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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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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추수감사주일은 미국과 카나다에 속한 교회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이렇게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1619년 12월 4일 38명의 영국 이주민들은 지금의 버지니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 그룹의 선언서는 해마다 그날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날로 지킬 것을 규정하였다.
첫해의 매사추세스의 무서운 겨울은 그 이주민들의 반절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1621년 여름 새로운 희망이 솟아 올랐다.
정착민들은 콩이나 밀의 변변챦은 수확에도 불구하고 좋은 옥수수 수확을 기대하였다.
이른 가을 주지사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주민들이 이룬 진보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추수 감사 축제를 준비하였다.
축제는 3일간 계속되었고, 오리와 거위 칠면조들을 잡았고, 약 90명의 인디안들도 그 축제에 같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다섯 마리의 사슴을 내어 놓았다.
일견 이 추수감사주일이 미국 교회 역사에 속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의 전통을 굳이 지켜야 하는가 하여 추석 때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그럼에도 이 추수감사주일이 추석 시기에 드려지거나 아니면 11월 3째 주에 드려지거나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감사를 드렸던 그 당대의 사람들은 미국 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 추수가 풍성하였기에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사실적으로 감사를 드릴만큼 풍성했기에 감사드린 것 아니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그들 수의 반절이 그 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서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그 이듬해 수확도 옥수수 이외에 그들이 감사할 작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 옥수수로 연명하게 되었음을 고마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앙적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앙적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신앙적 자유를 찾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왜 이러한 감사를 요청하시는가
감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어떤 도움이 되기 때문인가
감사는 절대적 신뢰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비록 참담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기대를 지닌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사는 곧 감사하는 사람에게 지극한 기쁨을 가져온다.
감사를 요청하는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감사할 수 있음에서 오는 기쁨을 우리들 자신들이 소유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확신에서 오는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다.
이 절대적 신뢰야말로 바로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는 기쁨의 이유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현실은 참담하였다.
1장 2절에서 부르짖는 그의 외침이 그것을 보여준다.
"오 주여 내가 도움을 위하여 얼마나 오랜 동안 부르짖어야만 합니까
그리고 당신께서 듣지 않으실 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포악함이여'라고 부르짖지만 당신은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왜 당신은 나로 하여금 부정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파괴와 포악함이 있고, 싸움과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율법은 무시되고 공의는 전혀 세워지지 않고 있으며, 악인들이 의인들을 둘러 싸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내의 악한 상황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바벨론 나라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선지자는 다시 묻는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1:13)
바벨론 나라는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나라인데 더 악한 나라가 덜 악한 나라를 징계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회복시키신 후에 악한 나라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에 선지자가 직면한 경험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그와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직면할 임박한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3:1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하여 약속되어진 회복의 스케줄에 대한 기대로 또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7-18).
우리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다.
우리의 현재는 궁극적인 구원에로의 '서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영광에로의 부르심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의지)이기 때문이다(살전5:18). "라고 말하였는데, 그 감사의 근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좆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와 같이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살전4:16-17). "
우리가 지닌 기쁨의 근원은 낙엽을 태우듯이 확 일어났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불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늘 그러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라니 우리의 기쁨은 완전히 무르익은 불길과 같은 것이다
이 기쁨은 은은하면서도 끈기 있게 열을 내는 잘 펴진 불과 같은 것이다
이제 막 불이 붙은 것과 같은 소리 없어 보여도, 우리 안에 가져다 주는 내적 소망의 기쁨의 발휘되는 힘은 훨씬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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