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감사의 힘
본문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가고 수확의 계절이 끝났습니다. 이제 감사를 고백할 때입니다. 그러나 기나긴 장마와 태풍 매미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아니했고 경기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국내외의 정치상황은 매우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북핵문제, 아라크 재파병문제, 노사갈등 잇단 노동자들의 분신자살, 수능시험을 치루던 학생이 아파트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자살을 하는가 하면 수능시험을 잘못 보았다고 투신자살하기도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교육개혁을 부르짖으며 제도를 바꾸어 왔지만 지금도 교육은 개혁중이고 뒤떨어진 교육제도와 갈팡질팡하는 정책 때문에 학생들과 학부형만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은 교육정책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부 잘하여 좋은 대학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는 맹신과 수능시험이 일생을 좌우한다고 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과 수능시험 망치면 인생 끝난다고 하는 사회적 쇠뇌교육이 삶의 시작에 불과한 어린 학생들을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며 대학만능이라는 우상 앞에 드려지는 희생의 제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과 생활고로 인한 가족단위의 동반자살 등 이러한 추세로 가면 금년 한해만도 자살한 자가 10,000명 이상 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사회를 바로잡아가야 할 지도층과 지성인들은 자기중심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깨끗하고 정의롭다고 자처하던 정치지도자들이 온갖 부정과 불법정치자금에 연류된 것이 속속히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감과 좌절감과 배신감을 줌으로 사회는 더욱더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불평과 원성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당시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가면서 때로 분노하며 불평하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탄원하고 항변하는 기도를 하기까지 한바 있습니다.
본문 1장 2-4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시화에서 살았던 시편기자는 시편73편 2-3절에서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했습니다.
‘질시’하였다함은 시기하는 눈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이 의인보다 더 잘되고 형통하는 듯이 보여 그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다가 영적 삶이 실족하고 넘어질뻔 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들도 때론 불합리한 사회상과 불법한자들의 득세함을 보고 분노하고 질시하며 좌절할 때도 있고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를 의심하며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 섞인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과 같이 감사의 절기를 맞이할 때면 상황이 이러한데도 감사는 해야하는가 하는 갈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같은 선지자도 그러했고 시편기자도 그러한 갈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는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힘의 원천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감사를 많이 한 사람은 다윗과 사도 바울 일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감사를 많이 한 것은 남들보다 감사할 조건이 많고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울 왕의 까닭 없는 질시와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그의 큰아들인 암논이 여동생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한 형제간의 살인 복으로 장자 암논이 죽었고, 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망명생활을 해야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윗 군대와 압살롬 반란군이 싸우는 와중에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압살롬이 처형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밑에 동생 길르앗도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이 난지 몇 일 안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웃나라와 정적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배반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은 온통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고백과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과 생명의 위협받는 생활과 감옥생활의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서신을 보면 항상 감사와 찬양이 샘물과 강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이들의 이러한 감사의 삶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환경을 극복하는 힘과 능력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아침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감사의 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중에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감사의 두 가지 종류
감사에는 상대적 감사와 절대적 감사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상대적 감사란 무엇입니까
상대적 감사란 조건적 감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른 감사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땐 감사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합니다. 형통하고 잘될 때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불평합니다.
이와 같은 상대적 감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했습니다. 홍해바다를 갈라 길을 열어주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안되고 어려움이 있으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고 받는 것이 있을 때만 감사한다면 이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대적 감사는 기독교의 감사가 아닙니다.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의 사상에서 온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없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자의 감사입니다.
언젠가 목장예배를 드린 후에 교우들과 함께 자녀들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영리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아주 잘 해준답니다.
‘엄마 설거지 도와드릴까요, 아빠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그러면 부모들은 그 속셈을 알아차리고 ‘또 무엇이 필요한 모양이로구나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셨어요 하며 애교를 부립니다. ‘내가 널 낳아 길렀는데 내 속셈하나 모르겠느냐무엇이 필요한지 어서 말해봐 합니다.
‘내 친구 오늘이 생일이거든요 만원이면 돼요 더 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없으시면 오천원만 주셔도 되고요, 만원 주면 감사합니다. 2만원 주면 감사 감사합니다. ’하면서 뽀뽀까지 해주고 날아갈 듯 기뻐하며 깡충깡충 뛰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약효가 얼마나 가느냐고 물었더니, 얼마는 얼마입니까 잘하면 며칠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을 때뿐입니다.
어쩌다가 별 타당성이 없다 싶어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면 불평불만이 가득하여 팅팅 대고 제가 열심히 하지 아니해서 성적 떨어진 것까지 우리 집은 공부할 분위기가 어쩌고저쩌고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말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때는 감사합니다. 더 많이 주시고 형통할 때는 감사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아쉬울 때는 새벽예배 금요기도회 기도원까지 찾아다니며 열심을 내다가 주시면 감사하신 여호와 하나님 참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미성숙한 신앙인이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적 감사는 어린이들이나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들이 하는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힘이 없는 감사입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기 신에게 할 수 있는 샤머니즘적 감사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감사는 힘이 없습니다.
2) 절대적 감사란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에서든지 감사하는 전천후의 감사입니다.
본문 17-18절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가 없어질 때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에서 소유를 초월하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가 없어질지라도 비록 가난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가난하고 자신의 소유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화려한 생활은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기쁨을 줄 뿐입니다. 성도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박국은 소유와 소출이 없어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으며 다윗도 여러 가지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라고 하며 여호와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103:2)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고 하며(롬8:28)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했습니다.
이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옥중에서도 항상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 감사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한해동안 뿌린 씨앗을 열매로 거두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궂은일 좋은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절대적 감사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표현될 때 감사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감사하는 삶에서 얻어지는 힘은 삶의 현장을 어두움에서 빚으로 바꾸고, 미래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됩니다.
수도원과 감옥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둘 다 외부와 차단되어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어렵고 나오기도 힘듭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도원에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있고 감옥에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감옥이 감옥 되게 하고 수도원을 수도원 되게 합니까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사와 찬양이 있으면 수도원이 되고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찬양과 감사가 없고 불평과 불만과 원망만 있다면 이는 감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감사는 감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불평과 불만은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절대적 감사로 어려운 환경을 물리치는 힘과 능력을 소유하시기 원합니다.
2. 감사가 힘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삶이 항상 밝고 긍정적이 되어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되고 하는 일도 잘 되어 성공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마음의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좌절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하다 보면 대인관계도 원만치 못하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실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며칠 전에 노동자 집회에서 화염병이 등장하고 새총까지 등장하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더욱더 강도 높은 전면파업도 불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자에게는 불만과 분노가 쌓이고 분노와 감정이 싸이면 그것이 밖으로 타나날 때 폭력과 파괴로 나타나고 그 감정이 안으로 향할 때 자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자가 얼마입니까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할 곳이라도 찾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를 모릅니다. 감사를 모르니 불평과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니 화염병을 던지고 금속으로 된 새총을 경찰들을 향하여 날려댑니다. 화염병은 원래 2차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 탱크부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효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군사독제 폭압정치에 항거하는데 불가피한 수단으로 사용한 사제수류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데모진압 대안으로 마련한 것이 최루탄입니다. 1998년 이후 경찰은 무 최루탄원칙을 세웠고 시위자들도 화염병을 자제해 평화적 시위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웬 화염병과 새총입니까
1979년 부마항쟁과 87년 6월 10일 항쟁이 성공한 것은 민심의 열렬한 박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노동자들의 전면파업은 노사문제라기 보다는 노정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화염병을 던지고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는 금속탄 새총을 쏘아대는 노동자들 시위에 박수를 보내줄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박수 없는 어떠한 시위나 항쟁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몇몇 악덕기업주들과 집권하면 당장 노동자 천국을 만들어 줄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바람을 넣어 주었던 정권담당자들의 책임이 크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아닌 과격한 집단 행동, 감정표출 결코 유익도 얻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빼앗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에게는 평강과 기쁨이 있고 밝은 내일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경영자는 근로자에게 감사하고 근로자는 경영자들에게 감사하고 서로서로 감사하고 고맙게 여길 때 회사가 삽니다. 또한 개인도 삽니다. 감사는 자신의 가정과 일터 민족의 어려운 현실과 미래를 평안과 안정과 천국으로 바꾸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절대적 감사는 나의 영혼을 살리고 믿음을 살리고 가정과 교회나 나라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3. 절대적 감사가 어디로부터 옵니까
절대적 감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부터 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내가 고난과 역경에 있지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발을 빠르고 강하게 하여 높은 곳 즉 차원 높은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벧전 1장 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이처럼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성장하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환난의 진정한 가치는 성도가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더 큰 소망을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했고, “시험을 참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고 했으며, 롬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절대적 감사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를 하게 될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며 자신과 가정과 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평강과 천국으로 인도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됩니다.
절대적 감사로 이러한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북핵문제, 아라크 재파병문제, 노사갈등 잇단 노동자들의 분신자살, 수능시험을 치루던 학생이 아파트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자살을 하는가 하면 수능시험을 잘못 보았다고 투신자살하기도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교육개혁을 부르짖으며 제도를 바꾸어 왔지만 지금도 교육은 개혁중이고 뒤떨어진 교육제도와 갈팡질팡하는 정책 때문에 학생들과 학부형만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은 교육정책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부 잘하여 좋은 대학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는 맹신과 수능시험이 일생을 좌우한다고 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과 수능시험 망치면 인생 끝난다고 하는 사회적 쇠뇌교육이 삶의 시작에 불과한 어린 학생들을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며 대학만능이라는 우상 앞에 드려지는 희생의 제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과 생활고로 인한 가족단위의 동반자살 등 이러한 추세로 가면 금년 한해만도 자살한 자가 10,000명 이상 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사회를 바로잡아가야 할 지도층과 지성인들은 자기중심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깨끗하고 정의롭다고 자처하던 정치지도자들이 온갖 부정과 불법정치자금에 연류된 것이 속속히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감과 좌절감과 배신감을 줌으로 사회는 더욱더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불평과 원성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당시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가면서 때로 분노하며 불평하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탄원하고 항변하는 기도를 하기까지 한바 있습니다.
본문 1장 2-4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시화에서 살았던 시편기자는 시편73편 2-3절에서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했습니다.
‘질시’하였다함은 시기하는 눈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이 의인보다 더 잘되고 형통하는 듯이 보여 그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다가 영적 삶이 실족하고 넘어질뻔 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들도 때론 불합리한 사회상과 불법한자들의 득세함을 보고 분노하고 질시하며 좌절할 때도 있고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를 의심하며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 섞인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과 같이 감사의 절기를 맞이할 때면 상황이 이러한데도 감사는 해야하는가 하는 갈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같은 선지자도 그러했고 시편기자도 그러한 갈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는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힘의 원천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감사를 많이 한 사람은 다윗과 사도 바울 일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감사를 많이 한 것은 남들보다 감사할 조건이 많고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울 왕의 까닭 없는 질시와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그의 큰아들인 암논이 여동생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한 형제간의 살인 복으로 장자 암논이 죽었고, 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망명생활을 해야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윗 군대와 압살롬 반란군이 싸우는 와중에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압살롬이 처형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밑에 동생 길르앗도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이 난지 몇 일 안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웃나라와 정적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배반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은 온통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고백과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과 생명의 위협받는 생활과 감옥생활의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서신을 보면 항상 감사와 찬양이 샘물과 강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이들의 이러한 감사의 삶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환경을 극복하는 힘과 능력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아침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감사의 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중에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감사의 두 가지 종류
감사에는 상대적 감사와 절대적 감사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상대적 감사란 무엇입니까
상대적 감사란 조건적 감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른 감사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땐 감사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합니다. 형통하고 잘될 때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불평합니다.
이와 같은 상대적 감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했습니다. 홍해바다를 갈라 길을 열어주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안되고 어려움이 있으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고 받는 것이 있을 때만 감사한다면 이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대적 감사는 기독교의 감사가 아닙니다.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의 사상에서 온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없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자의 감사입니다.
언젠가 목장예배를 드린 후에 교우들과 함께 자녀들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영리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아주 잘 해준답니다.
‘엄마 설거지 도와드릴까요, 아빠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그러면 부모들은 그 속셈을 알아차리고 ‘또 무엇이 필요한 모양이로구나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셨어요 하며 애교를 부립니다. ‘내가 널 낳아 길렀는데 내 속셈하나 모르겠느냐무엇이 필요한지 어서 말해봐 합니다.
‘내 친구 오늘이 생일이거든요 만원이면 돼요 더 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없으시면 오천원만 주셔도 되고요, 만원 주면 감사합니다. 2만원 주면 감사 감사합니다. ’하면서 뽀뽀까지 해주고 날아갈 듯 기뻐하며 깡충깡충 뛰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약효가 얼마나 가느냐고 물었더니, 얼마는 얼마입니까 잘하면 며칠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을 때뿐입니다.
어쩌다가 별 타당성이 없다 싶어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면 불평불만이 가득하여 팅팅 대고 제가 열심히 하지 아니해서 성적 떨어진 것까지 우리 집은 공부할 분위기가 어쩌고저쩌고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말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때는 감사합니다. 더 많이 주시고 형통할 때는 감사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아쉬울 때는 새벽예배 금요기도회 기도원까지 찾아다니며 열심을 내다가 주시면 감사하신 여호와 하나님 참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미성숙한 신앙인이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적 감사는 어린이들이나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들이 하는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힘이 없는 감사입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기 신에게 할 수 있는 샤머니즘적 감사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감사는 힘이 없습니다.
2) 절대적 감사란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에서든지 감사하는 전천후의 감사입니다.
본문 17-18절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가 없어질 때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에서 소유를 초월하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가 없어질지라도 비록 가난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가난하고 자신의 소유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화려한 생활은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기쁨을 줄 뿐입니다. 성도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박국은 소유와 소출이 없어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으며 다윗도 여러 가지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라고 하며 여호와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103:2)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고 하며(롬8:28)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했습니다.
이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옥중에서도 항상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 감사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한해동안 뿌린 씨앗을 열매로 거두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궂은일 좋은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절대적 감사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표현될 때 감사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감사하는 삶에서 얻어지는 힘은 삶의 현장을 어두움에서 빚으로 바꾸고, 미래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됩니다.
수도원과 감옥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둘 다 외부와 차단되어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어렵고 나오기도 힘듭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도원에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있고 감옥에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감옥이 감옥 되게 하고 수도원을 수도원 되게 합니까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사와 찬양이 있으면 수도원이 되고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찬양과 감사가 없고 불평과 불만과 원망만 있다면 이는 감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감사는 감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불평과 불만은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절대적 감사로 어려운 환경을 물리치는 힘과 능력을 소유하시기 원합니다.
2. 감사가 힘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삶이 항상 밝고 긍정적이 되어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되고 하는 일도 잘 되어 성공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마음의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좌절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하다 보면 대인관계도 원만치 못하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실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며칠 전에 노동자 집회에서 화염병이 등장하고 새총까지 등장하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더욱더 강도 높은 전면파업도 불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자에게는 불만과 분노가 쌓이고 분노와 감정이 싸이면 그것이 밖으로 타나날 때 폭력과 파괴로 나타나고 그 감정이 안으로 향할 때 자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자가 얼마입니까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할 곳이라도 찾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를 모릅니다. 감사를 모르니 불평과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니 화염병을 던지고 금속으로 된 새총을 경찰들을 향하여 날려댑니다. 화염병은 원래 2차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 탱크부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효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군사독제 폭압정치에 항거하는데 불가피한 수단으로 사용한 사제수류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데모진압 대안으로 마련한 것이 최루탄입니다. 1998년 이후 경찰은 무 최루탄원칙을 세웠고 시위자들도 화염병을 자제해 평화적 시위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웬 화염병과 새총입니까
1979년 부마항쟁과 87년 6월 10일 항쟁이 성공한 것은 민심의 열렬한 박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노동자들의 전면파업은 노사문제라기 보다는 노정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화염병을 던지고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는 금속탄 새총을 쏘아대는 노동자들 시위에 박수를 보내줄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박수 없는 어떠한 시위나 항쟁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몇몇 악덕기업주들과 집권하면 당장 노동자 천국을 만들어 줄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바람을 넣어 주었던 정권담당자들의 책임이 크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아닌 과격한 집단 행동, 감정표출 결코 유익도 얻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빼앗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에게는 평강과 기쁨이 있고 밝은 내일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경영자는 근로자에게 감사하고 근로자는 경영자들에게 감사하고 서로서로 감사하고 고맙게 여길 때 회사가 삽니다. 또한 개인도 삽니다. 감사는 자신의 가정과 일터 민족의 어려운 현실과 미래를 평안과 안정과 천국으로 바꾸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절대적 감사는 나의 영혼을 살리고 믿음을 살리고 가정과 교회나 나라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3. 절대적 감사가 어디로부터 옵니까
절대적 감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부터 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내가 고난과 역경에 있지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발을 빠르고 강하게 하여 높은 곳 즉 차원 높은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벧전 1장 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이처럼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성장하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환난의 진정한 가치는 성도가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더 큰 소망을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했고, “시험을 참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고 했으며, 롬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절대적 감사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를 하게 될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며 자신과 가정과 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평강과 천국으로 인도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됩니다.
절대적 감사로 이러한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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