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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오직 감사함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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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변전무상(變轉無常)하므로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길흉화복의 덧없음을 비유
한 말입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
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馬)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
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
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습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
간 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교훈적인 말로 통용되고 있습
니다. 새옹지마와 유사한 용어로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화복(塞翁禍福)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정답이 없습니다. 오늘 옳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면 그
것은 틀렸고 오늘 틀렸다고 생각한 것이 지나고 나면 옳았다는 것을 역사에서 우
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고 내가 넉넉하다고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뽐낼 것도 없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좌절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뿐입니다.
어제 아들 석훈이가 결혼을 했습니다.
목회단상에 저의 심경을 글로 고백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지금
도 제 가슴에서 출렁입니다.
당회원 여러분의 사랑은 저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
셨습니다.
권사님들을 중심으로 한 여전도 회원 여러분의 수고는 저로서는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되었습니다. 축하하러 오신 많은 분들이 하나 같이 제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일하시는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즐거움에 넘치고 마치 성령의 새술
에 취한 것 같더라. ”
봉사하시는 집사님들에게 다가가서 “내가 신랑 큰아버지다” “내가 신랑 삼
촌이다”라고 농담하시면서 격려하시는 장로님들을 보면서 집사님들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저에게 행복하다고 고백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제 가슴에는 또 다른
강물이 흘렀습니다.
겨울날씨에 온몸에 땀이 흠뻑 배도록 식당을 준비하시는 남선교회원들과 청년
들의 얼굴에서 저는 형제애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직한 제 심정의 고백
은 한 마디뿐입니다.
“오직 감사함뿐입니다. ”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인간의 행동에는 항상 “무엇무엇 때문에”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는 질서와 한계가 있고 절제도 있게 됩니
다. 이유 없는 행동은 무절제하며 혼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음은 당연한 삶의 태도이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분명함이 있다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승진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취직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장학생
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해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서,
어떤 이는 외국 여행을 다녀와서, 어떤 이는 병 고침 받아서 그렇게 여러 가지
로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승진에서 탈락되어도, 취직이 되지 않아도, 수능시험과 대학 입학시험
에 실패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도,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하면
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신앙이 아니라도 일상에서 새옹지마의 교훈을 새길 수만 있어도 우리는 어려
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대전에서는 4명의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내용인
즉 40세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게 되자 아내와 중학생인 딸과 아들
을 공기총으로 사살하고 자기도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는 절박함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자살이라
는 방법으로 인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황폐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삶의 먼지뿐입니다.
황폐한 마음을 생명수가 흐르며 잎사귀가 푸른 나무가 우거진 것과 같은 풍요
로운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감사함이라는 축복언어입니다.
감사함은 마음을 오아시스로 만듭니다.
감사함은 삶을 윤택하게 만듭니다.
감사함은 정신을 청정하게 만듭니다.
문학가 ‘코넬리어스 라이언’ (Cornelius 꾜무)은 “제2차 세계대전” “너무
나 먼 다리” 등의 대작을 쓴 위대한 작가였습니다. 그가 5년 동안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부인이 투병 기록을 책으로 엮었는데 “가장 긴
밤” (The Longest Night)으로서 생전의 남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
니다.
남편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똑같은 기도를 소리내어 반복하였습니다. “하나
님, 또 하루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기도였습니다. 어느 날 나
는 남편에게 무엇이 그렇게 좋은 날이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암이라
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
편은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새 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다섯 가지로 거침없
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아내를 또 볼 수 있는 것 때문이며, 둘째는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병들어 눕기 전에 마지막 작품인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넷째 병과 싸울 의지의 힘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며, 다섯째 주님이 언제나 저기에(가까운 바로 앞)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
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에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불편스러워도 불평과 짜증
내는 생활을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생
활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찾을 수 있는 생활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근간(根幹)은 구속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복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서 항
상 영혼의 만족함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감사 생활
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좋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곧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입고도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 외에 아홉 명은 감사함도 없이 그냥 떠난 이야기입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감사함을 노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이 갖추어져
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는 인생의 근간을
알아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범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
다.
 셋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의 모든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나의 삶의 결과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삶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됩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
다니엘 3장에는 진정한 감사의 아름다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던 때 이스라엘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의 바
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금신상을 만들어 누구
든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에 던짐 받아 죽임을 당하는 극형을 받아
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코 느부
갓네살의 신상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세 사람은 왕 앞에 끌려나왔고 느부갓네살은 신상에 절하면 살려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함을 호령했지만 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
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
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
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그리고 결과는 칠 배를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 받았지만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즉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을지라도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무너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내가 원했던 대
로 되지 않았을 때’ 교회생활도 멀어지고 신앙생활도 무너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의 기본자세가 없음으로 인한 신앙적
비극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하는 것도,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
은 것도, 사도 바울이 일평생 고난 가운데서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일생을 마
친 것도 자신들은 살고 싶고 평안하고 싶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으로 인한 거룩한 결과였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면서 믿음을 지킨 것
도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실패 같고 불행한 일 같지만 그들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
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
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
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삶의 내용입니다.
참된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어떤 조건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그 조건이 없어지면 또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
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은 영원히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언제나 그것이 불평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부터는 그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이 감사의 조건이었습니
다.
저는 행복한 교육과정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자격지심에 마음이 닫혔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부터는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특히 목사가 되어서는 더욱 겸손할 수 있는 내용의
하나가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몸에 많은 아픔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기에는 ‘희망 없는 존재’라는 글을 통해 나 자신을 자학하고 세상에서 가
장 비참한 존재로 알고 스스로를 한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부터는 사도 바울
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고 건강하지 못함 그 자체가 목회에도 큰 은혜가 되어
감사함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저의 생활!
그것은 철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지금까지 나는 누구를 원망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 생활에 단 한 번도 불평해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감사함으로 오늘에 이르렀
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삶은 감사함을 노래하는 그 자체입니다.
간증하나 하고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소호리교회를 시무할 때 사택은 낮은 지대에 건축되어 있어서 조금만 우기여
도 연탄이 젖어 여간 힘든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7년을 지내는 동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저도 아내도
단 한 번도 불평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떠나고 나서야 교회에서 그것을 깨닫고 새로 좋은 집을 지었습니다.
안동용상교회를 시무할 때 역시 목사관은 예배당 뜰 바로 곁에 위치했고 16평
의 작은 집이었습니다. 책을 도저히 놓을 자리가 없어 옥상에 10평 집을 다시 올
려 서재로 사용했는데 문제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사택 문을 열지 못하여 감옥 같
은 생활을 했습니다. 한밤중에도 교인들이 수시로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언제나 옷을 입은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
니다.
8년을 지나면서도 단 한 번도 불평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떠난 후 교회에서 뒤늦게 깨닫고 아파트로 목사관을 옮겼습니다.
포항중앙교회에 와보니 역시 목사관이 유치원 4층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계
단이름을 골뱅이 계단이라고 명명했고 많은 분들이 사택에 오를 때 불편함을 이
야기했지만 그것 자체를 저는 다리 운동하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단 한 번
도 불평해 보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되는 이제 교회에서 좋은 목사관을 준비해서 곧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 귀에 들린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목사관을 옮긴다면서 평수가 넓다면서”
그 순간 정직하게 고백하면 섭섭한 마음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제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젠 저도 아파트에서 생활할 자격이 있잖아요 아직도 안 되는 것인가
요 이사하지 말고 그냥 살면 안돼요”
목사관 생활 25년 만에 제가 처음으로 불평을 한 마디 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이 정도 교회에 이런 곳에 목사관이 있는 교회 있으면 대 보라
지... ”
그리고 곧 후회했습니다.
“제 가슴에 또 감사함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
그렇습니다.
오직 감사함뿐이어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합니다가 우리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여러분에게 고백하고 권면합니다.
“오직 감사함뿐입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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