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감사의 차원
본문
우리는 또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들이 추수감사절을 맞는 마음이 그 어느 해에 비해서 더 감회가 큽니다. 예년에 없던 더위와 가뭄으로 인해서 농사를 모두 망치는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평년작을 이루었다고 하니 참 감사한 일 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생소한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참 기가 막힌 감사가 나와 있습니다. 하박국은 기원전 6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때 바벨론 침입압력으로 이스라엘의 온 땅은 온통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양식인 무화과나무며,포도나무며,감람나무며,밭에 심어 놓은 식물하며 모두가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 그리고 우리에서 소떼며 양떼들이 달아납니다. 그러니까 온 나라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망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큰 시련입니까.
그때 선지자 하박국이 기도하기를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그렇게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문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말씀 입니다. 마치 욥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뼈아픈 마음이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감사절을 맞이해서 감사의 차원을 발견하게 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기준” 입니다.
역시 감사는 이 땅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고 성숙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진정한 감사는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감사의 기도문을 보면 거기에 감사할만한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있다면 원망과 절망과 탄식할 조건만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보면 진정한 감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이가 있고 최고의 능력을 지닌 기도는 감사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그 지혜는 수난을 많이 겪고, 숫한 고난과 포로생활을 통해서 얻은 지혜입니다. 거기서 나온 지혜가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들을 보십시요, 시편은 모두 감사의 기도문들입니다. 그 기도문들은 모두 기쁨에서 나온 감사의 기도는 아닙니다. 거의가 다 환란과 고난을 겪으면서 그 고난 속에서 고백한 감사의 기도문들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모두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말씀하기를 “기도를 많이 하여야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감사의 기도를 해야 기도에 힘이 있고 응답이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느 성도가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나도 남편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하고 자조 섞인 마음으로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그 남편은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는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집은 찾아 왔는지 집까지 와서는 문 앞에 쓸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또 이 부인은 매일 같이 문간에 쓸어져 있는 남편을 끌어다 눕히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런 남편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잠자리에 들 기전 기도를 하려고 하면 신세한탄만 나오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울화가 치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스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 나를 저런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하고는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감사의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위력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해서 그날은 남편을 위해서 감사의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더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성령이 그에게 감동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생각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지금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하냐”, “또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희망이 있지 않느냐”, “저렇게 취해 있어도 용케도 집까지 찾아 와서는 문간 앞에서 쓸어져 주는 것도 고맙지 않느냐”. “그리고 토요일 날은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와서는 주일날 아침 늦게 까지 잠을 자고 있으니 집봐 줘서 교회 가기 좋지 않느냐”는 등등의 생각이 마구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더라고 합니다.
이 부인이 생각나는 대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편 마음속에서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남편이 목이 말라서 잠을 깨 가지고 눈을 살며시 떠보니까 아내가 옆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웃어 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그때 남편이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묻더랍니다. 이 지혜로운 아내가 대답하기를 “당신 같은 남자하고 사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웃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그 말 한마디에 감동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다음 주일 부터 교회 나가줄께”그르더랍니다. 그것도 우연이겠습니까. 이 여인이 10년을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는데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단 한번의 감사의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감사의 찬송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감사한 삶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감사할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보면 그 누구보다도 더 진하고, 감동적이고, 진솔한 감사의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바로 거기서 부터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 우리들이 추수감사주일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지당한 감사입니다.
다음은 “감사의 발견“ 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메마르게 되면 그 마음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선물을 주셔도 그것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부모를 주시고, 좋은 자식들을 주셨어도 이 땅 집집마다 가보면 감사함보다는 원망과 시비와 갈등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그 감사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강단을 장식한 호박을 보십시요. 이 호박이 얼마나 큽니까. 이 호박은 아주 조그만 씨를 하나 심었는데 이렇게 큰 호박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의 호박이 열렸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 입니까. 이 조그만 씨 하나를 심었는데 이렇게 큰 호박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주셔도 느낌이 없다면 그 마음은 분명 병든 마음입니다.
엊그제 시골길을 차를 타고 가면서 과수원 옆을 지냈습니다. 빛깔 좋은 과일들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가지가 찢어져서 막대기로 바쳐 놓을 만큼 많이 열었습니다. 그 과일 나무는 해마다 심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심어 놓기만 하면 매년 그렇게 열어 줍니다. 그리고 매년 그냥 가서 따다 먹고 내다 팔면 돈이 생깁니다. 그러면 고마운 일이지 뭘 더 바랩니까.
요즘 도시인들은 자연과 멀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까 가슴이 자꾸만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거기서 감사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죄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 차원에 머물게 되면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부적을 여러 곳에 붙여 놓아도 도깨비가 무식해서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것을 주시고, 좋은 것을 주셔도 그 뜻을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무슨 감사의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요. 이 감사의 기도문이 얼마나 기가 막힌 감사의 노래입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이 감사하는 이 감사는 얼마나 손쉬운 감사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감사의 시기” 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생 중에서 언제가 가장 감사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이 다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다음 목적했던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날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기도 하고, 인내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 날이 되면 정말 행복해 집니까. 목적했던 대로 돈을 많이 벌면 기대했던 만큼 행복해 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대일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무 오해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을 경히 여기고, 또 오늘을 소홀히 여기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펄벅이 쓴 대지라는 소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룡이라는 주인공 청년이 농사를 짓는데 매해 흉년이 듭니다. 죽도록 농사를 지어 놓으면 홍수가 나서 쓸어버리고, 또 땀흘려 농사를 지어 놓으면 수확기에 가서 황충이 떼가 와서 농작물을 모두 갉아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농촌을 떠나서 아내와 함께 도시로 갑니다. 가서 리어카 하나를 사서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밉니다. 땀을 흘리며 그날 그날을 부부가 함께 고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그 생활에 매우 행복해 합니다.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땀흘린 만큼 돈을 벌고, 그날 그날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몇 해 후에 그들은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 와서 땅을 사고 큰집을 사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이고, 소망이고, 꿈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여기서 끝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럴 목적으로 돈도 벌고 땀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의 방향은 그렇게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 왕룡이라는 남편이 땅을 사고, 큰집에서 살고, 머슴을 부리게 되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하루는 첩을 하나 데리고 들어 와서는 부인을 부엌으로 내 보내고 첩을 안방에 앉혀 놓습니다. 그리고 조석 때가 되면 이 부인은 밥상을 안방으로 들여놓고는 자신은 붓두막에 밥그릇을 놓고 그곳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마디를 내 뱉습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남편은 리어카 앞에서 끌고 자신은 뒤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가던 “그 때가” 좋았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결코 부하지도 않고, 집도 크지 않은 도시에서 땀흘리고 살아갈 그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금 굉장히 오해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평생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내일이 더 나을 것 같고, 내년이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그날이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때는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인 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이 행복한 날 인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내일이 되어도 행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내일 하는 것이 아니고, 내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시간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감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도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를 심었는데 소출이 보잘 것이 없고, 밭에 심은 곡식은 소출도 없고, 우리 안에는 소도 없고, 양도 없고, 어디를 보아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감사합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얼마나 간절한 감사의 기도입니까. 이것이 진정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후에는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차원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정말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감사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생소한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참 기가 막힌 감사가 나와 있습니다. 하박국은 기원전 6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때 바벨론 침입압력으로 이스라엘의 온 땅은 온통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양식인 무화과나무며,포도나무며,감람나무며,밭에 심어 놓은 식물하며 모두가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 그리고 우리에서 소떼며 양떼들이 달아납니다. 그러니까 온 나라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망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큰 시련입니까.
그때 선지자 하박국이 기도하기를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그렇게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문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말씀 입니다. 마치 욥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뼈아픈 마음이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감사절을 맞이해서 감사의 차원을 발견하게 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기준” 입니다.
역시 감사는 이 땅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고 성숙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진정한 감사는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감사의 기도문을 보면 거기에 감사할만한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있다면 원망과 절망과 탄식할 조건만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보면 진정한 감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이가 있고 최고의 능력을 지닌 기도는 감사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그 지혜는 수난을 많이 겪고, 숫한 고난과 포로생활을 통해서 얻은 지혜입니다. 거기서 나온 지혜가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들을 보십시요, 시편은 모두 감사의 기도문들입니다. 그 기도문들은 모두 기쁨에서 나온 감사의 기도는 아닙니다. 거의가 다 환란과 고난을 겪으면서 그 고난 속에서 고백한 감사의 기도문들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모두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말씀하기를 “기도를 많이 하여야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감사의 기도를 해야 기도에 힘이 있고 응답이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느 성도가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나도 남편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하고 자조 섞인 마음으로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그 남편은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는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집은 찾아 왔는지 집까지 와서는 문 앞에 쓸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또 이 부인은 매일 같이 문간에 쓸어져 있는 남편을 끌어다 눕히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런 남편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잠자리에 들 기전 기도를 하려고 하면 신세한탄만 나오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울화가 치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스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 나를 저런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하고는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감사의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위력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해서 그날은 남편을 위해서 감사의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더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성령이 그에게 감동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생각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지금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하냐”, “또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희망이 있지 않느냐”, “저렇게 취해 있어도 용케도 집까지 찾아 와서는 문간 앞에서 쓸어져 주는 것도 고맙지 않느냐”. “그리고 토요일 날은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와서는 주일날 아침 늦게 까지 잠을 자고 있으니 집봐 줘서 교회 가기 좋지 않느냐”는 등등의 생각이 마구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더라고 합니다.
이 부인이 생각나는 대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편 마음속에서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남편이 목이 말라서 잠을 깨 가지고 눈을 살며시 떠보니까 아내가 옆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웃어 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그때 남편이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묻더랍니다. 이 지혜로운 아내가 대답하기를 “당신 같은 남자하고 사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웃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그 말 한마디에 감동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다음 주일 부터 교회 나가줄께”그르더랍니다. 그것도 우연이겠습니까. 이 여인이 10년을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는데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단 한번의 감사의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감사의 찬송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감사한 삶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감사할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보면 그 누구보다도 더 진하고, 감동적이고, 진솔한 감사의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바로 거기서 부터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 우리들이 추수감사주일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지당한 감사입니다.
다음은 “감사의 발견“ 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메마르게 되면 그 마음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선물을 주셔도 그것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부모를 주시고, 좋은 자식들을 주셨어도 이 땅 집집마다 가보면 감사함보다는 원망과 시비와 갈등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그 감사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강단을 장식한 호박을 보십시요. 이 호박이 얼마나 큽니까. 이 호박은 아주 조그만 씨를 하나 심었는데 이렇게 큰 호박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의 호박이 열렸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 입니까. 이 조그만 씨 하나를 심었는데 이렇게 큰 호박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주셔도 느낌이 없다면 그 마음은 분명 병든 마음입니다.
엊그제 시골길을 차를 타고 가면서 과수원 옆을 지냈습니다. 빛깔 좋은 과일들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가지가 찢어져서 막대기로 바쳐 놓을 만큼 많이 열었습니다. 그 과일 나무는 해마다 심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심어 놓기만 하면 매년 그렇게 열어 줍니다. 그리고 매년 그냥 가서 따다 먹고 내다 팔면 돈이 생깁니다. 그러면 고마운 일이지 뭘 더 바랩니까.
요즘 도시인들은 자연과 멀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까 가슴이 자꾸만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거기서 감사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죄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 차원에 머물게 되면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부적을 여러 곳에 붙여 놓아도 도깨비가 무식해서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것을 주시고, 좋은 것을 주셔도 그 뜻을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무슨 감사의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요. 이 감사의 기도문이 얼마나 기가 막힌 감사의 노래입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이 감사하는 이 감사는 얼마나 손쉬운 감사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감사의 시기” 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생 중에서 언제가 가장 감사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이 다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다음 목적했던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날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기도 하고, 인내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 날이 되면 정말 행복해 집니까. 목적했던 대로 돈을 많이 벌면 기대했던 만큼 행복해 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대일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무 오해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을 경히 여기고, 또 오늘을 소홀히 여기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펄벅이 쓴 대지라는 소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룡이라는 주인공 청년이 농사를 짓는데 매해 흉년이 듭니다. 죽도록 농사를 지어 놓으면 홍수가 나서 쓸어버리고, 또 땀흘려 농사를 지어 놓으면 수확기에 가서 황충이 떼가 와서 농작물을 모두 갉아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농촌을 떠나서 아내와 함께 도시로 갑니다. 가서 리어카 하나를 사서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밉니다. 땀을 흘리며 그날 그날을 부부가 함께 고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그 생활에 매우 행복해 합니다.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땀흘린 만큼 돈을 벌고, 그날 그날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몇 해 후에 그들은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 와서 땅을 사고 큰집을 사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이고, 소망이고, 꿈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여기서 끝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럴 목적으로 돈도 벌고 땀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의 방향은 그렇게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 왕룡이라는 남편이 땅을 사고, 큰집에서 살고, 머슴을 부리게 되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하루는 첩을 하나 데리고 들어 와서는 부인을 부엌으로 내 보내고 첩을 안방에 앉혀 놓습니다. 그리고 조석 때가 되면 이 부인은 밥상을 안방으로 들여놓고는 자신은 붓두막에 밥그릇을 놓고 그곳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마디를 내 뱉습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남편은 리어카 앞에서 끌고 자신은 뒤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가던 “그 때가” 좋았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결코 부하지도 않고, 집도 크지 않은 도시에서 땀흘리고 살아갈 그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금 굉장히 오해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평생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내일이 더 나을 것 같고, 내년이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그날이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때는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인 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이 행복한 날 인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내일이 되어도 행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내일 하는 것이 아니고, 내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시간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감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도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를 심었는데 소출이 보잘 것이 없고, 밭에 심은 곡식은 소출도 없고, 우리 안에는 소도 없고, 양도 없고, 어디를 보아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감사합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얼마나 간절한 감사의 기도입니까. 이것이 진정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후에는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차원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정말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감사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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