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장막절의 감사
본문
러시아 낙후된 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님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온 식구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 어린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 "아빠, 난 이 다음에 부자가 될래!"
"부자! 그것 참 좋지. 그런데 왜 갑자기 부자가 되고 싶니" 아버지는 아들이게 물었다.
아들이 뭐라고 대답하였겠는가 - "부자처럼 잘 먹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였다.
낙후된 선교 지역에서 가난에 쪼들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아이의 솔직한 고백이다.
얼마나 먹는 것이 한이 맺혔으면 '부자처럼 먹고 싶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했겠는가
이 아이 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누가 가난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 부자로 살기를 바란다.
배고프고 굶주리며 사는 것 보다, 배부르고 풍성하게 사는 것을 바란다.
없어져 초라하게 사는 것보다는 보다,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여유 있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잘살기를 바라지만, 분명한 것은 잘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행복은 잘 사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감사하는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은 온 백성이 바라는 대로 잘 사는 나라,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 백성들도 잘 살게 되었다. 온 나라가 잘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잘 살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떤가
8절 -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 "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내가' '나의' - 모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실로 부자라 -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고 있다.
일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어서 돈 벌고 재산이 많아지니까,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게 된다.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실력이 있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잘해서 -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고 있다.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있다.
본문에 이스라엘은 상고 가나안의 장사꾼같이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였다.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여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라 할만한 불의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이런 뻔뻔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였다.
교만이 무엇인가 - '내가'를 내세우는 것이 교만이다.
매사에 목에 힘을 주고 '내가' -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를 높이는 것이 교만이다.
모든 것에 '내가'를 내세우며 교만해진 이스라엘에게서는 감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내가 잘해서 부자가 되고, 내 능력으로 잘 살게 되었는데, 누구에게 감사하는가
교만에 해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었다.
성도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감사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없다.
올해도 어느 듯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은 없는가
올해도 내가 수고해서 돈을 벌고 집도 장만하고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마음이 드는 분은 없는가
IMF한파 이후 여러 가지로 경제사정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능력이 있어서 직장생활을 하고, 이 만큼 사업을 이루었다고 여겨지는 분은 없는가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내가 이렇게 주의 일을 했다고 여기는 분은 없는가
매사에 '내가' '내가'를 내세우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내세우는 교만한 사람이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능력으로 돈 벌고,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지혜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이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내가"라는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은 절대로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이요,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진정한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기를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10)
내가 수고하여 잘 살게 되었다고,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았다고 나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자랑하는 부나 명에 지위 업적 그 모든 것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5)
사도 배드로도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벧전1:24)고 하였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내가 쌓아 놓은 것이 무엇인가
- 그것이 사업이든, 가정이든, 부와 번영이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지며,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세우며,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결과는 교만이요 패망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내세우며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이 감사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교만하여 패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감사의 신앙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신다.
9절 -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를 내세우는 이스라엘에게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자꾸 "내가" "내가" 말하는 이스라엘에게 네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했다고 내세우는 모든 것은, 사실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애굽 땅에서 나왔는가
자기 힘과 능력으로 나왔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나왔다.
어떻게 광야 40년을 살았는가 자기들이 농사짓고 자기들이 수고해서 먹고 살았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물을 주셔서 살았다.
40도가 넘는 그 뜨거운 사막과 광야에서 어떻게 지낼 수가 있는가
자신들이 힘과 능력을 지냈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셔서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귀에게서 나를 구원하시고, 오늘까지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다.
올해도 우리가 여기까지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 가정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사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시련과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아니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질병과 불의의 사고 가운데서, 우리 식구들에게 생명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가
감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어리석고 둔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옛날, 신앙심이 돈독한 어떤 성주가 식사를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신하"들의 자세를 고치기로 하고, 한 거지를 식탁에 초청하여 마음껏 음식을 먹게 하였다.
거지는 분에 넘치는 식사를 마음껏 한 후, 성주의 배려에 한마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가버렸다.
이 모습을 본 신하들은 “저런,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구”라고 분개하면서 거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성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도 거지와 똑같소. 그대들도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있잖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신하들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닌가
거지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은 아닌가
이 민족이 잘 살게 된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이 만큼 살게 된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저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라는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은 거저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삶을 살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명절에 하던 것과 같이,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 명절일은 '장막절'을 의미한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친 후, 가나안 땅에서 가을에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린 절기이다.
광야에 초막을 세우고, 과거에 경험한 광야의 고생과 나그네로 장막 생활한 것을 기념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감사하면서, 일주일 동안 감사의 축제를 벌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막생활은 힘들고 고달프다. 매일 이동해야 하므로 천막을 거두어 짊어지고 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잠을 자기 위해서 다시 장막을 치는 일을, 날마다 계속 반복해야 하는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장막생활을 시키겠다는 것인가
그 중대한 이유는 - 감사생활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이 장막생활을 통해서 전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유하게 살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 보다, 초라하게 장막에 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원하셨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신앙이 있을 때, 올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또 다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 경제의 주축이었던 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구조 조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의 합병되거나 퇴출되므로,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농민들까지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사태를 바라보면서,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국가의 경제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가정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 나라가 두 번씩이나 이런 경제적 위기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제 구조가 잘못되어서인가 대 기업이 문어발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서인가
재무 구조와 경영이 부실해서인가 정부의 경제 정책의 실패 때문인가
다 옳은 생각이요, 나름대로 정확한 진단이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경제위기는 감사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권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민족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성도 여러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고난과 역경으로 탄식하며 한숨 쉴 수밖에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자.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여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자.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형통하든 불통하든, 내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자.
광야같은 세상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생수로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시며, 약속된 축복과 열매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두 마을이 있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한마을은 블평촌이었다.
블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망과 불평을 하였다.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구,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걱정을 했다.
담배 연기가 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서는 잠재적으로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다.
불평촌 사람들은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 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감사를 배웠다.
감사촌에서 하루 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블평촌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불평촌에 사는 사람은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기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한다.
감사촌은 바로 이스라엘처럼 장막에 거하는 것이다.
장막에 거하는 삶은 "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생활이다.
불평촌은 "내가"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라면, 감사촌은 바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혹시, 불평촌에 살고 있는 성도는 없는가 우리 모두 감사촌으로 이사 가자.
이제부터는 감사촌에 살면서,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온 식구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 어린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 "아빠, 난 이 다음에 부자가 될래!"
"부자! 그것 참 좋지. 그런데 왜 갑자기 부자가 되고 싶니" 아버지는 아들이게 물었다.
아들이 뭐라고 대답하였겠는가 - "부자처럼 잘 먹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였다.
낙후된 선교 지역에서 가난에 쪼들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아이의 솔직한 고백이다.
얼마나 먹는 것이 한이 맺혔으면 '부자처럼 먹고 싶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했겠는가
이 아이 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누가 가난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 부자로 살기를 바란다.
배고프고 굶주리며 사는 것 보다, 배부르고 풍성하게 사는 것을 바란다.
없어져 초라하게 사는 것보다는 보다,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여유 있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잘살기를 바라지만, 분명한 것은 잘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행복은 잘 사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감사하는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은 온 백성이 바라는 대로 잘 사는 나라,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 백성들도 잘 살게 되었다. 온 나라가 잘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잘 살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떤가
8절 -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 "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내가' '나의' - 모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실로 부자라 -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고 있다.
일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어서 돈 벌고 재산이 많아지니까,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게 된다.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실력이 있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잘해서 -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고 있다.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있다.
본문에 이스라엘은 상고 가나안의 장사꾼같이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였다.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여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라 할만한 불의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이런 뻔뻔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였다.
교만이 무엇인가 - '내가'를 내세우는 것이 교만이다.
매사에 목에 힘을 주고 '내가' -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를 높이는 것이 교만이다.
모든 것에 '내가'를 내세우며 교만해진 이스라엘에게서는 감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내가 잘해서 부자가 되고, 내 능력으로 잘 살게 되었는데, 누구에게 감사하는가
교만에 해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었다.
성도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감사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없다.
올해도 어느 듯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은 없는가
올해도 내가 수고해서 돈을 벌고 집도 장만하고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마음이 드는 분은 없는가
IMF한파 이후 여러 가지로 경제사정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능력이 있어서 직장생활을 하고, 이 만큼 사업을 이루었다고 여겨지는 분은 없는가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내가 이렇게 주의 일을 했다고 여기는 분은 없는가
매사에 '내가' '내가'를 내세우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내세우는 교만한 사람이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능력으로 돈 벌고,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지혜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이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내가"라는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은 절대로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이요,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진정한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기를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10)
내가 수고하여 잘 살게 되었다고,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았다고 나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자랑하는 부나 명에 지위 업적 그 모든 것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5)
사도 배드로도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벧전1:24)고 하였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내가 쌓아 놓은 것이 무엇인가
- 그것이 사업이든, 가정이든, 부와 번영이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지며,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세우며,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결과는 교만이요 패망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내세우며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이 감사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교만하여 패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감사의 신앙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신다.
9절 -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를 내세우는 이스라엘에게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자꾸 "내가" "내가" 말하는 이스라엘에게 네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했다고 내세우는 모든 것은, 사실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애굽 땅에서 나왔는가
자기 힘과 능력으로 나왔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나왔다.
어떻게 광야 40년을 살았는가 자기들이 농사짓고 자기들이 수고해서 먹고 살았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물을 주셔서 살았다.
40도가 넘는 그 뜨거운 사막과 광야에서 어떻게 지낼 수가 있는가
자신들이 힘과 능력을 지냈는가
-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셔서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귀에게서 나를 구원하시고, 오늘까지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다.
올해도 우리가 여기까지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 가정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사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시련과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아니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많은 질병과 불의의 사고 가운데서, 우리 식구들에게 생명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가
감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어리석고 둔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옛날, 신앙심이 돈독한 어떤 성주가 식사를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신하"들의 자세를 고치기로 하고, 한 거지를 식탁에 초청하여 마음껏 음식을 먹게 하였다.
거지는 분에 넘치는 식사를 마음껏 한 후, 성주의 배려에 한마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가버렸다.
이 모습을 본 신하들은 “저런,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구”라고 분개하면서 거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성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도 거지와 똑같소. 그대들도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있잖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신하들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닌가
거지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은 아닌가
이 민족이 잘 살게 된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이 만큼 살게 된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저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라는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은 거저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삶을 살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명절에 하던 것과 같이,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 명절일은 '장막절'을 의미한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친 후, 가나안 땅에서 가을에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린 절기이다.
광야에 초막을 세우고, 과거에 경험한 광야의 고생과 나그네로 장막 생활한 것을 기념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감사하면서, 일주일 동안 감사의 축제를 벌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막생활은 힘들고 고달프다. 매일 이동해야 하므로 천막을 거두어 짊어지고 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잠을 자기 위해서 다시 장막을 치는 일을, 날마다 계속 반복해야 하는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장막생활을 시키겠다는 것인가
그 중대한 이유는 - 감사생활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이 장막생활을 통해서 전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유하게 살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 보다, 초라하게 장막에 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원하셨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신앙이 있을 때, 올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또 다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 경제의 주축이었던 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구조 조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의 합병되거나 퇴출되므로,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농민들까지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사태를 바라보면서,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국가의 경제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가정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 나라가 두 번씩이나 이런 경제적 위기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제 구조가 잘못되어서인가 대 기업이 문어발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서인가
재무 구조와 경영이 부실해서인가 정부의 경제 정책의 실패 때문인가
다 옳은 생각이요, 나름대로 정확한 진단이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경제위기는 감사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권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민족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성도 여러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고난과 역경으로 탄식하며 한숨 쉴 수밖에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자.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여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자.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형통하든 불통하든, 내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자.
광야같은 세상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생수로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시며, 약속된 축복과 열매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두 마을이 있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한마을은 블평촌이었다.
블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망과 불평을 하였다.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구,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걱정을 했다.
담배 연기가 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서는 잠재적으로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다.
불평촌 사람들은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 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감사를 배웠다.
감사촌에서 하루 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블평촌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불평촌에 사는 사람은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기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한다.
감사촌은 바로 이스라엘처럼 장막에 거하는 것이다.
장막에 거하는 삶은 "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생활이다.
불평촌은 "내가"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라면, 감사촌은 바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혹시, 불평촌에 살고 있는 성도는 없는가 우리 모두 감사촌으로 이사 가자.
이제부터는 감사촌에 살면서,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