바지저고리 입고 가야 되고 옛날 그림들을 보면 전부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지저고리는 그냥 빨아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다듬이질을 해서 풀을 먹여야 되고 다려야 되는데 숯불 피워서 재를 날려가면서 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듬이질 안 하고 옷을 입고 사는 이것 하나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요즘 캐쥬얼 셔츠를 보면 다림질을 안하고 그냥 입어도 됩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환경은 편리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평하고 삽니까 무엇이 지금 모자랍니까 적게 먹기를 연구하는 이 세상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적게 먹을까 어떻게 하면 살을 뺄까 하고 싶은 것을 누가 못하게 합니까 마음대로 가고, 마음대로 여행하고, 마음대로 오락하고, 마음대로 레저를 즐기고, 마음대로 예수 믿고, 마음대로 교회에 다닙니다. 마음대로 교회를 섬기도록 되어 있는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삽니까 가만히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옛날에는 구경도 못하던 것들이 얼마나 풍성하고 많습니까
감사의 수준을 높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신앙에 지금 허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감사하는 조건을 보면 그 조건은 모두 일상적인 게 대부분입니다. 일반적인 감사는 누구나 합니다. 어떤 것들은 믿음의 가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을 해서 감사하고, 졸업을 해서 감사하고, 취업을 해서 감사하고, 주택을 구입해서 감사하고,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하는 이것은 믿음이 없어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작 그런 일반적인 감사를 해놓고 감사한 것처럼 우쭐하고 자랑하고 만족하기 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정도의 감사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을 주신 것은 일상적인 그와 같은 복을 감사하라는게 아닙니다. 그런 감사는 추수감사절이 아니라도 할 수 있고, 그런 감사는 신앙가치가 아니라도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조건부 감사를 해놓고 감사했다고 안주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 단계 더 높아가야 됩니다. 한 단계 더 영적이어야 합니다. 한 단계 더 여호와 하나님이 기대하는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감사가 바로 다니엘의 감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유대인을 시기하는 간신배들은 왕 앞에 이상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왕이여 이 나라에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 죽이기로 해야 됩니다. ” 그렇게 제안을 하고 조서를 만들어서 왕으로 하여금 그 조서에 어인을 찍도록 했습니다. 바벨론은 우상국가입니다. 고대국가는 왕이 곧 신입니다. 그 무지한 백성들은 왕을 신으로 섬깁니다. 이것을 조서로 법령을 만들어서 누구든지 위반하면 사자굴에 던져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비록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었을지라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결코 왕을 경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여전히 자기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밤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감사의 의미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고난 중에서의 감사
첫째로 그는 고난 중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지금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핍박이 닥쳐왔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무서운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요 말할 수 없는 핍박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만하기 때문에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감사할 수 없는 여건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범사에 감사’는 다른 말로 말하면 무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라이온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계대2차대전’이라는 소설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이 5년간 암투병을 했습니다. 투병하는 동안에 그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또 하루 좋은 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병상에서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기도가 이 기도였습니다. 부인이 하루는 물었습니다. “여보, 무엇이 그렇게 좋은 날이에요”
그때 라이온이 “나는 다섯 가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소. 첫째, 내가 눈을 떴을 때 오늘도 당신이 내 눈앞에 보이면 좋은 날이요. 둘째, 오늘도 내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날이요. 셋째, 내가 병중에서도 가장 길었던 날이라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참 좋은 일이오. 네 번째, 내가 병과 싸울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소. 다섯 번째, 고통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오. ”
여러분, 감사는 조건없는 감사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감사이고 영적인 감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조건 안에 머무는 감사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 때문에 감사한 이것은 감사의 수단이고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영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영적인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그 감사는 우리의 감사의 조건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화된 감사신앙
그래서 감사는 섬김이라는 말과 직결됩니다. 우리가 감사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섬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섬김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감사는 사실은 조건이 없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보면 본문에는 없지만 틀림없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무지한 백성들은 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살아계신 여호와를 참신으로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 이런 감사를 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왕을 신으로 섬기는 그 나라에서 다니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참신으로 붙잡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 나의 아버지됨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 그 감사의 바탕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속하게 감사합니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은 것을 알고도 그날 집에 돌아가서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감사는 신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았을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느낄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미루는게 아닙니다. 작년의 은혜를 오늘 감사하는게 아닙니다. 오늘의 은혜를 오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신속성입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주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가서 보이라고 했습니다. 가다가 열 명의 나환자들이 다 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이방사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감사를 기뻐 받으시면서 섭섭한 마음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어찌 이 이방인 한 사람 외에는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은 우리의 신속한 감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감사는 전에 행하던대로 기도하고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한 감사가 아닙니다. 우연히 한 감사가 아닙니다. 전에 행하던대로 생활화된 감사입니다. 감사는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 자체가 감사합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전에 행하던대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전에 행하던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모범
성경기록상으로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네 번 감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오천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한 사람 분량의 그 식사를 손에 잡으시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그 감사기도는 보통 감사기도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네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한다면 4인분을 시켜놓고 감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오병이어를 붙잡고 오천명을 먹일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 장정 외에 여자와 아이들을 다 포함하면 이만명이라고 하는데 이만명 먹일 것을 생각하고 한 사람 먹을 식사를 붙잡고 감사기도하는 주님의 이 기도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식당에 가서 네 사람이 일인분 시켜놓고 기도한다면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주여, 저 고깃덩어리 내가 먼저 집게 하옵소서” 4인분 시켜놓고 기도하니까 수저를 누가 먼저 들든, 누가 많이 떠가든 아무 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만명이 먹을 것을 생각하고 조그마한 그 불쌍한 아이가 갖고 있던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 무엇을 우리에게 암시합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것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불쌍한 아이가 갖기고 있는 그것을 붙잡고 주님이 기도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조그마한 것도 감사하고 조그마한 물질도 감사해야 합니다. 적게 벌었다고 감사가 면제되고 많이 벌었다고 감사가 면제되는게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가 하는 예가 아주 많습니다. 부산대학에 장학금 300억, 문화기금 1000억을 기증한 송금조 옹이 계십니다. 1300억을 부산대학에 기증한 일은 굉장한 화제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지금 피신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하도 도와달라는 전화가 많아서 대학으로 신문사로 연락처를 좀 알려달라고 사람에게 시달려서 이 어른이 피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좋은 일 한사람 못 견디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병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세상적인 감사생활 하지 말고 영적인 감사생활, 다니엘의 감사생활,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를 붙잡고 감사하는 그 감사가 우리가 찾아야 될 감사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감사를 했는데 실패 중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많이 하셨는데 전도하실 때마다 성공한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전도하실 때마다 비참하게 실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가 나셔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너희들에게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그들이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으리라” 주님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시고 회당에서 동네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천국복음을 전했는데 반응은 주님을 좇아내 버렸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나가라면서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좇아내 버리는 그 동네를 향해서 주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그러면서 주님은 마지막에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이 전도실패를 하고 동네에서 추방당하고 나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전도하다 실패하거든 절망하지 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입니다. 주님도 복음을 전하다가 배반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주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일 정도로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다가 실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요한복음 11장 41절에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큰 이적을 행할 그 장소에서도 ‘만군의 여호와여 죽은 나사로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큰일을 앞두고는 감사기도를 해야 됩니다. 성전건축은 큰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를 살리는 일을 앞두고 감사기도한 주님을 배워서 우리도 성전건축의 큰 대역을 앞두고 감사하는 믿음이 더욱 충만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4복음서의 주님은 최후만찬에서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전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축사하시고” 감사기도입니다. 이것도 매우 교훈적입니다. 이 성만찬은 바로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을 나올 때는 울적했더라도 이 예배의 자리에 오기 전에는 마음속에 갈등이 있고 근심이 있었을지라도 예배하는 그 순간만은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기 바랍니다. 예배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받는 것도 감사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베풀면서 떡과 잔을 가지시고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성찬식도 우리의 감사신앙의 바탕에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배우자
주님의 이 네 번의 감사는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입니다. 오병이어를 붙잡고 오천명의 무리들을 생각하며 하는 그 기도는 우리가 궁핍한 중에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실패가 일어나도 감사하는 주님의 모습, 여러분 전도해서 안되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해서 안 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한번 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안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실패해도 감사하고 다시 해야 됩니다. 그것이 전도의 모습입니다. 큰일을 앞두고 주님이 감사기도 하신 것처럼 우리도 큰일을 앞두고 감사생활을 하기 바라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바탕은 감사의 신앙으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에 미국에 상륙을 해서 인디언들에게 농사를 배워서 3년만에 추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메사추세츠 주지사가 그 감사일을 11월 넷째주에 선포해서 첫 번 감사절이 지켜졌는데 그 선언문에 보면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약 230년 후 링컨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경축일로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 국경일이 된 것입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큰 명절입니다. 한 주간 감사절 휴가를 하고 우리나라 추석처럼 부모와 고향을 찾아가고 하는 그 민족대이동이 추수감사절 휴가 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제정되어 우리에게 전수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청교도 신앙의 중요한 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이 감사의 의미는 물론이지만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그 감사의 신앙가치를 꼭 붙잡아야 됩니다. 청교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했는데 이 감사가 미국을 건국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인들의 감사는 일반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국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날 때 146명이 180톤짜리 배를 타고 시속 2마일, 이것은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느립니다. 그런 배로 117일을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한 것입니다. 이런 모험을 다시 말하면 이것은 죽으려고 떠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날 때 이런 각오를 했습니다. 그들은 떠날 때 ‘146명이 다 죽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자’ 이 다짐을 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항해 중에 두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이 새로 태어났다고 알려집니다.
맺는 말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오늘 하루만의 감사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니엘의 감사처럼 조건없는 감사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 위기 중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전에 행하던대로 생활화된 감사입니다. 그리고 신속성이 있는 감사입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 하고 있는 다니엘의 이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신앙적인 개혁이 많이 필요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생활을 하는 이것 하나만 개혁이 되면 신앙생활 모두가 바뀔 줄로 믿습니다.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대하는 영적인 감사가 있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상적인 두 가지 감사
첫째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줄줄 나오는게 아주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수도꼭지를 트는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세수하기 위해서, 양치질하기 위해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또 화장실의 일을 볼 때도 꼭지를 틀어야 됩니다. 이런 경우에 물이 제대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면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매미 태풍이 휩쓸고 갔을 때 경남지방의 어느 동네에서는 6일 동안 수돗물이 안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찾아가서 형편을 물었을 때 주민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돗물이 안나오니까 지옥입니다. ” 아무리 입을 옷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고 타고 다닐 승용차가 있어도 수돗물이 안 나오면 우리의 생활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하나도 제대로 되는게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데도 감사하는 마음을 못 느끼고 살아오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두 번째는 안경을 쓰고 사는 것이 감사합니다. 안경 쓴 자체는 불평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경이 없이도 사는데 왜 나는 일찍부터 안경을 끼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불평할 일인데 제 눈은 안경 때문에 사람노릇을 하는 눈입니다. 만약에 안경이 없다면 저는 사람노릇을 못할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고 난시가 많아서 안경을 안 쓰면 독서를 못합니다. 안경을 안 끼면 운전을 못합니다.
제 생활의 모든 부분에 마비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안경을 꼈을 때는 안경알이 두껍고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예전의 안경을 끼면 알이 두꺼워서 여러분들이 저의 눈동자를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경기술이 개발이 되어서 지금은 전보다 안경알의 두께가 삼분의 일로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무게도 줍니다. 요즘 플라스틱 안경알은 무게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발달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저는 안경을 끼고 사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는 농담을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 눈을 가지고 어떻게 안경을 안 끼고 사느냐”고.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을 해봅시다. 요즘 우리 생활은 리모콘 시대입니다. 구형의 전자제품은 버튼을 눌러 사용하지만 세탁기, 가스레인지, 냉장고 등 요즘 나오는 것들은 모든 것을 다 리모콘을 가지고 사용합니다. 승용차도 리모콘을 가지고 엽니다. 우리의 생활환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발전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아기 키우는 것을 보니까 귀저기 하나까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아기용품을 가지고 편안하게 아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저가 자랄 때 어머니께서 식구들의 옷을 빨아서 입히는 것을 다 보고 컸습니다.
옛날에 옷이라 해봤자 시장에 가도 바지저고리 입고 가야 되고, 밭에 일하러 가도 바지저고리 입고 가야 되고 옛날 그림들을 보면 전부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지저고리는 그냥 빨아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다듬이질을 해서 풀을 먹여야 되고 다려야 되는데 숯불 피워서 재를 날려가면서 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듬이질 안 하고 옷을 입고 사는 이것 하나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요즘 캐쥬얼 셔츠를 보면 다림질을 안하고 그냥 입어도 됩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환경은 편리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평하고 삽니까 무엇이 지금 모자랍니까 적게 먹기를 연구하는 이 세상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적게 먹을까 어떻게 하면 살을 뺄까 하고 싶은 것을 누가 못하게 합니까 마음대로 가고, 마음대로 여행하고, 마음대로 오락하고, 마음대로 레저를 즐기고, 마음대로 예수 믿고, 마음대로 교회에 다닙니다. 마음대로 교회를 섬기도록 되어 있는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삽니까 가만히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옛날에는 구경도 못하던 것들이 얼마나 풍성하고 많습니까
감사의 수준을 높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신앙에 지금 허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감사하는 조건을 보면 그 조건은 모두 일상적인 게 대부분입니다. 일반적인 감사는 누구나 합니다. 어떤 것들은 믿음의 가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을 해서 감사하고, 졸업을 해서 감사하고, 취업을 해서 감사하고, 주택을 구입해서 감사하고,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하는 이것은 믿음이 없어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작 그런 일반적인 감사를 해놓고 감사한 것처럼 우쭐하고 자랑하고 만족하기 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정도의 감사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을 주신 것은 일상적인 그와 같은 복을 감사하라는게 아닙니다. 그런 감사는 추수감사절이 아니라도 할 수 있고, 그런 감사는 신앙가치가 아니라도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조건부 감사를 해놓고 감사했다고 안주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 단계 더 높아가야 됩니다. 한 단계 더 영적이어야 합니다. 한 단계 더 여호와 하나님이 기대하는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감사가 바로 다니엘의 감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유대인을 시기하는 간신배들은 왕 앞에 이상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왕이여 이 나라에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 죽이기로 해야 됩니다. ” 그렇게 제안을 하고 조서를 만들어서 왕으로 하여금 그 조서에 어인을 찍도록 했습니다. 바벨론은 우상국가입니다. 고대국가는 왕이 곧 신입니다. 그 무지한 백성들은 왕을 신으로 섬깁니다. 이것을 조서로 법령을 만들어서 누구든지 위반하면 사자굴에 던져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비록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었을지라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결코 왕을 경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여전히 자기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밤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감사의 의미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고난 중에서의 감사
첫째로 그는 고난 중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지금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핍박이 닥쳐왔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무서운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요 말할 수 없는 핍박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만하기 때문에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감사할 수 없는 여건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범사에 감사’는 다른 말로 말하면 무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라이온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계대2차대전’이라는 소설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이 5년간 암투병을 했습니다. 투병하는 동안에 그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또 하루 좋은 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병상에서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기도가 이 기도였습니다. 부인이 하루는 물었습니다. “여보, 무엇이 그렇게 좋은 날이에요”
그때 라이온이 “나는 다섯 가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소. 첫째, 내가 눈을 떴을 때 오늘도 당신이 내 눈앞에 보이면 좋은 날이요. 둘째, 오늘도 내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날이요. 셋째, 내가 병중에서도 가장 길었던 날이라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참 좋은 일이오. 네 번째, 내가 병과 싸울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소. 다섯 번째, 고통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오. ”
여러분, 감사는 조건없는 감사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감사이고 영적인 감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조건 안에 머무는 감사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 때문에 감사한 이것은 감사의 수단이고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영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영적인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그 감사는 우리의 감사의 조건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화된 감사신앙
그래서 감사는 섬김이라는 말과 직결됩니다. 우리가 감사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섬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섬김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감사는 사실은 조건이 없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보면 본문에는 없지만 틀림없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무지한 백성들은 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살아계신 여호와를 참신으로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 이런 감사를 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왕을 신으로 섬기는 그 나라에서 다니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참신으로 붙잡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 나의 아버지됨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 그 감사의 바탕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속하게 감사합니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은 것을 알고도 그날 집에 돌아가서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감사는 신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았을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느낄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미루는게 아닙니다. 작년의 은혜를 오늘 감사하는게 아닙니다. 오늘의 은혜를 오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신속성입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주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가서 보이라고 했습니다. 가다가 열 명의 나환자들이 다 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이방사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감사를 기뻐 받으시면서 섭섭한 마음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어찌 이 이방인 한 사람 외에는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은 우리의 신속한 감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감사는 전에 행하던대로 기도하고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한 감사가 아닙니다. 우연히 한 감사가 아닙니다. 전에 행하던대로 생활화된 감사입니다. 감사는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 자체가 감사합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전에 행하던대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전에 행하던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모범
성경기록상으로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네 번 감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오천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한 사람 분량의 그 식사를 손에 잡으시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그 감사기도는 보통 감사기도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네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한다면 4인분을 시켜놓고 감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오병이어를 붙잡고 오천명을 먹일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 장정 외에 여자와 아이들을 다 포함하면 이만명이라고 하는데 이만명 먹일 것을 생각하고 한 사람 먹을 식사를 붙잡고 감사기도하는 주님의 이 기도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식당에 가서 네 사람이 일인분 시켜놓고 기도한다면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주여, 저 고깃덩어리 내가 먼저 집게 하옵소서” 4인분 시켜놓고 기도하니까 수저를 누가 먼저 들든, 누가 많이 떠가든 아무 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만명이 먹을 것을 생각하고 조그마한 그 불쌍한 아이가 갖고 있던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 무엇을 우리에게 암시합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것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불쌍한 아이가 갖기고 있는 그것을 붙잡고 주님이 기도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조그마한 것도 감사하고 조그마한 물질도 감사해야 합니다. 적게 벌었다고 감사가 면제되고 많이 벌었다고 감사가 면제되는게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가 하는 예가 아주 많습니다. 부산대학에 장학금 300억, 문화기금 1000억을 기증한 송금조 옹이 계십니다. 1300억을 부산대학에 기증한 일은 굉장한 화제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지금 피신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하도 도와달라는 전화가 많아서 대학으로 신문사로 연락처를 좀 알려달라고 사람에게 시달려서 이 어른이 피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좋은 일 한사람 못 견디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병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세상적인 감사생활 하지 말고 영적인 감사생활, 다니엘의 감사생활,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를 붙잡고 감사하는 그 감사가 우리가 찾아야 될 감사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감사를 했는데 실패 중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많이 하셨는데 전도하실 때마다 성공한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전도하실 때마다 비참하게 실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가 나셔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너희들에게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그들이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으리라” 주님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시고 회당에서 동네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천국복음을 전했는데 반응은 주님을 좇아내 버렸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나가라면서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좇아내 버리는 그 동네를 향해서 주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그러면서 주님은 마지막에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이 전도실패를 하고 동네에서 추방당하고 나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전도하다 실패하거든 절망하지 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입니다. 주님도 복음을 전하다가 배반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주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일 정도로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다가 실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요한복음 11장 41절에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큰 이적을 행할 그 장소에서도 ‘만군의 여호와여 죽은 나사로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큰일을 앞두고는 감사기도를 해야 됩니다. 성전건축은 큰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를 살리는 일을 앞두고 감사기도한 주님을 배워서 우리도 성전건축의 큰 대역을 앞두고 감사하는 믿음이 더욱 충만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4복음서의 주님은 최후만찬에서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전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축사하시고” 감사기도입니다. 이것도 매우 교훈적입니다. 이 성만찬은 바로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을 나올 때는 울적했더라도 이 예배의 자리에 오기 전에는 마음속에 갈등이 있고 근심이 있었을지라도 예배하는 그 순간만은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기 바랍니다. 예배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받는 것도 감사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베풀면서 떡과 잔을 가지시고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성찬식도 우리의 감사신앙의 바탕에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배우자
주님의 이 네 번의 감사는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입니다. 오병이어를 붙잡고 오천명의 무리들을 생각하며 하는 그 기도는 우리가 궁핍한 중에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실패가 일어나도 감사하는 주님의 모습, 여러분 전도해서 안되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해서 안 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한번 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안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실패해도 감사하고 다시 해야 됩니다. 그것이 전도의 모습입니다. 큰일을 앞두고 주님이 감사기도 하신 것처럼 우리도 큰일을 앞두고 감사생활을 하기 바라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바탕은 감사의 신앙으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에 미국에 상륙을 해서 인디언들에게 농사를 배워서 3년만에 추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메사추세츠 주지사가 그 감사일을 11월 넷째주에 선포해서 첫 번 감사절이 지켜졌는데 그 선언문에 보면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약 230년 후 링컨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경축일로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 국경일이 된 것입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큰 명절입니다. 한 주간 감사절 휴가를 하고 우리나라 추석처럼 부모와 고향을 찾아가고 하는 그 민족대이동이 추수감사절 휴가 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제정되어 우리에게 전수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청교도 신앙의 중요한 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이 감사의 의미는 물론이지만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그 감사의 신앙가치를 꼭 붙잡아야 됩니다. 청교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했는데 이 감사가 미국을 건국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인들의 감사는 일반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국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날 때 146명이 180톤짜리 배를 타고 시속 2마일, 이것은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느립니다. 그런 배로 117일을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한 것입니다. 이런 모험을 다시 말하면 이것은 죽으려고 떠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날 때 이런 각오를 했습니다. 그들은 떠날 때 ‘146명이 다 죽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자’ 이 다짐을 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항해 중에 두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이 새로 태어났다고 알려집니다.
맺는 말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오늘 하루만의 감사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니엘의 감사처럼 조건없는 감사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 위기 중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전에 행하던대로 생활화된 감사입니다. 그리고 신속성이 있는 감사입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 하고 있는 다니엘의 이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신앙적인 개혁이 많이 필요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생활을 하는 이것 하나만 개혁이 되면 신앙생활 모두가 바뀔 줄로 믿습니다.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대하는 영적인 감사가 있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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