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감사는 환란의 입을 봉하고
본문
기도는 운명을 바꾸는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감사의 기도는 지옥과 같은 시험과 환란을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도 낙심의 잠을 자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어떤 장소에서든지 기도하는 사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물고기가 뱃속이라 할지라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하여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치 물고기 배속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냄새나고 끈적거리고, 칠흑같이 어두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백성, 감사하는 성도는 시험과 환란이 소화시켜 내지 못합니다.
질병이 문제가 우리를 삼켰다 할지라도 기도하는 백성, 감사하는 성도는 토하여 냅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 순복하는 성도, 마귀를 대적하는 성도는
죄를 이기고 시험과 환란을 이기고 사단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순복한다는 것은 내 생각, 내 고집, 내 주장, 내 경험, 내 감정을 버리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그분을 신뢰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말씀의 칼을 들고,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사단을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지만
사람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므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질병이 으르렁거립니다.
사고, 실패, 재난, 죽음의 공포가 굶주린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자의 입을 다니엘은 기도로 막았습니다. 감사로 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환란의 입을 봉하고 고통의 굴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본문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직면한 위기로부터 그 문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① 3절 - 왕이 다니엘을 최고 총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언제나 사탄은 우리가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방해작전을 펼칩니다.
② 둘째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사 형통해야 할 터인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사자굴 속에 던져집니다.
잘 믿어 보겠다는 것이 오히려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릎 꿇는 다니엘, 감사하는 다니엘 앞에 굶주린 사자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를 모함했던 원수들을 사자가 찢어 삼켰고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24절)
다니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그토록 귀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셨더란 말입니까
① 3절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른 번역서에 보면 “그 마음에 놀라운 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장 9절에 보면 이방 왕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하여 다니엘을 향한 고백이 나옵니다.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구나”
5장 11절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는 사람, 예수 정신으로 충만했던 사람,
성령의 감동이 넘쳤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② 4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아무 틈이 없었다. 아무 허물이 없었다. 아무 그릇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③ 10절 - 자신의 생명보다 기도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 무엇,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될 터인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성전을 사모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습관을 허물지 아니했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변해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한가지 가치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 주님과 가지는 아름다운 교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향기 나는 봄이나 외론 가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 나의 신앙과 나의 기도를 잃지 않겠다.
체질화된 기도의 사람, 체질화된 감사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④ 다니엘은 그토록 절박했던 상황 속에서 생에 최고의 위기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목숨을 구걸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기도, 차원 높은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여기 누군가 나에게 한가지만 더 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감사를 플러스(+)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으로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한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한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 신앙으로
수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으로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
간절한 기원은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나 나눔이 없는 신앙은 샤머니즘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노래는 불려질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은 표현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진정한 축복일 수가 없다. ”
그렇습니다. 성경은 물질적인 여유로움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을 때,
작은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때,
그것을 일컬어 축복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여유롭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물질적인 여유로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 때문에 재능과 경험, 자신의 힘 때문에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바로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하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 조건적인 감사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1차원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사업이 잘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성공하고 만사가 순조롭게 풀렸기 때문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는 감사입니다.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당연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이 당연한 감사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유로운 환경을 주었습니까
그 환경을 감사할 때에 그 환경은 내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내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걸음걸음 함께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 구 창고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려서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애원할 때마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옆 창고로 인도해 가는데 보니까 더 큰 창고가 있는데
보화가 하늘 천장까지 가득히 쌓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환란과 시험, 역경을 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있다고 감사하면 없다고 원망하게 됩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하면 다시 아프면 또 다시 원망하게됩니다.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그 사업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차원 높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감사를 배워야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령한 감사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6장 말씀을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보십시다.
유다 족속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로 끌려간 젊은이 가운데 다니엘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원망했습니다. 불평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낙담했습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관리로 등용이 됩니다.
진실하게 나라를 섬겼습니다. 이웃을 섬겼습니다. 점점 높아져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리오 임금은 그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120명의 방백을 두었고
또 그들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청년들은 걸핏하면 사치했고 방종했고 방만했습니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다니엘을 총리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여서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다른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했습니다.
다니엘의 허물을 찾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그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꾀를 내었습니다. 임금님을 찾아갔습니다.
임금이여 앞으로 우리에게 임금님에 대한 충성에 군기를 세우기 위해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앞으로 30일 동안 이 나라 어떤 관리든지 백성이든지
임금 외에 그 누구에게 절하든지 간구하든지 기도하든지 하면 사자굴 속에 집어넣기로 합시다.
이것이 임금을 향한 충성이라 여겨져서 어인을 찍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이 조서가 무엇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전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 걸어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인 즉, 원수에 대한 원망이나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억울한 모함을 받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처참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문제가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인 감사였습니다. 신령한 감사였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 목사님이 으슥한 길을 걸어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맞았던지 초죽음이 되었고 피투성이가 되었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염려가운데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교우들이 울며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들의 손을 붙들고 매튜 헨리 목사님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제게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생명을 살려주셔서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들을 보고 손 붙들어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고 하면 저들보다 더 끔찍한 강도가 되었을 터인데
나는 예수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니 주여 감사합니다. "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다 당하는 고난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음모를 퇴치할 만한 힘이나 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흥망성쇠의 열쇠를 움켜쥐시는 분은 전능하신 내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의 감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환란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날름거립니까
자녀들이, 남편이, 사업이 사자굴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까
감사를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환란의 입을 봉하고 고통의 굴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시험과 역경이 감사하는 백성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하여 냅니다.
매맞고 피흘리고 감옥에 갇혔다 할지라도 문제의 족쇄가 풀려집니다.
굳게 닫혔던 인생 앞길의 문이 열립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특히 감사의 기도는 지옥과 같은 시험과 환란을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도 낙심의 잠을 자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어떤 장소에서든지 기도하는 사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물고기가 뱃속이라 할지라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하여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치 물고기 배속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냄새나고 끈적거리고, 칠흑같이 어두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백성, 감사하는 성도는 시험과 환란이 소화시켜 내지 못합니다.
질병이 문제가 우리를 삼켰다 할지라도 기도하는 백성, 감사하는 성도는 토하여 냅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 순복하는 성도, 마귀를 대적하는 성도는
죄를 이기고 시험과 환란을 이기고 사단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순복한다는 것은 내 생각, 내 고집, 내 주장, 내 경험, 내 감정을 버리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그분을 신뢰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말씀의 칼을 들고,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사단을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지만
사람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므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질병이 으르렁거립니다.
사고, 실패, 재난, 죽음의 공포가 굶주린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자의 입을 다니엘은 기도로 막았습니다. 감사로 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환란의 입을 봉하고 고통의 굴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본문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직면한 위기로부터 그 문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① 3절 - 왕이 다니엘을 최고 총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언제나 사탄은 우리가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방해작전을 펼칩니다.
② 둘째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사 형통해야 할 터인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사자굴 속에 던져집니다.
잘 믿어 보겠다는 것이 오히려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릎 꿇는 다니엘, 감사하는 다니엘 앞에 굶주린 사자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를 모함했던 원수들을 사자가 찢어 삼켰고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24절)
다니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그토록 귀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셨더란 말입니까
① 3절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른 번역서에 보면 “그 마음에 놀라운 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장 9절에 보면 이방 왕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하여 다니엘을 향한 고백이 나옵니다.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구나”
5장 11절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는 사람, 예수 정신으로 충만했던 사람,
성령의 감동이 넘쳤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② 4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아무 틈이 없었다. 아무 허물이 없었다. 아무 그릇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③ 10절 - 자신의 생명보다 기도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 무엇,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될 터인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성전을 사모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습관을 허물지 아니했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변해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한가지 가치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 주님과 가지는 아름다운 교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향기 나는 봄이나 외론 가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 나의 신앙과 나의 기도를 잃지 않겠다.
체질화된 기도의 사람, 체질화된 감사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④ 다니엘은 그토록 절박했던 상황 속에서 생에 최고의 위기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목숨을 구걸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기도, 차원 높은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여기 누군가 나에게 한가지만 더 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감사를 플러스(+)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으로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한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한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 신앙으로
수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으로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
간절한 기원은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나 나눔이 없는 신앙은 샤머니즘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노래는 불려질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은 표현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진정한 축복일 수가 없다. ”
그렇습니다. 성경은 물질적인 여유로움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을 때,
작은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때,
그것을 일컬어 축복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여유롭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물질적인 여유로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 때문에 재능과 경험, 자신의 힘 때문에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바로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하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 조건적인 감사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1차원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사업이 잘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성공하고 만사가 순조롭게 풀렸기 때문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는 감사입니다.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당연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이 당연한 감사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유로운 환경을 주었습니까
그 환경을 감사할 때에 그 환경은 내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내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걸음걸음 함께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 구 창고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려서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애원할 때마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옆 창고로 인도해 가는데 보니까 더 큰 창고가 있는데
보화가 하늘 천장까지 가득히 쌓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환란과 시험, 역경을 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있다고 감사하면 없다고 원망하게 됩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하면 다시 아프면 또 다시 원망하게됩니다.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그 사업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차원 높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감사를 배워야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령한 감사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6장 말씀을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보십시다.
유다 족속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로 끌려간 젊은이 가운데 다니엘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원망했습니다. 불평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낙담했습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관리로 등용이 됩니다.
진실하게 나라를 섬겼습니다. 이웃을 섬겼습니다. 점점 높아져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리오 임금은 그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120명의 방백을 두었고
또 그들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청년들은 걸핏하면 사치했고 방종했고 방만했습니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다니엘을 총리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여서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다른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했습니다.
다니엘의 허물을 찾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그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꾀를 내었습니다. 임금님을 찾아갔습니다.
임금이여 앞으로 우리에게 임금님에 대한 충성에 군기를 세우기 위해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앞으로 30일 동안 이 나라 어떤 관리든지 백성이든지
임금 외에 그 누구에게 절하든지 간구하든지 기도하든지 하면 사자굴 속에 집어넣기로 합시다.
이것이 임금을 향한 충성이라 여겨져서 어인을 찍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이 조서가 무엇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전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 걸어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인 즉, 원수에 대한 원망이나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억울한 모함을 받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처참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문제가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인 감사였습니다. 신령한 감사였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 목사님이 으슥한 길을 걸어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맞았던지 초죽음이 되었고 피투성이가 되었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염려가운데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교우들이 울며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들의 손을 붙들고 매튜 헨리 목사님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제게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생명을 살려주셔서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들을 보고 손 붙들어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고 하면 저들보다 더 끔찍한 강도가 되었을 터인데
나는 예수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니 주여 감사합니다. "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다 당하는 고난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음모를 퇴치할 만한 힘이나 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흥망성쇠의 열쇠를 움켜쥐시는 분은 전능하신 내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의 감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환란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날름거립니까
자녀들이, 남편이, 사업이 사자굴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까
감사를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환란의 입을 봉하고 고통의 굴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시험과 역경이 감사하는 백성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하여 냅니다.
매맞고 피흘리고 감옥에 갇혔다 할지라도 문제의 족쇄가 풀려집니다.
굳게 닫혔던 인생 앞길의 문이 열립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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