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성숙한 믿음과 감사
본문
어느 목사님이 결혼을 하는 처녀에게 축전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신앙이 좋은 처녀의 결혼식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참석치 못하게 되어 평소에 좋아하는 성경말씀을 축전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두 젊은이의 가정을 위해 요한1서 4:18의 말씀을 택하셔서 전보를 쳤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전신국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요1 4:18을 요 4:18로 전보를 친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경악케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자 하나가 빠짐으로 엉뚱한 일이 벌어져서 정반대의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신랑, 신부는 이 전보를 받고는 뒤로 넘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이 점하나 잘못되어 낭패를 당하거나 운명이 바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가 부족해서 인생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가을에는 은평교우 여러분의 가정 위에 부족한 이 한 가지가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때로는 그 한가지가 운명을 좌지할 만큼 중요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꼭 채워져야 할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고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어제부터 추석절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수천만명이 추석명절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찾아 이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석은 한국의 고유한 추수감사절(Korean Thanksgiving Day)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장 지혜롭고 슬기로운 추석명절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한해의 농사를 잘 짓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조상들에게 감사제를 드리게 함으로 가족애, 민족애를 키워주었고 하늘을 거스리지 않는 선한 민족으로 전통을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흩어져 살던 온가족이 함께 모여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 음식을 서로 나누며 가족과 가문의 혈통을 든든히 세워가게 하는 지혜는 추석명절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추석명절은 일종의 감사제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감사의 정신을 되새기는 성경말씀 가운데 하박국 3:17-18의 말씀은 너무나도 은혜스런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 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감사할 것도, 즐거워할 것도, 기뻐할 것도 아무 것도 없는데 하박국 선지자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것이 다 없다해도 여호와 하나님만 곁에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사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정신을 배웁니다.
첫째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감사의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모든 농사가 망쳐졌고 양과 소까지도 다 없어졌지만 아직도 감사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하박국의 가슴속에는 감사의 내용을 찾아내는 또 다른 감정이 용솟음 치는 듯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한 후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혼자만 외롭게 던져진 광야의 들풀 같이 메말라갔습니다. 끼니가 걱정될 만큼 가게살림이 어려워 졌고 친구나 동료들에게 당한 배신감 때문에 얻은 상처들이 그를 절망의 늪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누워있는 이 사람에게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남자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죠"라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 다 있다해도 당신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돈이 당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 "그러면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생명이겠네요" "그렇습니다. " "그 다음에는요" "네, 건강입니다. " "그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입니다. "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나열됩니다. 목사님은 그 리스트를 보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까" "아닙니다. " "아내가 죽었습니까" " 아닙니다. " "당신의 두 자녀 중 큰 아이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 " 둘째 아이는요" "학교에 갔습니다. " "그러면 당신은 중요한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고, 건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까것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하찮은 것을 잃고 가장 소중한 생명과 건강과 가족을 버리려 합니다. " 이 사람은 목사님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가 가야 할 길 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계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
지난 두 주간 동안 교우 여러분들에게 제 건강 때문에 염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눈병이 나서 입원을 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소한 의료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 밑의 지방을 제거 받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실수로 눈 안의 핏줄이 터져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수술이었으나 작은 실수가 큰 일을 낼 뻔했습니다. 약 40여분 동안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었습니다. 눈이 안보이자 의사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눈 밑을 열어서 동공 뒤의 피를 빼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합니까 수술대 위에 누워 기도했습니다. 결국 영동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40여분 동안 왼쪽 눈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의사의 당황하는 모습은 내게 더 큰 불안을 가져왔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되나" 처음에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 뒤에는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채웠습니다. 눈이 잘 보일 때, 보이는 그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보려고 노력했는가 아니면 그 밝은 눈을 가지고 나는 어떤 죄들을 저질렀는가 수 없는 회개가 쏟아졌습니다. 그렇구나. 눈이 머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눈을 어떻게 사용했었느냐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눈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향한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회개와 함께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었습니다. 왜 이 말씀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고 한눈을 갖고 살아라. 손이 범죄하면 짤라버리고 한 손만 갖고 살아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어떤 분의 성경책에는 이 말씀이 없는 모양입니다. 제 성경에는 함께 있는데 다시 봉독해 봅시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 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 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래서일까 내 한눈을 멀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잠시 동안이지만 이런 회개의 기도를 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응급실에서 안과의사들이 안압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고 주사를 놓고 하니다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안과의사가 "됐습니다.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제 속에서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눈을 다시 찾게 된다니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두 눈을 주셔서 60년을 쓰게 하셨는데 그때 응급실에 누워있을 때처럼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얄팍한 심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는다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만 있으면 기쁘고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만 있으면 눈이 없어도, 손이 없어도, 팔과 다리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근본이 어디에 있음을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없는 것보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게 있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 보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의 내용은 내가 찾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에게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감사의 내용입니다.
마치 금광을 캐내듯 감사할 내용들은 우리 안에 얼마든지 많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만듭니다.
조선일보 부록으로 나오는 "Books"라는 별지에 칼럼을 쓰는 장영희씨가 있습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인데 글을 쓰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아마 소아마비의 여성으로 영문학을 공부한 수재인 듯 합니다. 전 세계의 문학전집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조선일보에 영시(English Poem)도 번역해서 싣고 있는데 그분의 글을 읽노라면 잔잔한 감동과 함께 그분의 순수한 세계에 흠뻑 젖는 듯 합니다. 그분이 지난 토요일 마지막 칼럼을 썼습니다. "장영희의 문학의 숲"의 칼럼을 마감하는 글입니다. 마지막 칼럼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 울었습니다.
3년전 그분은 하버드대학 교환 교수로 갔다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느닷없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답니다. 초기여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통해서 거뜬히 나았답니다. 그는 유방암 치료를 끝낸 후 쾌재를 불렀답니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을 내다니……" 그런데 지난 여름부터 허리와 목에 이상한 통증이 있어서 검진을 해보니 유방암이 목 뒤 경추3번으로 전이되었고 척추암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은 차분히 자기의 운명을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 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 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왔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자신에게 와지는 고통을 이렇게 감사의 조건으로 바꾸어 해석하는 장영희씨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담담히 글을 써가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 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입원하고 나흘만에 통증이 조금 완화되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다리 보조기를 신고 일어섰다. 그리고 강한 희열이 느껴졌다. 직립인간으로서 직립 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워서보는 하늘 이 아니라 서서 보는 하늘은 얼마나 더 화려한지…… 새삼 생각해 보니 목을 나긋 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 한 통증없이 재채기 한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 고 살아왔다……"
서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축복이었다는 장영희씨의 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회개시킵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 들어가고 고시에 붙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다가 아닙니다. 공부를 잘못해도 건강하게 자라주는 자식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내 교회, 은평교회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구원의 은총이 내게 머물고 있는 한 세상을 다 잃어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께 대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베풀어준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내용을 찾으면 부모님 생각만 해도 가슴에 감사의 눈물로 범벅이 됩니다. 늘 감사의 내용을 찾는 자에게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이 넘침을 기억합시다.
둘째로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감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눅 17:19에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바른 감사의 대상을 찾아온 것입니다. 감사의 대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대상을 잘못 찾은 사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해 내셨습니다. 목마를 때는 마가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기도 하고 배고플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40일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 산아래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신이 이스라엘을 시내광야까지 인도했다고 칭송하며 제사들 드렸습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 얼마나 분노하셨던지 금송아지 제사를 주도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감사의 대상을 잘못 찾으면 저주의 길에 들어섭니다. 감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 감사하게 될 때에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추석에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까 산신령입니까 태양신입니까 성황당입니까 죽은 조상들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감사제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추석절 감사제를 드릴 때 대상을 바로 찾도록 선교사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도 멀고, 귀도 먹고, 말도 못하는 헬렌 켈러는 꽃밭에 나가 향기를 맡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신체장애(핸디캡)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나는 듣습니다. " 자신의 장애를 오히려 감사의 내용으로 찾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헬렌 켈러는 살아있는 성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인류의 등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감사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를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신 스승님들입니다. 또 내게 신앙을 인도해주는 교회요, 그 다음은 친절과 도움을 준 사람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어떻게 감사를 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표현에 대한 중요성을 말합니다. 감사는 마음 속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겉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윌리암 로우는 감리교 창시자인 죤 웨슬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말속에는 감사의 표현과 행위가 구체적으로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벤허"라는 작품에서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는 것만이 지난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나의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가끔 제 딸아이가 "아빠, 나 때문에 아빠 고생 많이 했어요. 아빠 고마워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어머님 모시고 딸네 집에 갔을 때 작은 선물을 어머니 이름으로 사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주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인사차 어머님 집에 들렸더니 어머니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아들을 보는 기쁨도 있으셨겠으나 미국에 있는 손녀에게 들은 감사의 표현이 노인양반을 더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성혜에게 전화가 왔는데 선물이 너무 좋아서 매일 그 선물을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만 난대. " 글쎄 그 녀석이 정말 할머니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 기분 좋으시라고 들려드린 것인지 진위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손녀의 감사표현에 선물주신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시고 계셨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속으로만 고맙게 여기고 아무런 표현을 안 한다면 할머니의 그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우리의 표현이요, 행위입니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안겨준 이원희 선수가 둘러메치기로 한판승을 거두었을 때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두 손을 하늘로 올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방송기자가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의 기분이 어떠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고 했습니다. 이번 9명의 금메달리스트 중 7명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영광 여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고 했습니다. 감사는 표현되어질 때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 이런 즐거운 고민이 이번 추석 명절을 맞아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전신국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요1 4:18을 요 4:18로 전보를 친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경악케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자 하나가 빠짐으로 엉뚱한 일이 벌어져서 정반대의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신랑, 신부는 이 전보를 받고는 뒤로 넘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이 점하나 잘못되어 낭패를 당하거나 운명이 바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가 부족해서 인생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가을에는 은평교우 여러분의 가정 위에 부족한 이 한 가지가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때로는 그 한가지가 운명을 좌지할 만큼 중요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꼭 채워져야 할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고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어제부터 추석절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수천만명이 추석명절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찾아 이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석은 한국의 고유한 추수감사절(Korean Thanksgiving Day)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장 지혜롭고 슬기로운 추석명절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한해의 농사를 잘 짓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조상들에게 감사제를 드리게 함으로 가족애, 민족애를 키워주었고 하늘을 거스리지 않는 선한 민족으로 전통을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흩어져 살던 온가족이 함께 모여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 음식을 서로 나누며 가족과 가문의 혈통을 든든히 세워가게 하는 지혜는 추석명절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추석명절은 일종의 감사제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감사의 정신을 되새기는 성경말씀 가운데 하박국 3:17-18의 말씀은 너무나도 은혜스런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 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감사할 것도, 즐거워할 것도, 기뻐할 것도 아무 것도 없는데 하박국 선지자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것이 다 없다해도 여호와 하나님만 곁에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사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정신을 배웁니다.
첫째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감사의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모든 농사가 망쳐졌고 양과 소까지도 다 없어졌지만 아직도 감사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하박국의 가슴속에는 감사의 내용을 찾아내는 또 다른 감정이 용솟음 치는 듯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한 후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혼자만 외롭게 던져진 광야의 들풀 같이 메말라갔습니다. 끼니가 걱정될 만큼 가게살림이 어려워 졌고 친구나 동료들에게 당한 배신감 때문에 얻은 상처들이 그를 절망의 늪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누워있는 이 사람에게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남자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죠"라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 다 있다해도 당신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돈이 당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 "그러면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생명이겠네요" "그렇습니다. " "그 다음에는요" "네, 건강입니다. " "그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입니다. "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나열됩니다. 목사님은 그 리스트를 보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까" "아닙니다. " "아내가 죽었습니까" " 아닙니다. " "당신의 두 자녀 중 큰 아이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 " 둘째 아이는요" "학교에 갔습니다. " "그러면 당신은 중요한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고, 건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까것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하찮은 것을 잃고 가장 소중한 생명과 건강과 가족을 버리려 합니다. " 이 사람은 목사님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가 가야 할 길 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계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
지난 두 주간 동안 교우 여러분들에게 제 건강 때문에 염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눈병이 나서 입원을 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소한 의료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 밑의 지방을 제거 받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실수로 눈 안의 핏줄이 터져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수술이었으나 작은 실수가 큰 일을 낼 뻔했습니다. 약 40여분 동안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었습니다. 눈이 안보이자 의사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눈 밑을 열어서 동공 뒤의 피를 빼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합니까 수술대 위에 누워 기도했습니다. 결국 영동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40여분 동안 왼쪽 눈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의사의 당황하는 모습은 내게 더 큰 불안을 가져왔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되나" 처음에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 뒤에는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채웠습니다. 눈이 잘 보일 때, 보이는 그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보려고 노력했는가 아니면 그 밝은 눈을 가지고 나는 어떤 죄들을 저질렀는가 수 없는 회개가 쏟아졌습니다. 그렇구나. 눈이 머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눈을 어떻게 사용했었느냐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눈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향한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회개와 함께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었습니다. 왜 이 말씀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고 한눈을 갖고 살아라. 손이 범죄하면 짤라버리고 한 손만 갖고 살아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어떤 분의 성경책에는 이 말씀이 없는 모양입니다. 제 성경에는 함께 있는데 다시 봉독해 봅시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 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 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래서일까 내 한눈을 멀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일까"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잠시 동안이지만 이런 회개의 기도를 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응급실에서 안과의사들이 안압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고 주사를 놓고 하니다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안과의사가 "됐습니다.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제 속에서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눈을 다시 찾게 된다니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두 눈을 주셔서 60년을 쓰게 하셨는데 그때 응급실에 누워있을 때처럼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얄팍한 심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는다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만 있으면 기쁘고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만 있으면 눈이 없어도, 손이 없어도, 팔과 다리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근본이 어디에 있음을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없는 것보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게 있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 보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의 내용은 내가 찾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에게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감사의 내용입니다.
마치 금광을 캐내듯 감사할 내용들은 우리 안에 얼마든지 많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만듭니다.
조선일보 부록으로 나오는 "Books"라는 별지에 칼럼을 쓰는 장영희씨가 있습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인데 글을 쓰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아마 소아마비의 여성으로 영문학을 공부한 수재인 듯 합니다. 전 세계의 문학전집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조선일보에 영시(English Poem)도 번역해서 싣고 있는데 그분의 글을 읽노라면 잔잔한 감동과 함께 그분의 순수한 세계에 흠뻑 젖는 듯 합니다. 그분이 지난 토요일 마지막 칼럼을 썼습니다. "장영희의 문학의 숲"의 칼럼을 마감하는 글입니다. 마지막 칼럼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 울었습니다.
3년전 그분은 하버드대학 교환 교수로 갔다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느닷없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답니다. 초기여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통해서 거뜬히 나았답니다. 그는 유방암 치료를 끝낸 후 쾌재를 불렀답니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을 내다니……" 그런데 지난 여름부터 허리와 목에 이상한 통증이 있어서 검진을 해보니 유방암이 목 뒤 경추3번으로 전이되었고 척추암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은 차분히 자기의 운명을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 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 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왔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자신에게 와지는 고통을 이렇게 감사의 조건으로 바꾸어 해석하는 장영희씨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담담히 글을 써가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 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입원하고 나흘만에 통증이 조금 완화되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다리 보조기를 신고 일어섰다. 그리고 강한 희열이 느껴졌다. 직립인간으로서 직립 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워서보는 하늘 이 아니라 서서 보는 하늘은 얼마나 더 화려한지…… 새삼 생각해 보니 목을 나긋 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 한 통증없이 재채기 한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 고 살아왔다……"
서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축복이었다는 장영희씨의 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회개시킵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 들어가고 고시에 붙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다가 아닙니다. 공부를 잘못해도 건강하게 자라주는 자식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내 교회, 은평교회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구원의 은총이 내게 머물고 있는 한 세상을 다 잃어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께 대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베풀어준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내용을 찾으면 부모님 생각만 해도 가슴에 감사의 눈물로 범벅이 됩니다. 늘 감사의 내용을 찾는 자에게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이 넘침을 기억합시다.
둘째로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감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눅 17:19에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바른 감사의 대상을 찾아온 것입니다. 감사의 대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대상을 잘못 찾은 사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해 내셨습니다. 목마를 때는 마가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기도 하고 배고플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40일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 산아래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신이 이스라엘을 시내광야까지 인도했다고 칭송하며 제사들 드렸습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 얼마나 분노하셨던지 금송아지 제사를 주도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감사의 대상을 잘못 찾으면 저주의 길에 들어섭니다. 감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 감사하게 될 때에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추석에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까 산신령입니까 태양신입니까 성황당입니까 죽은 조상들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감사제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추석절 감사제를 드릴 때 대상을 바로 찾도록 선교사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도 멀고, 귀도 먹고, 말도 못하는 헬렌 켈러는 꽃밭에 나가 향기를 맡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신체장애(핸디캡)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나는 듣습니다. " 자신의 장애를 오히려 감사의 내용으로 찾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헬렌 켈러는 살아있는 성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인류의 등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감사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를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신 스승님들입니다. 또 내게 신앙을 인도해주는 교회요, 그 다음은 친절과 도움을 준 사람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어떻게 감사를 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표현에 대한 중요성을 말합니다. 감사는 마음 속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겉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윌리암 로우는 감리교 창시자인 죤 웨슬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말속에는 감사의 표현과 행위가 구체적으로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벤허"라는 작품에서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는 것만이 지난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나의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가끔 제 딸아이가 "아빠, 나 때문에 아빠 고생 많이 했어요. 아빠 고마워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어머님 모시고 딸네 집에 갔을 때 작은 선물을 어머니 이름으로 사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주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인사차 어머님 집에 들렸더니 어머니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아들을 보는 기쁨도 있으셨겠으나 미국에 있는 손녀에게 들은 감사의 표현이 노인양반을 더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성혜에게 전화가 왔는데 선물이 너무 좋아서 매일 그 선물을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만 난대. " 글쎄 그 녀석이 정말 할머니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 기분 좋으시라고 들려드린 것인지 진위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손녀의 감사표현에 선물주신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시고 계셨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속으로만 고맙게 여기고 아무런 표현을 안 한다면 할머니의 그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우리의 표현이요, 행위입니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안겨준 이원희 선수가 둘러메치기로 한판승을 거두었을 때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두 손을 하늘로 올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방송기자가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의 기분이 어떠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고 했습니다. 이번 9명의 금메달리스트 중 7명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영광 여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고 했습니다. 감사는 표현되어질 때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 이런 즐거운 고민이 이번 추석 명절을 맞아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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