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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더 나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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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한 바리톤의 음성과 베이스의 음색은 음악에서 무게감과 안정감을 주어
큰 감동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박국서를 읽다보면 작은 소리들의 이어짐 속에서 중간중간 큰북의 울림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선포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의 큰 소리가 되어서 다른 모든 작은 소리들을 잠재워버립니다.
2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장 14절에는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2장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를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늘의 소리
사람들의 소리, 인간의 부르짖음은 소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작은 목소리들이 자기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고
아우성과 싸움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큰 소리와 외침이 필요합니다.
모든 작은 소리를 누릴 수 있고 잠재울 수 있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그 소리는 하늘의 소리이며 힘있는 자의 소리입니다.
하늘의 소리, 큰소리는 항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 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도 아닙니다.
적은 자들에게 가끔 들리는 소리인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특별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도 말고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큰소리를 할 수 있는 자가 되고 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십시오.
하박국 선지자는 많은 말을 하던 사람이요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런 음성을 많이 듣지 못했고 자신의 많은 소리가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작은 말, 큰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거기엔 확실한 어떤 해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큰 북소리처럼 가슴을 울리고 벌벌 떨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잡다한 지식적 이야기 앞에서 사람의 영혼은 녹아지지 않습니다.
그 영혼은 너무도 강퍅하고 부패해 있어서 녹아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큰소리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고
작은 소리 앞에서 서서히 녹아나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큰소리로 들을 수 없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작은 소리는
잠 오게 하는 수면제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큰소리에 무릎꿇는 인생은 작은 소리의 세미함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시절, 첫 목회시절 많은 이야기, 논리적 이야기로
설교를 꾸미려고 애를 썼습니다.
본문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고 인용하며 전달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작은 이야기를 큰소리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내 가슴을 적시고 성도들의 가슴에 파고들 수 있는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소리를 찾습니다.
들렸다 사라질 많은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에 오래 남을 감동의 한 메세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조금 더 나이가 들면 하나의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릅니다.
설교자가 바라보는 최대한 설교자의 특징은
가슴에 담아둘 것은 있어도 머리와 노트에 적어둘 것은 별로 없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깊다는 것은 많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가 주는 깊음을 찾으십시오. 거기에 집중하십시오.
우리는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주는 큰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작은 소리는 내가 스스로 묵상 중에
세미함으로 들을 수 있는 참 능력의 말씀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얼마나 큰 소리인줄 아십니까.
이 한 말씀 앞에서 무릎 꿇는 인생이 전체 그리스도인 중 10-20%는
족히 될 것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 비전의 말씀 앞에 큰소리로 들은 선교사들의 헌신이 각 민족과 방언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초기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기도에, 그 열정에
이 말씀이 있습니다.
미 장로교 선교사로서 처음 인천항에 부활절날 들어왔던 아펜젤러는
그때의 감동과 비전을 이렇게 선교보고서에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히 깨뜨리신 구세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120여 년 전 이 땅에 처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왔던
그들의 심장에 뛰던 복음의 열정과 비전은 지금
이 나라 전체를 교회의 십자가로 뒤덮게 된 상황에 대한 꿈으로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주석가인 Light Foot은
그리스도인의 맥박은 그리스도의 맥박과 함께 뛴다
고 말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2:20)
얼마나 장엄한 선언적 메시지입니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떨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그들 앞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심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잠잠할 수 있습니다.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발견하기 전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습득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과 이론을 가지고 있어도 잠잠하지 못합니다.
하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음성을 듣기 전에 취한 태도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1의 말씀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나의 침묵과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의 큰소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떨 수 있는 사람이 영성의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말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큰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큰소리를 듣고 싶어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앞에서
창자가 흔들리며 입술이 떨리던 하박국을 보십시오.
물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는 심판과 환란과 경고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란 날을 기다려야 하는 자의 떨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두려움과 놀람으로 서있는 인생이 있습니다.
즉 믿음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큰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의 소리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감사의 큰소리 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감사의 내용이 넘쳐 나서 드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감사는 마음 때문에 드리는 것이지 내용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에게 있어 환경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긴 침묵 속에 기다림의 긴 시간과 묵상을 통하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음성을 깨달으며 듣고 나서 그의 마음이 바뀌니까
이런 감사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가장 많은 작시자로 기억되는
Fanny J Crosby여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녀는 소경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눈병으로 인해 수술을 받다가 의사의 실수로 실명이 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고 그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다가 눈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영혼의 샘터에서는 영감의 시가 끊임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크신 주님을 만나고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으니
그는 수억의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킬 큰 찬송시를 남긴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갈길 다가도록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시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금 그 의사를 만날 수 있다면 나를 실명케 한 것에 대하여
몇 번이고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잘못되었지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로하여금 신체적으로 어두움에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더 짓고
다른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시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이었다고 믿습니다.
감사의 내용으로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 하는 자의 마음엔
감사의 샘 자체가 말라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여 감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는
은혜의 생수가 넘쳐 나서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요즈음 소비가 위축되고 취업이 힘들어져 한숨소리가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감사를 드릴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추수감사절의 역사가 알려주듯 퓨리탄들의 첫 번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결과로 드린 것이 아니고
추수할 수 있음에 대한 넘치는 감사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건강을 통해 생명을 연장케 하셨습니다.
생업이 유지도 되었고 학업도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로서는 뜻하지 않게 예배당까지 준비케 하셨습니다.
진정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감사의 내용들을 찾아 감사를 드리십시오.
더 나아가 감사할 수 없는 환경속에 있다할찌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을 회복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멋진 한우리로
자라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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