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어려울 때의 감사
본문
올 한 해의 농사는 비교적 잘 되어진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비가 자주 내려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가을비가 추수하는 계절에 많이 내린 때도 드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핸가도 벼를 베어놓고 탈곡을 하지 못한 채 비가 자주 내려 벼가 싹이 난 해가 있었는데 올 해도 그런 가정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올 해의 벼 수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지는 못하는 선에서 결정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정부에서 내놓
은 안은 통일벼 11%, 일반벼 12%를 올려 주겠다고 하고 수매를 시작했습니다만 농민들은 수매를 거부하면서 더 많은 값을 받고 싶어하는 실정입니다. 지난 며칠전에 MBC에서 `박경재 시사토론'이란 프로를 통하여 "쌀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몇명의 관계자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정부계통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나라의 형편과 사정을 감안하여 더 이상 올려줄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 하였고 농민 편에선 사람들의 입장은 정부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터무니 없이 많은 값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이 제시하는 값은 터무니 없는 값이 아니라 `쌀'이라고 하는 상품을 생산하여 판매할 때 소비자들이 사는 값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였는데 도시에 사는 근로자들과 같은 기준으로 계산할 때 작년 수준의 값보다 80%를 올려 받아야 맞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주장은 최소한 물가가 오른만큼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으며, 국가 공무원들의 봉급을 올려주는 수준만큼은 올려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가 농민들을 위하여 해준 것들 가운데서 제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농어민 후계자들을 교육시켜서 이들에게 후원금을 주면서까지 농어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하였지만 이 농어민 후계자들 마저도 정부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농어촌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지야 오래 되었지만 이젠 아예 결혼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농어촌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요즘들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한가지 한가지 말하다 보면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항상 느끼게 됩니다. 작년에 국민들을 향하여 `88 올림픽'을 치루면 무엇인가가 해결되지 않겠냐고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던 해를 넘겨 89년을 마감하는 지금, 우리가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감사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일들은 무엇이 있는가 올 한 해동안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고 노력한 댓가는 어디에서 받아야 할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나지만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웁다는 생각만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어려움 속에서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1. 현재 처한 어려움을 극복한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 " 무화과 나무 열매는 양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는 음료수로 쓰여졌습니다. 감람나무 열매는 기름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열매를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용어로 바꾸어 이를 표현한다면 직장을 잃었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처자식이 배고파하고 춥다고 하지만 먹일 양식과 입힐 옷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것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부른 때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자들은 빈손이 되었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즐거움이 패망한 우울함 속에 갖혀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기본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시며, 우리 영혼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나 육적 풍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은 물질에 있지 않고 육신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에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육신과의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있다가 없어졌든, 없다가 풍성하게 되었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과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물질이 있다하여 구원받는 것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요, 물질이 없다하여 구원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물질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는 모두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육신이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것도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에는 특별한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한 영혼은 그러므로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찬양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이를 알고 계시는지 모르시는지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까 보복을 할 것입니까 절망 가운데서 그냥 헤메고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 해도 기뻐하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겠다. "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신앙고백입니다. 다니엘 3장 17절부터 18절 말씀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 앞에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을 하였을 때 대답한 내용이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르게 믿는 자들을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동시에 혹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도와주지 않으신다해도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므로 자기네들은 다만 이에 순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꼭 도움을 받을 때에 감사하고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에야 고마운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고마운 것을 고마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단 10분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알면서도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때에는 평소에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이젠 어느 가정이나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 이외에는 평소에 전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품 안에서 살 때에는 고마움을 알기는 커녕 오히려 부모가 자기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로 알기가 쉽습니다. 부모의 곁을 떠나 살 때가 아니면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살 때에는 그 고마움을 쉽게 잊어 버립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그 사랑을 잊고 사는 것이 곧 우리들입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환난의 날이 닥쳐와도 소망 가운데서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의식주를 위한 모든 것은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6:33). 이것이 의인이 살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사람에게는 믿음 뿐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줍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이외의 기독교 신앙에는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물질에 관한 것이나 육신에 관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났든지, 어떠한 유익을 가져 왔든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 사람이 그러한 일에 관심을 나타내서 되어질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 결과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할 뿐입니다.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 처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고 해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사는 의인의 생활입니다. 어려울 때에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는 인자하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믿음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은 안은 통일벼 11%, 일반벼 12%를 올려 주겠다고 하고 수매를 시작했습니다만 농민들은 수매를 거부하면서 더 많은 값을 받고 싶어하는 실정입니다. 지난 며칠전에 MBC에서 `박경재 시사토론'이란 프로를 통하여 "쌀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몇명의 관계자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정부계통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나라의 형편과 사정을 감안하여 더 이상 올려줄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 하였고 농민 편에선 사람들의 입장은 정부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터무니 없이 많은 값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이 제시하는 값은 터무니 없는 값이 아니라 `쌀'이라고 하는 상품을 생산하여 판매할 때 소비자들이 사는 값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였는데 도시에 사는 근로자들과 같은 기준으로 계산할 때 작년 수준의 값보다 80%를 올려 받아야 맞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주장은 최소한 물가가 오른만큼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으며, 국가 공무원들의 봉급을 올려주는 수준만큼은 올려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가 농민들을 위하여 해준 것들 가운데서 제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농어민 후계자들을 교육시켜서 이들에게 후원금을 주면서까지 농어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하였지만 이 농어민 후계자들 마저도 정부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농어촌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지야 오래 되었지만 이젠 아예 결혼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농어촌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요즘들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한가지 한가지 말하다 보면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항상 느끼게 됩니다. 작년에 국민들을 향하여 `88 올림픽'을 치루면 무엇인가가 해결되지 않겠냐고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던 해를 넘겨 89년을 마감하는 지금, 우리가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감사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일들은 무엇이 있는가 올 한 해동안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고 노력한 댓가는 어디에서 받아야 할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나지만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웁다는 생각만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어려움 속에서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1. 현재 처한 어려움을 극복한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 " 무화과 나무 열매는 양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는 음료수로 쓰여졌습니다. 감람나무 열매는 기름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열매를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용어로 바꾸어 이를 표현한다면 직장을 잃었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처자식이 배고파하고 춥다고 하지만 먹일 양식과 입힐 옷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것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부른 때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자들은 빈손이 되었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즐거움이 패망한 우울함 속에 갖혀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기본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시며, 우리 영혼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나 육적 풍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은 물질에 있지 않고 육신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에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육신과의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있다가 없어졌든, 없다가 풍성하게 되었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과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물질이 있다하여 구원받는 것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요, 물질이 없다하여 구원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물질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는 모두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육신이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것도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에는 특별한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한 영혼은 그러므로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찬양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이를 알고 계시는지 모르시는지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까 보복을 할 것입니까 절망 가운데서 그냥 헤메고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 해도 기뻐하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겠다. "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신앙고백입니다. 다니엘 3장 17절부터 18절 말씀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 앞에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을 하였을 때 대답한 내용이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르게 믿는 자들을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동시에 혹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도와주지 않으신다해도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므로 자기네들은 다만 이에 순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꼭 도움을 받을 때에 감사하고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에야 고마운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고마운 것을 고마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단 10분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알면서도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때에는 평소에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이젠 어느 가정이나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 이외에는 평소에 전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품 안에서 살 때에는 고마움을 알기는 커녕 오히려 부모가 자기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로 알기가 쉽습니다. 부모의 곁을 떠나 살 때가 아니면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살 때에는 그 고마움을 쉽게 잊어 버립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그 사랑을 잊고 사는 것이 곧 우리들입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환난의 날이 닥쳐와도 소망 가운데서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의식주를 위한 모든 것은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6:33). 이것이 의인이 살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사람에게는 믿음 뿐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줍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이외의 기독교 신앙에는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물질에 관한 것이나 육신에 관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났든지, 어떠한 유익을 가져 왔든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 사람이 그러한 일에 관심을 나타내서 되어질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 결과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할 뿐입니다.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 처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고 해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사는 의인의 생활입니다. 어려울 때에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는 인자하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믿음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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