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오직 감사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감사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감사하는 모습을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의 척도를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를 처음 만들었던 요한 웨슬리는 감사를 가리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숙한 기독교인과 미숙한 기독교인의 차이점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까 미숙한 성도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 때만 ‘내가 복을 받았다. ’고 자랑하면서 감사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조그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불평하고 낙심하기를 잘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만 감사하려고 한다면 결국 감사보다는 불평에 더 매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아파트를 샀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얼마나 감사한지 교인들을 초청하여 예배도 드리고 크게 잔치도 벌립니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가 새로 아파트를 샀다고 가보니, 자기 집과 똑같은 평수인데 너무나 화려하여 가히 환상적입니다. 그에 비하면 자기 아파트는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에 속이 상합니다. 또한 어느 엄마는 남편도 ‘나 몰라라’하면서 오직 자녀들을 위해 밤낮 없이 열심히 뒷바라지 합니다. 심지어 어느 엄마는 남편을 한국에 기러기 아빠로 놓아두고 자녀들의 조기교육을 위해서 외국에 나가 삽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자녀를 위해 애쓴 결과,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얼마나 보람을 느낄까요 그러나 내 품에 있을 때 자식이지, 둥지를 떠나 결혼하고 나면 며느리나 사위에게 뺏긴 기분이 듭니다. 닭 좇던 개처럼 느껴져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면 돈이라도 왕창 많아지면 날마다 감사할 것 같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한양의대 신경정신과 유완상박사가 서울시 거주 주부 5백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논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주부일수록 더 많은 스트레스에 싸인다고 했습니다. 즉, 주부 4백14명을 가구 소득에 따라 조사해 보니 월 100만 원 이하가 98명, 100만-200만 원이 1백99명, 200만 원 이상 1백17명이었는데 월 소득 100만 원 이하가 받는 스트레스는 114점인 반면, 200만 원 이상 받는 주부가 148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돈이 많아질수록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커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욕심은 끝도 없기에 만족보다는 가질수록 점점 불만도 높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구분이 없이 감사합니다. ‘전천후 감사’, ‘오직 감사’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는 주전 700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당시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악인들이 의인을 못살게 구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의로운 사람이 고달프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부르짖어 기도드렸습니다. 그 때에 응답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를 일으켜 너희 나라 사람을 징벌하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한 음성을 듣는 순간 하박국 선지자는 놀라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히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는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계시를 받게 될 때 하박국 선지자는 “내 창자가 흔들렸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령 깊은 곳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두려움 때문에 입술이 떨려서 이런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뼈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날 기도하는 도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에 대한 계시와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즈음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북한 핵실험 때문에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교회들의 힘을 결집하여 시청 집회 같은 곳에 모여 강력 대응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분이 가상적인 글을 쓰기를 “미군이 참전하면 우리나라가 이길 확률은 90%입니다. 하지만 미군이 참전하는 데까지는 약 5일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나라는 초토화될지 모릅니다. 또한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피난도 가기도 전에 모두 죽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겨도 우리나라가 반쯤 황폐화 되었을 때 전쟁이 끝나겠죠.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러한 전쟁의 경보와 더불어 보여준 전쟁의 참사가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고 했습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적군들이 완전히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참담한 모습입니다.
원래 중동지방의 침략자들은 침략하면 과수나무를 다 잘라서 불살라버립니다. 다시는 저들이 먹고 살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양식으로, 포도나무는 음료수로, 감람나무는 기름을 짜서 먹는 나무들인데 이것이 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다고 생각해 보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바국 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역경의 날에 감사했습니다. 18절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바로 이런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숙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잃는 날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이요, 감사입니다.
오직 환경이야 어떻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는 ‘전천후 감사’, ‘오직 감사’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사업이 부도로 망하고, 재산을 다 날리고, 직장도 잃고,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여 처자식이 배고파할지라도 감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과 감사를 가졌던 분들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의 금 신상을 세워 거기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감히 어길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만은 끝까지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왕은 그 젊은이들이 너무나 아까워서 간곡하게 달랬습니다.
“너희가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다. ”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은 담대히 대답하기를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실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신앙이요, 감사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는 그 참담한 환경에서 어떻게 오직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까
1. 하박국 선지자는 성도의 고난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오직 감사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 요시야 왕 말기에 유다 나라에 만연한 불의를 보고 탄식하며 기도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왔습니다. 이제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라는 채찍을 통해서 불신앙과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을 받는 사랑의 대상이시기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듯이, 잘못할 때는 책망과 매를 통해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욥과 같이 더 견고한 신앙과 단련되고 연단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내시기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처음에는 민족이 당할 시련과 고난 때문에 너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의로 치닫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가하심으로 회개하여 모든 불신앙과 우상을 버리고 거룩한 신앙의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거룩한 섭리와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이런 감사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 감사 합니다. 그로 인해 저의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지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틀어지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했던 행실을 발견합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고 부모와 친구가 짐처럼 버겁게 되는 것도 감사합니다. 사람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먹는 빵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절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깨닫습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능성이 있음을 압니다. ”
유명한 전도자 존 하갈 목사님의 아들이 1950년 갑자기 뇌성마비로 쓰러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목사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아들의 병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저 아들로 인하여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고 남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내 아들처럼 병고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왜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음으로 저도 오직 감사하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옵소서. ”라고 기도해 보십시요. 그러면 어느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고 오직 감사했습니다.
본문 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고 했습니다. 과연, 강대국이 침범하여 조국 유대는 너무나 참담한 날이 될 것이요, 굶어 죽는 백성들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18절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 품이나 등에 업히어 있으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깊은 산속을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곳에 있더라도 새큰새큰 코를 골며 잡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항상 때를 따라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아플 때에 간호해 줄 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는 것을 가장 감사해야 합니다. 죽음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니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때를 따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물이 없을 때는 바위에서 생수가 터지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무서운 날에도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시니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다니엘이 3일 동안 굶은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특별보호 받게 하시고 그의 세 친구들이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는 시련의 날에도 머리 터럭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이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함에도 이런 시련을 주셨다고 낙심하거나 불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는 연고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형편에 처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고 감사할 때에 강하게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순경의 날이나 역경의 날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권희로란 분의 예화집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믿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가 방황하다가 밤이 되니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창문밖에 서성이는데 아내도 마음이 곤고한지 찬송가를 부르기를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라 했습니다.
남편이 큰 감동을 받고 문으로 들어가면서 응답의 찬송을 부르기를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오랜만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찬송을 부르기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면서 어느덧 아내가 남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부부는 평소에 늘 믿음 안에 살면서 감사의 삶, 찬송의 삶을 살았던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잠시 시험을 만났을지라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순경이나 역경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기에 오직 감사했습니다.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슴’은 매우 재빠르고 힘찬 활동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나의 높은 곳’이란 승리자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19절은 유다 백성들이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 승리자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예언대로 앗수르나 바벨론은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유대 민족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 나라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심으로 세계 중심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고난 받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승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을 고난의 굴속에 던져 넣으심으로 사자의 입을 봉하는 역사를 만나게 하신 후에 결국 모함하던 자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다니엘과 유대 백성들이 승리하게 만드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불 속에 던져짐으로 패배한 것 같았으나 조금도 상하지 않고 구출 받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왕이나 그 신하들에게 보여줌으로 왕이 그들과 유대 백성들을 더 존귀히 여기게 되었고 신앙생활도 자유롭게 하도록 법령을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신앙의 대표자가 있다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려드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고난들은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찾아가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요셉은 나중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벌벌 떠는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게 하셨습니다. ”라면서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볼 때는 불행자요, 낙오자 같았으나 그 모든 고통과 환란과 불행이 종합 되었을 때에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패나 성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고 내일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의 문은 성공의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열쇠로 더 큰 행복의 문을 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됩니까
스스로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오직 감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오직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불행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지름길로 만드시고 그 고난이 성공이 가는 되는 디딤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동쪽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구가 작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른바 사생아였습니다. 이 아기가 세 살이 되었을 때에, 그 마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벤 후퍼와 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든 아이들이 벤 후퍼를 놀려대고, 비웃고,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는 정말로 외롭게 소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느 사람이든지 그대로 받아주며 비난하지 않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벤 후퍼는 그 때까지 교회에 가본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오셨다는 그 젊은 목사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교회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는 했지만 일부러 늦게 가서 살며시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를 할 때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주 동안을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에 벤 후퍼가 너무나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넋을 잃고 있다보니 축도도 끝나고 예배가 다 끝났습니다. 나오려고 하니 사람들이 벌써 통로에 쭉 서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목사님과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는 그가 가장 아파하는 질문인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고 물었습니다. 벤 후퍼는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면서 말하기를 “그래, 나는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겠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 ”라고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굳은 표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말하기를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 벤 후퍼가 당황하며 빠져나가는데, 목사님은 그의 등을 향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동네 출신 한사람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바로 벤 후퍼였습니다.
그는 훗날에 말하기를 “그 날,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날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말을 듣는 날부터 큰 감동을 받으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행의 구덩이에서 나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 세상은 점점 감사보다는 불만이 높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뿐 아니라 역경 중에도 감사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성숙한 신자로 인정하시고 더 큰 감사를 주시는 줄 믿으시고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 줄 믿고 오직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조그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불평하고 낙심하기를 잘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만 감사하려고 한다면 결국 감사보다는 불평에 더 매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아파트를 샀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얼마나 감사한지 교인들을 초청하여 예배도 드리고 크게 잔치도 벌립니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가 새로 아파트를 샀다고 가보니, 자기 집과 똑같은 평수인데 너무나 화려하여 가히 환상적입니다. 그에 비하면 자기 아파트는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에 속이 상합니다. 또한 어느 엄마는 남편도 ‘나 몰라라’하면서 오직 자녀들을 위해 밤낮 없이 열심히 뒷바라지 합니다. 심지어 어느 엄마는 남편을 한국에 기러기 아빠로 놓아두고 자녀들의 조기교육을 위해서 외국에 나가 삽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자녀를 위해 애쓴 결과,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얼마나 보람을 느낄까요 그러나 내 품에 있을 때 자식이지, 둥지를 떠나 결혼하고 나면 며느리나 사위에게 뺏긴 기분이 듭니다. 닭 좇던 개처럼 느껴져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면 돈이라도 왕창 많아지면 날마다 감사할 것 같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한양의대 신경정신과 유완상박사가 서울시 거주 주부 5백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논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주부일수록 더 많은 스트레스에 싸인다고 했습니다. 즉, 주부 4백14명을 가구 소득에 따라 조사해 보니 월 100만 원 이하가 98명, 100만-200만 원이 1백99명, 200만 원 이상 1백17명이었는데 월 소득 100만 원 이하가 받는 스트레스는 114점인 반면, 200만 원 이상 받는 주부가 148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돈이 많아질수록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커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욕심은 끝도 없기에 만족보다는 가질수록 점점 불만도 높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구분이 없이 감사합니다. ‘전천후 감사’, ‘오직 감사’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는 주전 700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당시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악인들이 의인을 못살게 구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의로운 사람이 고달프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부르짖어 기도드렸습니다. 그 때에 응답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를 일으켜 너희 나라 사람을 징벌하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한 음성을 듣는 순간 하박국 선지자는 놀라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히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는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계시를 받게 될 때 하박국 선지자는 “내 창자가 흔들렸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령 깊은 곳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두려움 때문에 입술이 떨려서 이런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뼈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날 기도하는 도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에 대한 계시와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즈음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북한 핵실험 때문에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교회들의 힘을 결집하여 시청 집회 같은 곳에 모여 강력 대응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분이 가상적인 글을 쓰기를 “미군이 참전하면 우리나라가 이길 확률은 90%입니다. 하지만 미군이 참전하는 데까지는 약 5일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나라는 초토화될지 모릅니다. 또한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피난도 가기도 전에 모두 죽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겨도 우리나라가 반쯤 황폐화 되었을 때 전쟁이 끝나겠죠.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러한 전쟁의 경보와 더불어 보여준 전쟁의 참사가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고 했습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적군들이 완전히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참담한 모습입니다.
원래 중동지방의 침략자들은 침략하면 과수나무를 다 잘라서 불살라버립니다. 다시는 저들이 먹고 살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양식으로, 포도나무는 음료수로, 감람나무는 기름을 짜서 먹는 나무들인데 이것이 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다고 생각해 보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바국 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역경의 날에 감사했습니다. 18절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바로 이런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숙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잃는 날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이요, 감사입니다.
오직 환경이야 어떻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는 ‘전천후 감사’, ‘오직 감사’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사업이 부도로 망하고, 재산을 다 날리고, 직장도 잃고,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여 처자식이 배고파할지라도 감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과 감사를 가졌던 분들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의 금 신상을 세워 거기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감히 어길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만은 끝까지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왕은 그 젊은이들이 너무나 아까워서 간곡하게 달랬습니다.
“너희가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다. ”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은 담대히 대답하기를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실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신앙이요, 감사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는 그 참담한 환경에서 어떻게 오직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까
1. 하박국 선지자는 성도의 고난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오직 감사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 요시야 왕 말기에 유다 나라에 만연한 불의를 보고 탄식하며 기도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왔습니다. 이제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라는 채찍을 통해서 불신앙과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을 받는 사랑의 대상이시기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듯이, 잘못할 때는 책망과 매를 통해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욥과 같이 더 견고한 신앙과 단련되고 연단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내시기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처음에는 민족이 당할 시련과 고난 때문에 너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의로 치닫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가하심으로 회개하여 모든 불신앙과 우상을 버리고 거룩한 신앙의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거룩한 섭리와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이런 감사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 감사 합니다. 그로 인해 저의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지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틀어지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했던 행실을 발견합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고 부모와 친구가 짐처럼 버겁게 되는 것도 감사합니다. 사람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먹는 빵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절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깨닫습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능성이 있음을 압니다. ”
유명한 전도자 존 하갈 목사님의 아들이 1950년 갑자기 뇌성마비로 쓰러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목사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아들의 병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저 아들로 인하여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고 남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내 아들처럼 병고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왜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음으로 저도 오직 감사하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옵소서. ”라고 기도해 보십시요. 그러면 어느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고 오직 감사했습니다.
본문 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고 했습니다. 과연, 강대국이 침범하여 조국 유대는 너무나 참담한 날이 될 것이요, 굶어 죽는 백성들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18절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 품이나 등에 업히어 있으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깊은 산속을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곳에 있더라도 새큰새큰 코를 골며 잡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항상 때를 따라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아플 때에 간호해 줄 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는 것을 가장 감사해야 합니다. 죽음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니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때를 따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물이 없을 때는 바위에서 생수가 터지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무서운 날에도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시니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다니엘이 3일 동안 굶은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특별보호 받게 하시고 그의 세 친구들이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는 시련의 날에도 머리 터럭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이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함에도 이런 시련을 주셨다고 낙심하거나 불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는 연고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형편에 처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고 감사할 때에 강하게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순경의 날이나 역경의 날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권희로란 분의 예화집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믿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가 방황하다가 밤이 되니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창문밖에 서성이는데 아내도 마음이 곤고한지 찬송가를 부르기를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라 했습니다.
남편이 큰 감동을 받고 문으로 들어가면서 응답의 찬송을 부르기를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오랜만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찬송을 부르기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면서 어느덧 아내가 남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부부는 평소에 늘 믿음 안에 살면서 감사의 삶, 찬송의 삶을 살았던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잠시 시험을 만났을지라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순경이나 역경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기에 오직 감사했습니다.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슴’은 매우 재빠르고 힘찬 활동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나의 높은 곳’이란 승리자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19절은 유다 백성들이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 승리자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예언대로 앗수르나 바벨론은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유대 민족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 나라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심으로 세계 중심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고난 받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승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을 고난의 굴속에 던져 넣으심으로 사자의 입을 봉하는 역사를 만나게 하신 후에 결국 모함하던 자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다니엘과 유대 백성들이 승리하게 만드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불 속에 던져짐으로 패배한 것 같았으나 조금도 상하지 않고 구출 받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왕이나 그 신하들에게 보여줌으로 왕이 그들과 유대 백성들을 더 존귀히 여기게 되었고 신앙생활도 자유롭게 하도록 법령을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신앙의 대표자가 있다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려드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고난들은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찾아가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요셉은 나중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벌벌 떠는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게 하셨습니다. ”라면서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볼 때는 불행자요, 낙오자 같았으나 그 모든 고통과 환란과 불행이 종합 되었을 때에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패나 성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고 내일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의 문은 성공의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열쇠로 더 큰 행복의 문을 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됩니까
스스로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오직 감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오직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불행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지름길로 만드시고 그 고난이 성공이 가는 되는 디딤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동쪽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구가 작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른바 사생아였습니다. 이 아기가 세 살이 되었을 때에, 그 마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벤 후퍼와 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든 아이들이 벤 후퍼를 놀려대고, 비웃고,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는 정말로 외롭게 소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느 사람이든지 그대로 받아주며 비난하지 않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벤 후퍼는 그 때까지 교회에 가본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오셨다는 그 젊은 목사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교회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는 했지만 일부러 늦게 가서 살며시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를 할 때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주 동안을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에 벤 후퍼가 너무나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넋을 잃고 있다보니 축도도 끝나고 예배가 다 끝났습니다. 나오려고 하니 사람들이 벌써 통로에 쭉 서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목사님과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는 그가 가장 아파하는 질문인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고 물었습니다. 벤 후퍼는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면서 말하기를 “그래, 나는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겠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 ”라고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굳은 표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말하기를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 벤 후퍼가 당황하며 빠져나가는데, 목사님은 그의 등을 향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동네 출신 한사람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바로 벤 후퍼였습니다.
그는 훗날에 말하기를 “그 날,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날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말을 듣는 날부터 큰 감동을 받으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행의 구덩이에서 나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 세상은 점점 감사보다는 불만이 높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뿐 아니라 역경 중에도 감사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성숙한 신자로 인정하시고 더 큰 감사를 주시는 줄 믿으시고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 줄 믿고 오직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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