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감사해요
본문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복 받기를 원하시는 분만 아멘 합시다.
자녀가 잘 되는 복, 재물이 풍족한 복, 장수의 복, 건강의 복 등 여러 가지 복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복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행복"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번영과 행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행복과 불행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구약에 나타난 복은 장수와 많은 자녀, 현숙한 아내, 많은 재산,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의 개념이 영적인 의미로 승화되어 구원, 믿음가운데 갖는 기쁨과 평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곧 복이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일 크고 좋은 복은 예수 믿는 것이 복이다.
정말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몇 군데를 찾아봅시다.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갈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엡1:3 찬송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히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 신령한 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지 않거나 삶에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돌봐줌을 받는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낙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실패해본 적이 없습니다. '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을 하게되면 그 책임을 여호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를 돌봐주시지 않아서 이와 같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 때문이야. 우리 형님 때문이야. 사회 때문이냐. 국가 때문이야' 하면서 핑계를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낭패를 당하고 좌절을 만나게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중에 나타난 다니엘의 신실한 믿음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낭패와 실망 밖에 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을 자랑하는 바베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바벨론은 몇년전 걸프전을 일으켜 제2의 바벨론을 꿈꾸었던 이라크 땅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 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어떤 명령인데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추상같은 명령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신앙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신실한 신앙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우상숭배 거절이 자신들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분명히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이들에게 사형이 찾아오다니 참으로 한이 서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조금도 불평함이나 억울함이나,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치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7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 주셨습니다.
이들을 포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던 군인들이 오히려 그 열기에 감당 못하여 즉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만 현재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음과 같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절대신앙을 가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렇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더 두려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범사 감사하는 신앙이 범사에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같은 신앙이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본문13-18절까지는 느브갓네살 왕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이 세 사람의 확고한 신앙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 친구는 갈대아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해 왕 앞에 불리워져 왕 앞으로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3:5-6절에 보니 왕의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유로 고소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느브갓네살 왕은 노하고 분하여 이 세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물어서 왕의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금 기회를 부여하면서 이 세 사람을 위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답변은 확고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풀무 불"과 "왕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절을 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분명한 대답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대답은 풀무 불 속에 들어갈 준비를 한 대답이요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대답이었습니다.
왕 앞에 호출되어 왕과 대면한 이 세 사람은 우상숭배냐 죽음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택합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준이 일반적인 사람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잠깐동안인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쏠려다니는 사람은 두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때문에 당장은 안전하고 평안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자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습니다.
급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세 친구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아도 변함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충성하겠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풀무 불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찌라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은 곧 고난이 계속 와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요 또 그 고난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신앙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수중에서 관할되는 줄 아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또한 히브리서11장에 나타나있는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 같이 믿는 신앙이다.
이 세 사람의 신앙은 자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를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며 비 진리와 타협하고 우상 앞에 절하게 되면 그 후로부터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며 기쁨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와 반면에 주님을 위하여 죽음과 고난을 택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죽음을 면케 하시고 고난을 견디게 해주시고 내세에 상급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둘째,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명확한 데로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있을찌라도 그 진리대로 살수 없다면 가장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약4:13-15)
넷째, 영원한 미래에 대한 부동의 신뢰이다.
이 세상에서 범해지고 있는 큰 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약한 자가 되어 염려하게되고 슬퍼하며 불안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 세상에서 평안함과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일은 상대방에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신뢰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일이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신뢰받기를 합당한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꾸준해야 합니다.
한결 같아야 합니다.
개인 날이건 궂은날이건 개의치 않고 주님을 따라 생활하는 것입니다.
주위환경이 어려울 찌라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따뜻한 미소를 줄 때는 물론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준다 할 찌라도, 두려운 말로써 우리를 낙담케 할 찌라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우리를 칠 찌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원망할 수도 불평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간다 할찌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감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쓴잔을 마시우면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구하는 생활뿐 아니라 드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능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려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르짖는 간구 소리에 응답하지 아니 하실 찌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읍시다.
이 땅의 축복이 내게 없을 찌라도 끝까지 우상숭배하지 말고 신앙을 지킵시다.
이 땅에서 상급이 없을 찌라도 맡은 일에 충성합시다.
나에게 눈에 보이는 표적이 따르지 않는다 해도 예수 믿은 것이 기적인줄 알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더 힘써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그리 아니 하실 자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언제나 나를 향한 신실한 사랑
우리를 향한 그 크신 사랑
우리가 함께 높이며 주를 찬양해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들도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원숙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한 바대로 잘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잘 안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식의 자기 중심적인 신앙관을 탈피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으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잔을 거두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신 다음, 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마26:39)
이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리 하실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었지만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여러분! 참되고 큰 신앙은 선한 결과를 낳습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금 신상에게 절했다면, 그들의 영혼은 타락했을 터이고, 또한 오히려 목숨과 지리까지 보장받지 못할 비참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경과 위기의 때에, 에스더의 신앙과도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굳센 신앙으로 대처했기에, 그 영혼도 살지고, 그 육신도 존귀하게되는 영육간의 축복된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신앙의 힘이요, 큰 신앙의 능력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 우리들도 순간순간 신앙의 결단을 해야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생과 사의 기로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때에, 당신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십니까
어떠한 신앙의 자세로 대처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순간의 이익이나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실패로서 끝내는 영육간에 실족하는 자리에 이르고 맙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죽든지 살든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결단을 내린다면, 당장은 역경과 어려움과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에 빠질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영육간에 승리하는 축복된 기쁨의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같은 심령으로 승리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자기 중심의 신앙의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어떤 역경의 처지에 있든지 결코 좌절하지 맙시다.
복 받기를 원하시는 분만 아멘 합시다.
자녀가 잘 되는 복, 재물이 풍족한 복, 장수의 복, 건강의 복 등 여러 가지 복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복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행복"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번영과 행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행복과 불행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구약에 나타난 복은 장수와 많은 자녀, 현숙한 아내, 많은 재산,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의 개념이 영적인 의미로 승화되어 구원, 믿음가운데 갖는 기쁨과 평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곧 복이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일 크고 좋은 복은 예수 믿는 것이 복이다.
정말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몇 군데를 찾아봅시다.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갈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엡1:3 찬송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히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 신령한 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지 않거나 삶에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돌봐줌을 받는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낙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실패해본 적이 없습니다. '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을 하게되면 그 책임을 여호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를 돌봐주시지 않아서 이와 같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 때문이야. 우리 형님 때문이야. 사회 때문이냐. 국가 때문이야' 하면서 핑계를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낭패를 당하고 좌절을 만나게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중에 나타난 다니엘의 신실한 믿음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낭패와 실망 밖에 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을 자랑하는 바베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바벨론은 몇년전 걸프전을 일으켜 제2의 바벨론을 꿈꾸었던 이라크 땅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 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어떤 명령인데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추상같은 명령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신앙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신실한 신앙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우상숭배 거절이 자신들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분명히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이들에게 사형이 찾아오다니 참으로 한이 서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조금도 불평함이나 억울함이나,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치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7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 주셨습니다.
이들을 포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던 군인들이 오히려 그 열기에 감당 못하여 즉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만 현재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음과 같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절대신앙을 가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렇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더 두려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범사 감사하는 신앙이 범사에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같은 신앙이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본문13-18절까지는 느브갓네살 왕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이 세 사람의 확고한 신앙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 친구는 갈대아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해 왕 앞에 불리워져 왕 앞으로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3:5-6절에 보니 왕의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유로 고소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느브갓네살 왕은 노하고 분하여 이 세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물어서 왕의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금 기회를 부여하면서 이 세 사람을 위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답변은 확고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풀무 불"과 "왕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절을 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분명한 대답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대답은 풀무 불 속에 들어갈 준비를 한 대답이요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대답이었습니다.
왕 앞에 호출되어 왕과 대면한 이 세 사람은 우상숭배냐 죽음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택합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준이 일반적인 사람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잠깐동안인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쏠려다니는 사람은 두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때문에 당장은 안전하고 평안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자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습니다.
급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세 친구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아도 변함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충성하겠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풀무 불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찌라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은 곧 고난이 계속 와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요 또 그 고난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신앙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수중에서 관할되는 줄 아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또한 히브리서11장에 나타나있는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 같이 믿는 신앙이다.
이 세 사람의 신앙은 자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를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며 비 진리와 타협하고 우상 앞에 절하게 되면 그 후로부터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며 기쁨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와 반면에 주님을 위하여 죽음과 고난을 택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죽음을 면케 하시고 고난을 견디게 해주시고 내세에 상급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둘째,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명확한 데로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있을찌라도 그 진리대로 살수 없다면 가장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약4:13-15)
넷째, 영원한 미래에 대한 부동의 신뢰이다.
이 세상에서 범해지고 있는 큰 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약한 자가 되어 염려하게되고 슬퍼하며 불안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 세상에서 평안함과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일은 상대방에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신뢰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일이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신뢰받기를 합당한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꾸준해야 합니다.
한결 같아야 합니다.
개인 날이건 궂은날이건 개의치 않고 주님을 따라 생활하는 것입니다.
주위환경이 어려울 찌라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따뜻한 미소를 줄 때는 물론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준다 할 찌라도, 두려운 말로써 우리를 낙담케 할 찌라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우리를 칠 찌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원망할 수도 불평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간다 할찌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감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쓴잔을 마시우면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구하는 생활뿐 아니라 드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능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려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르짖는 간구 소리에 응답하지 아니 하실 찌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읍시다.
이 땅의 축복이 내게 없을 찌라도 끝까지 우상숭배하지 말고 신앙을 지킵시다.
이 땅에서 상급이 없을 찌라도 맡은 일에 충성합시다.
나에게 눈에 보이는 표적이 따르지 않는다 해도 예수 믿은 것이 기적인줄 알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더 힘써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그리 아니 하실 자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언제나 나를 향한 신실한 사랑
우리를 향한 그 크신 사랑
우리가 함께 높이며 주를 찬양해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들도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원숙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한 바대로 잘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잘 안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식의 자기 중심적인 신앙관을 탈피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으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잔을 거두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신 다음, 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마26:39)
이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리 하실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었지만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여러분! 참되고 큰 신앙은 선한 결과를 낳습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금 신상에게 절했다면, 그들의 영혼은 타락했을 터이고, 또한 오히려 목숨과 지리까지 보장받지 못할 비참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경과 위기의 때에, 에스더의 신앙과도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굳센 신앙으로 대처했기에, 그 영혼도 살지고, 그 육신도 존귀하게되는 영육간의 축복된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신앙의 힘이요, 큰 신앙의 능력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 우리들도 순간순간 신앙의 결단을 해야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생과 사의 기로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때에, 당신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십니까
어떠한 신앙의 자세로 대처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순간의 이익이나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실패로서 끝내는 영육간에 실족하는 자리에 이르고 맙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죽든지 살든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결단을 내린다면, 당장은 역경과 어려움과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에 빠질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영육간에 승리하는 축복된 기쁨의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같은 심령으로 승리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자기 중심의 신앙의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어떤 역경의 처지에 있든지 결코 좌절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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