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그래도 감사
본문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빌립보 지역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한 여종을 고쳐준 적이 있습니다. 그 여종은 주인들이 많았습니다. 점을 쳐서 얻은 수입은 고스란히 주인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향해“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여러 날을 따라다니며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자 여종을 괴롭혔던 귀신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용한 점쟁이가 귀신이 떠나버리자 점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점을 못 치니까 돈을 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고발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것이라고는 귀신에게 고통당하는 한 여종을 자유하게 해준 것이 전부입니다. 이들이 이 지역에 온 것은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고사하고 이국땅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억울하고 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간수와 죄수들이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지진으로 옥터를 움직여 감옥 문을 열게 했고, 죄수들의 매인 것들이 다 풀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간수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여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이 탈옥을 하면 간수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도로 죄수들은 도망가지 않았고, 자결하려는 간수를 향해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외쳤습니다. 간수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옥문과 죄수들의 차꼬는 열렸으나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음을 보고 들어올 때부터 주목했던 바울 앞으로 달려가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말합니다. 그 때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이 일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복음전하다가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갔지만, 감사하며 찬양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구약의 선지자 하바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찬양입니다. 하바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여 불법이 무성한 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였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를 통해 남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박국 또다시 불평불만을 합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하심이 가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악하고 타락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는 하나의 도구일 뿐 그들의 심판도 속이 이른다고 말하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합2:3-4)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하박국 선지자는 불평하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감사와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바로 감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란 만족을 의미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의 삶과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라고 마음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다가도 어느 새 나쁜 일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프고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먼저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은 곧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환경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노예로, 보디발 가정의 총무로, 억울하게 들어간 감옥이란 환경도 요셉의 삶을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환경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요셉의 삶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고 고백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 온 바울과 실라가 관리들의 부패와 자신들의 정당함을 죄수들에게 말하며 불평불만을 했다면, 옥터가 움직이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를 구원하여 빌립보 교회의 주축 멤버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교회를 세우고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와 찬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는 첫 추수인 보리를 수확한 것에 감사한 것입니다. 도시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반년이라는 시간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을 좀더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신하들의 간계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단6:10)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로 권면하기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했습니다.
결국 감사는 곧 삶이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워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슬프고 나쁜 일이 주어저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움 삶이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드려지는 우리의 감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감사는 축복입니다.
성도의 삶은 곧 감사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성도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불의 관계입니다. 감사가 없는 성도는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요셉이나 다니엘,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사라는 통로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곧 축복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날마다 누리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비록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축복이 없을지라도 축복의 근원이시고 주체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바국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축복은 없어도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그리고 양과 소도 이들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이들에게 재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삶이요,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이것들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요, 절망입니다. 그런데 하바국은 이것들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6개월을 돌아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우리 가정에, 직장과 사업장에 베풀어주신 크고 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선물보다 더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축복이요 행복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원래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불평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왜 하와를 만들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냐고 불평했습니다.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뱀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불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존재가 곧 타락한 인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회복하여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한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은 감사라는 통로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향해“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여러 날을 따라다니며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자 여종을 괴롭혔던 귀신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용한 점쟁이가 귀신이 떠나버리자 점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점을 못 치니까 돈을 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고발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것이라고는 귀신에게 고통당하는 한 여종을 자유하게 해준 것이 전부입니다. 이들이 이 지역에 온 것은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고사하고 이국땅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억울하고 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간수와 죄수들이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지진으로 옥터를 움직여 감옥 문을 열게 했고, 죄수들의 매인 것들이 다 풀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간수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여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이 탈옥을 하면 간수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도로 죄수들은 도망가지 않았고, 자결하려는 간수를 향해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외쳤습니다. 간수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옥문과 죄수들의 차꼬는 열렸으나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음을 보고 들어올 때부터 주목했던 바울 앞으로 달려가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말합니다. 그 때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이 일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복음전하다가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갔지만, 감사하며 찬양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구약의 선지자 하바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찬양입니다. 하바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여 불법이 무성한 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였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를 통해 남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박국 또다시 불평불만을 합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하심이 가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악하고 타락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는 하나의 도구일 뿐 그들의 심판도 속이 이른다고 말하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합2:3-4)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하박국 선지자는 불평하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감사와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바로 감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란 만족을 의미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의 삶과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라고 마음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다가도 어느 새 나쁜 일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프고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먼저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은 곧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환경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노예로, 보디발 가정의 총무로, 억울하게 들어간 감옥이란 환경도 요셉의 삶을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환경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요셉의 삶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고 고백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 온 바울과 실라가 관리들의 부패와 자신들의 정당함을 죄수들에게 말하며 불평불만을 했다면, 옥터가 움직이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를 구원하여 빌립보 교회의 주축 멤버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교회를 세우고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와 찬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는 첫 추수인 보리를 수확한 것에 감사한 것입니다. 도시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반년이라는 시간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을 좀더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신하들의 간계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단6:10)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로 권면하기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했습니다.
결국 감사는 곧 삶이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워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슬프고 나쁜 일이 주어저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움 삶이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드려지는 우리의 감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감사는 축복입니다.
성도의 삶은 곧 감사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성도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불의 관계입니다. 감사가 없는 성도는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요셉이나 다니엘,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사라는 통로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곧 축복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날마다 누리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비록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축복이 없을지라도 축복의 근원이시고 주체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바국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축복은 없어도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그리고 양과 소도 이들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이들에게 재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곧 삶이요,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이것들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요, 절망입니다. 그런데 하바국은 이것들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6개월을 돌아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우리 가정에, 직장과 사업장에 베풀어주신 크고 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선물보다 더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축복이요 행복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원래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불평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왜 하와를 만들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냐고 불평했습니다.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뱀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불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존재가 곧 타락한 인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회복하여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한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은 감사라는 통로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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