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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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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설교가 스펄천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한 번은 어떤 젊은 형제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매우 불만스럽고 또 언짢은 표정이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좋은 교회가 없을까요 정말 좋은 교회 하나 소개해 주세요. 지금의 교회는 너무 불평스러운게 많습니다. 마음의 상처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도무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이 때 스펄천 목사님 특유의 웃음으로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했습니다.
"글세, 그런 교회가 있을까요 그런 교회가 있다면 나도 가고 싶소. 혹시 그런 교회를 찾거들랑 혼자 가지 말고 꼭 나를 데리고 가 주오. 나도 그런 교회 신자가 되고 싶소. " 그리고 나서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그 젊은 형제에게 다시 말합니다. "형제여. 형제가 혹시 그런 교회를 찾을지라도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 멤버가 되어서는 안돼요. 만약에 당신이 그 교회 멤버가 된다면 그 날부터 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없기 때문이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를 잃어버린 불평과 불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감사가 말라 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이웃과 사회에서도 감사가 말라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행동에도 언어와 인사에도 감사가 말라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슬픔, 우리의 불행, 우리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찍이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그는 부하고 건강하고 명성 지위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의 감사가 넘치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누가 불행한 사람인가 그는 외롭고 가난하고 불구된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에 감사가 말라붙은 사람일 것이다. " 누가 아니라고 부인하겠습니까. 만고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맞는 이 맥추감사절의 의미는 매우 소중합니다. 물론 이 절기는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던 것을 계승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이 절기의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한 해, 한 가운데서 지킨다는 것입니다. 한 해의 중심에 서서 그 동안의 우리의 감사생활을 뒤돌아보고 또 앞으로 받을 넘치는 은혜를 감사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생활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풍성한 감사생활만이 행복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실로 풍성한 감사생활속에 풍성한 믿음과 활기찬 영적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풍성한 감사생활속에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삶의 주어집니다. 풍성한 감사생활속에 영적으로 건강하고 윤택해질 것입니다. 풍성한 감사생활속에 풍성한 은혜와 복이 임합니다. 성령충만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성한 감사생활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센스가 있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소원, 필요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 저것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감사의 기도만 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센스있게 다 알아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나의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문속에서 감사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본문 9절을 주목하십시오. 요나가 드린 기도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여러분 요나가 어떠한 처지에서 이 기도를 드렸을까요. 지금 큰 풍랑의 바다에서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삼야 고통을 당하면서 이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자신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이긴 합니다마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중에서 이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스홀의 뱃속에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그 때 요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다음절 10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스홀의 뱃속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잃지 않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마침내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명하사 육지에 요나를 토해내게 했습니다. 이렇듯 감사는 기적을 창조합니다.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감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를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절대 조건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우리 몸의 혈액처럼 심장처럼, 호흡처럼 귀합니다. 감사하며 살기를 포기한 인생은 자기 인생 전부를 포기한 인생입니다.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대답하세요. 이제껏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감사하며 살던지 말던지 그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감사하며 살기를 거부한다면 자기 인생의 문을 닫고 폐업을 선언한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과는 영원히 담을 쌓은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믿음에 굳게 서서 너희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사도바울은 믿음과 감사를 동일시 했습니다. 믿음과 감사는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했습니다. 서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누가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까 믿음이란 내면적인 것이기에 겉만보고 쉽게 평가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참 믿음을 평가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기쁨과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분면히 참 믿음의 사람들은 범사에 기뻐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인 감사의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빼앗겨도, 모든 것 다 잃어 버려도 결코 빼앗길 수도 없고 잃어 버릴 수도 없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주시는 구원의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최악의 경우를 만난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폴 죤슨이라는 크리스천 심리학자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다. 감사란 신앙과 인격의 척도이다. 그리고 감사에는 차원이 있는데 그 감사의 차원에 따라서 그의 신앙과 인격이 달라진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섯가지 감사의 차원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첫 번재는 받았을 때 감사하는 차원입니다. 건강을 얻었을 때, 자녀를 얻었을 때, 좋은 직장을 얻었을 때, 사업이 잘 되었을 때 감사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입니다. 만약에 이런 감사조차 잊고 산다면 신앙이고, 인격이고 따질 거 없습니다. 그 신앙인격이야 말로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형편 무인지경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야 1장 보면 이런 성도들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고 있ㅅ브니다. 들어 보세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 내 백성은 깨닫지도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나 여호와를 버렸도다" 이제 우리 조용히 반성합시다. 혹시 우리가 이런 배은망덕자가 아닌지를 생각합시다. 금수도 마소도 할 줄 아는 이런 기본적인 감사조차도 할 줄 모르는 우리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을 때 감사할 줄 아는 1차원적인 감사 말입니다.
두 번째는 주었을 때 감사하는 차원입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람은 받았을 때 기쁨과 행복보다는 무엇을 주었을 때 기쁨과 행복이 더한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그러합니다. 이웃지간에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줄 수 이 있을 때 더 기쁘고 행복합니다. 받기만 하면 어쩐지 자기 인생이 조금은 시시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물질도 사랑도 모든 도움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받았을 때보다 줄 수있을 때 기쁘고 감사한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에 주었을 때, 줄 수 있을 때보다 받았을 때 더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 신앙은 아직도 미 성숙한 어린아이의 인생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무엇을 받았을 때 더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받는 기쁨이 더합니까, 주는 기쁨이 더합니까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와 주었을 때 어느 때 더 큰 기쁨과감사를 느낍니까 무엇을 받았을 때보다도 주었을 때 감사하는 것. 그것이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프란시스를 존경합니다. 그의 기도를 사랑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위로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게 하소서. "
우리 이런 사람이 될 수있다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감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깨닫는 감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행복이란 풍요한 소유에 있는게 아닙니다. 깨닫는 마음에 있습니다. 감사또한 객관적인 조건에 있는게 아닙니다. 깨닫는 그 마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감사의 조건이 많고 많을 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결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보십시오. 어떤 이는 그토록 엄청난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서도 감사하기는커녕 언제나 불평과 짜증만 부리면서 얼굴에 지옥의 화상, 마귀의 화상을 그리며 살고 있잖아요.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도 뭐가 그리 기쁘고 감사한지 날마다 감사하며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이들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도 그런 분을 저는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깨달음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은혜도 크게 때닫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북은 울리기 전까지는 북이 아니듯이 은혜 또한 깨닫기 전까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축복도 깨닫기 전까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행복도 깨닫기 전까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복, 행복. 내가 그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내게 은혜이고, 복이고, 행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이예요.
어떤 가난한 청년이 여행중에 싸구려 여인숙에 들렸다가 그만 신발을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 너무 화가나서 투정을 부립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내 신발입니까 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게 만드십니까" 그 때 여관집 주인은 헌 신발 한 켤레를 빌려주면서 이 신발 신고 나와 함께 교회가서 예배드리자고 했습니다. 투덜대며 따라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깜짝 놀랄일을 보았습니다.
바로 자기 곁에서 두 발을 다 잃어버린 신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발을 잃고서도 무엇이 그렇게도 기쁘고 감사한지 아주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두 발을 다 잃어버린 사람도 이렇게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까짓 신발 좀 잃어 버렸다고 해서 이렇게 불평하며 살 것인가. '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결단합니다. 이제는 비록 죽음 앞에 설지라도 불평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그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독일의 유명한 정치가 마틴 마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잘못되었어요. 너무 어리석고 유치합니다. 새 신발을 사서 신을 때는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두 발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무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우리 이만하면 감사할 조건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만 깨달음이 없어서 감사하지 못할 뿐입니다. 지난 주 저는 허리병이 나서 한 주간 동안 꼼짝을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닫고 회개하고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내 60평생 동안 허리 안아프게 산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왜 그것을 감사하지 못했던지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깨닫는 감사의 차원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고차원의 감사압니다.
네 번째는 고난중에 감사하는 차원입니다. 세상 사람들 말합니다. "고난중에 무슨 감사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위선이다. "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슬픈 것은 슬픈 것이지 어떻게 그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 이치로 따지면 맞습니다. 고난중에 감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세계애서는 결코 그렇지 않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 소망가지고 얼마든지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살아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고 유익하게 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우리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요나 선지자도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스홀의 고통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진실로 고난중의 감사야말로 고상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 할 수 있는 차원높은 감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감사를 통해서 기적의 삶을 창조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입니다. 미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감사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4장19절을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미리 감사했다 했습니다. 진실로 아브라함처럼 장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현재만 바라보고 현실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감사를
상상조차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 보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장차 받을 은혜와 축복들을 한 번 헤아려 보세요. 그렇다면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없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때마다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같은 은혜를 체험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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