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추석명절과 감사신앙(히11장1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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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과 감사신앙(히11장13 -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요8:56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고후4:18, 빌1:23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창11:31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막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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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의 명절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3대 절기를 매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정월의 설날과 오월의 단오절, 그리고 팔월의 한가위 추석명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추석명절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감사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이든 일년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가을에 수확하고는 각기 나름대로 축제의 명절을 갖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해에 거둔 햇곡식으로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추석명절이 있는데 이 제사의 방법도 일종의 감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석 명절의 기원은 삼국시기 유리왕 때에 여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길쌈놀이를 하다가, 이날만 되면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고 햇과일을 서로 나눠 먹는 날로 지낸 것이 추석명절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추석명절을 맞아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1. 추석명절을 감사의 명절로 지킵시다.
추석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한국적 추수감사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 옷 입는 절기입니다. 어릴 때 추석과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맛있는 것들을 먹는 즐거움과 또 새 옷을 입는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IMF시대라 좀 퇴색하긴 했지만 추석은 새 옷을 입는 날입니다. 옷은 몸을 보호하여 직사광선을 막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줍니다
. 또 옷은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입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기도 하는데 구약시대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었습니다.(레6:10) 누구나 새 옷을 입기 원합니다. 새 옷 입는 절기에 하나님께서 추천하는 옷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공로의 옷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계3:18)하셨습니다. (레13:52)에 보면 문둥병자의 옷은 불살라 버렸습니다.
에베소서4장22-24절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죄의 옷, 사망의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61장10절에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임하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옷을 입혀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1:21) 그러므로 구원의 옷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추석은 새 옷을 입는 날입니다. 이번 추석엔 낡아 누더기가 될 그런 못만 말고 영원히 낡지도 않고 더럽히지도 않는 영원한 새 옷을 입으시길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의 의(義)란 더러운 옷 같아서(사64:6) 이런 옷을 입고서는 거룩한 혼인 자리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마22:12). 주님의 피 공로 의지하는 새 옷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지구를 만들 수 없고, 지하수 개발은 할망정 물 자체를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나, 비를 내리는 것 모두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농사를 지어 거두면서 도움을 준분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다른 도움이 무엇일까? 누가 도와 주셨을까?"하고 생각하다가 그 도운 분이 조상(祖上)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조상에게 드린 겁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잘못입니다.
죽은 조상이 복을 준다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살아 있을 때도 자손에게 복을 못 준 부모가 죽어 흙이 되어 버린 후에 무슨 복을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부모를 종교의 대상으로 만든 유교입니다.
원래 유교는 학문입니다.
종교가 되려면
(1) 신앙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2) 내세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3) 윤리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교는 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도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선 추모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축복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감사의 대상이 일월성신도 아니고, 속이 빈 고목도 아닙니다. 우뚝 솟은 산도 아니며 깊은 바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할 대상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121:1-2)하였고,
시136:25-26에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추석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불평할만한 조건 속에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십시다.
존 번연은 죄책감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는 말씀을 읽고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감사 조건보다도 앞서 감사해야 할 조건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희랍인의 세 가지 감사
첫째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남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희랍인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니 희랍인이 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홀로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다행하게도 대상을 바로 찾았으니 끊임없이 그에게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추석하면 풍성한 햇과일과 햇곡식을 가지고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되는데, 좋은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곡식을 잘 자라 열매 맺도록 햇빛과 비를 내려 잘 길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어야 합니다.
성경에 "감사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손이 땅에서 강성하고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넘치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명절만 돌아오면 걱정부터 앞서고, 재정적인 문제, 과중한 일, 시댁 식구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추석명절을 기하여 부모와 형제, 그리고 불우한 이웃과 친척을 생각하는 절기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효도관은 부모님의 생존 시에 효성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부모 형제를 주심을 감사하고, 이웃과 친척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공경과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절기로 발전시키기를 바랍니다. 이번 추석명절을 기하여,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성이 담긴 음식상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상에 둘러앉아 가족들과 예배드리십시오. 그런 후에 부모님께 공경을 예의를 표한 다음, 여기서 예의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봉투이상이 없는데, 배추 잎사귀보다 더 좋은 하얀 종이로 된 것으로 표하십시오. 또한 가족끼리 정다움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형제끼리 우애도 증진시키십시오. 그렇다고 오고가는 현찰 속에 뭐가 싹튼다는 고스톱만 치지 마시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놀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과 친척을 찾아뵙는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이취에 대기근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다 못해, 한 부자가 20명의 어린이를 불러놓고, 여기에 빵을 놓아 둘 터이니 한 개씩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매우 굶주렸기 때문에 서로 큰 것을 가지려 싸우고 야단났습니다. 힘 쎈 아이부터 하나씩 차지하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한 아이가 이 싸움에 끼지 않고, 자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모두가 다 돌아가고 조용해지자, 빵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제일 작은 빵 하나를 집어내어 기쁜 얼굴로 주인을 찾아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도 그들과 다투지 않고, 어제와 같은 작은 빵을 가지고 역시 감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이는 이 빵을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맛있게 먹으려 하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빵 속에 빛나는 50센트 은화가 6개나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워 아이에게 "아무래도 네가 잘못 가져 온 모양이다. 이런 돈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니, 곧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돌려 드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주인에게 그 은화를 돌려드리려 갔을 때, 주인 할아버지는 착하고 감사할 줄 아는 아이야! 이 돈은 틀림없이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착한 네게 상으로 주기 위해 일부러 빵 속에 넣고 굽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제부터는 내 손자가 되어 나와 함께 살자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명절에는 제일 작은 것을 택하여 감사해 보십시오.
손해 보는 것 같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그 작은 것에 감사함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추석명절에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 더 좋은 본향을 주심에 감사하고,
부모와 가족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이웃을 주신 것 또한 감사하고,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주신 하나님께 이번 추석 명절에 감사하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대해 행해야 할 의무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 전서5:18에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감사의 고백이라 할 정도로 감사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성경전체 184번이나 감사라는 단어가 쓰였고 그중 시편은 전부 15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감사"라는 단어가 76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감사하라"는 명령구절이 35번이나 반복되고 있음을 통해 하나님이 감사고백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성도는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범사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며 성공했을 때에나 실패했을 때에나 어떤 일에든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결실의 절기인 추석을 맞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말로만의 감사가 아닌 예배로서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받으시는 최고의 감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민족을 들어 쓰십니다. 감사하지 않고 귀하게 쓰임 받은 민족이 없었고, 개인도 없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축복 받은 미국은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국가의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 죄 많은 여인, 삭개오등 모두가 감사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다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감사는 벽을 향해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불행은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은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에겐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마귀도 물리칩니다.
감사하는 집과 감사하는 신앙생활은 마귀가 틈 탈 길이 없습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칩니다. 감사는 영혼에도 축복이 되어 건강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죽으면 다 죽고 감사가 살면 다 삽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건강하며, 감사하는 사람은 소망이 넘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2. 본향을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13,14).
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공원 청소부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청소를 하는 중 벤치에 앉은 나그네를 보고“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그네가 대답하길 “글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도리어 이 나그네는 반문을 하듯 했습니다.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이 나그네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방향이 다르기는 했지만 공원 청소부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내용은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73:20절에서는 인생은 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90:5절에서는 잠깐 자는 잠으로 표현했고. 욥기7:6절에서는 베틀에 북보다 더 빠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 이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표현은 그림자와 같은 인생(대상29:15, 전6:1·2) 꽃과 같은 인생(욥14:2, 시103:15, 사40:6). 풀과 같은 인생(시37:2, 사40:6-8, 약1:10, 11).
손바닥만한 인생(시39:5) 지렁이 같은 인생(사41:14) 안개와 같은 인생(약4:14)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는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서 인생을 나그네의 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창47:9, 대상29:15, 벧전2:11). 그렇다면 왜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지나갈 뿐입니다. 나그네의 특징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옮겨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처럼 날마다 날마다 옮겨가는 인생입니다. 오늘의 얼굴이 어제의 얼굴이 아니며. 오늘의 몸이 어제의 몸이 아닙니다. 사진 속에 내 얼굴은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변함이 없지만 사진 밖에 실물인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 들어있는 내 얼굴이 아무리 곱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나는 다시금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오늘 이 순간에도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늙은 나이며.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늙은 나일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이처럼 출생에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단1초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는 나그네 길인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나그네인생들이 정착할 장소가 아니라 잠시 들러 가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자기 소유의 땅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100년 이상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소유의 땅에 자기 힘으로 호화스러운 집을 마련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집에서 한껏 오래 살아봤자 100년 미만입니다.
얼마 전에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묵었던 제주의 어느 호텔은 하룻밤 방세가 280만원이라고 합니다. 놀랄만한 일이지요? 그러나 타이거 우즈도 그 호텔방에서 며칠을 묵고는 떠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잠시 거쳐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은 결국 오래가지 못합니다.
대통령 자리가 좋다고 해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지 않으려고 갖가지 추악한 방법을 다 동원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씨도 결국 그 자리에서 오래 앉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세를 자기 손안에 언제까지나 잡아두려는 욕심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끈으로 잡아매어 두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람은 오늘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고 계속에서 진행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그네 인생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땅 사놓고 집사놓고 권세 얻어서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언제나 앞으로 다가올 새 세계에 대한 기대와 소망 속에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행진해 나갑니다.
나그네 가는 길은 험난하고 고독합니다. 야곱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바로 왕이 묻기를 “네 연세가 얼마뇨? ”하고 물었었습니다. 이때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 이다. 나의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나그네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길이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임하셨던 길이었음에도 (창28:13-15, 321:10)불구하고 역시 그도 인간인지라 이 땅위에서 생활은 고난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 나그네 길은 누구에게나 고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 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1:12-13)
이 말씀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인생 나그네 길이 괴로움과 수고뿐인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2:22-23)정말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일평생 동안 근심과 수고 속에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범한 인간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나폴레옹이 센트헤레나 섬에서 운명하기 직전 마지막 남긴 말 중에서 “육대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천만인의 한숨이요.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바닷물은 백만 인의 눈물”이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의 이 고백처럼 그의 일생은 한숨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인생들의 가는 길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들은 나그네 길과 같이 험난하고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다만 우리가 스치고 지나갈 거친 광야요. 험악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영원히 안주할 곳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의 가는 길은 먼 거리가 아닙니다. 나그네 길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곧 목적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길입니다. 인생은 짧고 빠릅니다. 오래 살아야 100년 미만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건강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참으로 냉혹하고도 분명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내 인생은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인생이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금방 늙습니다. 그리고 금방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의 가는 길은 결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짧은 거리입니다. 쉬 끝나는 길입니다. 나그네 길은 금방입니다. 우리가 늙는 것과 죽는 것도 금방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구역예배 인도 하는 것, 주일마다 식당에서 밥 짓는 것, 등등을 가지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명감당하는 일도 금방 지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길이 힘듭니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힘듭니까? 불평하지 말고 충성하십시오. 세월은 금방 지나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세월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맡겨졌을 때 열심을 다하여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의 삶은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정한 시간 안에 목적지로 가야할 자가 길에서 한눈을 판다면 그는 낙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례자인 나그네의 삶인 것을 잊어버리고 과정의 길에서 만족을 누리다가 그 여행을 중도에서 포기한 인생들을 많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이 나그네의 길임을 알면서 그 발걸음을 중간에 고정시켜 버리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세상 문화를 주도하며 쏟아져 나오는 영상물들을 살펴보면 영화, 드라마, 선정적인 댄스를 가미한 노래 등에서 안심할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혼전동거가 미화되고 내용 없는 바람피우는 가정파괴의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흥밋거리로 방영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야말로 토할 것 같은 악의홍수들입니다. 한 시기를 지나고 나면 한눈팔게 한 것 밖에 되지 않을 무가치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주어 미래의 삶까지 좀먹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그네는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흔적만 남기고 지나갑니다. 나그네 길에서 우리는 다시 그 길을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일을 자랑하고자 한다면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나의 발걸음을 늦추게 할 뿐입니다. 지식도 명예도 권력도 다 지나갑니다. 자랑하다보면 허무감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한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합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처럼... 동방박사들은 별을 바라보는 동안 여행이 피곤하지 않았고 즐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하고 기뻐하는 동안 그것이 아무리 역경의 길이고 고통의 길이어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못하고 슬프게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별 없는 동방박사를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지개 빛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비 그리스도인들과 타 종교인들은 운명론적인 성향들이 있어서 쉽게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뚜기 같은 근성을 갖고 때론 투쟁도 하고, 죽음을 무릎쓰고 기도하며 이겨나갑니다. 그러다보니까 더한 승리요 체험도 맛보고, 주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인 유교문화가 20세기 21세기 한국의 부흥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힘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인생길에서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요한일서 2장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무엇일까요? 욕심은 빨리 움직여야할 나그네에게 그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무거운 짐입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나그네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나그네 인생길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 가족까지 포기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그런 은사가 없어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욕심들은 좀 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욕심이 많은 사람은 절대로 바른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길의 표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살기 좋은 문화도시와 좋은 집을 포기하고 나그네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였다면 다시 길을 돌이켜 갈데아 우르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는 스스로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본 곳은 본향 하늘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는 세상을 위해 투자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투자는 본향을 위한 투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나라를 위해 세상의 것은 다 포기했습니다. 갈데아우르만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라면 생명 같은 독자 이삭도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 포기들이 하늘나라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였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나그네는 본향을 향하여 가는 이들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위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살면서 영원한 본향을 언제나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의 본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지나가는 갈대아 우르였지만, 그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다 나은 본향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처럼 땅에 있는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나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이니 우리가 나그네 길을 다 마치고 돌아갈 본향도 바로 그곳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우리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나그네 길은 종착역이 보다 더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본향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뵈올 때 “잘했다”칭찬을 받을 수 있을만한 나그네 길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거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나그네의 삶은 본향을 확인하면서 삽니다. 나그네는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에 그곳을 향하여 갈 뿐입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소망 없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는 나그네는 비관적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국적 있는 백성이고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가는 천국백성인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사랑하는 여러분,
본향의 한 성은 누구를 위해 예비 된 것입니까?
본향을 위해 투자한 인생들을 위해 그들이 누릴 영광의 처소로 준비된 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투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돈이 주어져도 투자할 줄 모르면 다 빼앗기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의 투자는 이처럼 모험이 따르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향을 위한 투자는 너무도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갈수록 이런 투자자들은 찾기에 힘이 드는 것일까요?
한가위가 되면 모두들 고향을 찾아 떠나갑니다. 객지 생활에 쫓기고, 고달픈 생활 때문에 잊어진 고향생각이 한가위가 되면 더욱 살아나고 고향을 향한 마음으로 들뜨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추석명절은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 그 얼마나 정다운 곳입니까? 그리운 고향산천,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정답던 옛 친구들,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좋은 곳입니다. 거기에는 고독을 달래주는 인정이 넘칩니다. 마음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다운 친구와 친척이 있습니다. 넘어질 때 붙들어주는 이웃과 슬픔을 당할 때, 위로해 주는 따뜻한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고향은 힘찬 용기와 희망의 원천인 것처럼 우리가 돌아갈 저 본 향지는 고달픈 나그네 길의 한 모퉁이에서 방황하는 인생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추석명절에 고향을 찾는 기쁨과 감사함이 있듯이,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고향, 즉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님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육신의 고향이 있듯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우리에게는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 육신이 태어난 고향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도, 고통도, 애통함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본향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천지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기쁨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동물 중에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이 많이 있습니다.
연어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 3년 동안 지내다가 큰 물고기로 자란 연어는 새끼를 낳으러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단순히 바다에서 왔다, 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개천으로, 개천에서 자신이 태어난 연못으로 돌아옵니다. 수많은 연어가 세찬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고 폭포를 뛰어 올라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물보다 더 빨리 올라간다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연어들이 몇 십 번이고 그렇게 뛰어오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이 폭포 밑에서 올라가려고 모여드는 물고기들을 낚아챕니다. 그래도 연어는 일심으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절대본능입니다.
추석은 고향 찾는 절기입니다.
고향 하면 괜히 마음이 설렙니다. 봄이면 진달래로 덮이고 얼음 다래 따러 헤매던 산, 낚시 담그고 검정고무신에 고기 더듬질하던 강, 소 끌고 건너던 징검다리…. 가을이면 햅쌀밥 먹고 알밤 줍던 생각, 소복하게 눈이 내린 겨울이면 처마 끝 참새 집을 뒤지던 일…. 추석날 고향 가 본 건 고사하고, 고향에 가본 기억도 어렴풋합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향!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떠나온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입니다. 떠나온 고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돌아갈 곳은 그 고향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조상들은 다 고향을 떠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요셉과 모세와 룻과 에스더, 다니엘…등등 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돌아갈 참 고향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요, 약속의 땅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하는 이 현실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기고 계시기 때문에, 타향 생활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참 고향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한가위 명절을 수 십 번이나 지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고향만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님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연어와 같이 우리가 태어난 영원한 하늘나라를 본향을 주신 것을, 성경 히브리서 11잘 14절에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위로와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땅에서 받지 못하고, 하늘에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현실이요, 과정입니다. 어차피 다 가질 것도 못되고, 다 할 수도 없고, 또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참 고향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해주신 참 고향, 우리에게는 갈 수 있는 고향보다, 더 나은 본향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받은바 은혜의 복을 헤아려야 합니다.
추석을 맞아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들판을 바라보니 얼마나 보기 좋은지요? 황금물결이 들판에 출렁이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정치도 어지럽고 복잡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가정과 교회를 지켜주셨고 여러분의 건강도 지켜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은혜는 껍데기 은혜이고 알맹이 은혜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한해 동안 날마다 때마다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에도 주를 찬송하며 예배드릴 수 있었고 맡겨주신 막중한 직분을 감당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왜 감사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복을 주었는데 그 복을 내가 얻은 것으로 알거나 또는 우연히 얻은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할 줄 모른다면 더 이상 복을 누릴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믿음, 가장 소중한 건강, 자기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느껴야합니다. 은혜로 감격해야합니다. 그리고 은혜로움 그 안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 된 현실을 보면서 은혜 앞에 자기 자신을 위탁해야 됩니다. 바로 그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요 바른 생이요 행복한 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불평하며 난리를 쳤을까요? 은혜를 못 받아서가 아닙니다. 받은바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홍해를 건넜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물을 마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아말렉을 쳐부술 수 있었습니까? 자신들의 힘으로입니까? NO!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에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하되 말로만이 아닌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며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올 때 공수(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추석에 풍성한 감사를 드릴 줄 아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 추석에 해야 할 일은 받은바 은혜를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이나 우리나라의 추석은 기쁜 날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혼자 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와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기뻐하며 잔치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 말로 번역하면 가족과, 회사 직원들과, 교회 목회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잔치하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여러분의 가족도 이웃이겠으나 여러분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을 세 단계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받는 단계요, 두 번째는 소유하는 단계요, 세 번째는 주는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땅에다 씨를 심는 단계, 자라나는 단계, 열매 맺어서 주인을 기쁘게 해주는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단계, 은혜 받는 단계, 은혜 받은 다음에는 주는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항상 은혜를 받으려고만 하면 안 됩니다. 10년 정도 믿었으면 교회 봉사를 하고, 이웃 사랑을 하고, 가진 것을 주기도 하면서 이제는 듣는 것보다 봉사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행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교회도 개척하는 과정이 있고, 개척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이 있고, 성장한 다음에는 자기 성을 짓거나 자기 바벨탑을 쌓지 말고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일보지난 16일자 1면에 나온 기사입니다. “내 어머니는 열다섯분”…노원署 박종규 경사, 독거노인 돌보기 6년. 서울 노원경찰서 하계지구대 박종규(47) 경사는 15명의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81) 외에 홀로 사는 14명의 어머니를 6년째 돌보고 있다.15일 오전 박 경사는 녹차 죽이 가득 든 냄비를 들고 할머니들 집을 찾았다.
철야근무에 눈꺼풀이 내려앉았지만 잠자리에 드는 대신 1시간 동안 정성을 들여 자신의 전매특허인 녹차 죽을 끓였다“어머니, 저 왔어요.”“염치없어 죽겠구먼. 바쁜 사람이 왜 또 왔어.”냉장고에서 김밥을 꺼내 데우려던 공옥연(92) 할머니는 말은 그러면서도 박 경사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할머니의 친아들은 5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살고 있다.“얼굴만 봐도 든든한데 왜 자꾸 이런 걸 들고 와.” “김밥은 소화가 잘 안돼요. 이 죽 드세요.”박 경사는 녹차 죽으로 점심을 차려 드린 뒤 어깨를 주물러주고 말동무가 됐다가 다른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박 경사는 이날 이렇게 7명의 할머니를 방문했다. 그가 독거노인을 돌보게 된 것은 1999년 말 치매 증세를 보이던 96세의 한 할머니가 길을 잃고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됐다. 박 경사는 노인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호주머니 속에서 빛바랜 사진을 발견하고 주변 복지관에 전화를 건 끝에 노인복지관에 머물던 할머니란 사실을 알아냈다. 박 경사는 그때부터 길 잃은 노인들을 찾아주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카메라와 노인들이 입을 한복을 마련해 공릉동, 상계동 등 주변 지역을 돌며 독거노인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는 곧 영정사진 봉사로 발전했다. 꺼림칙해하는 노인들이 있어 영정 사진에 ‘사랑의 장수사진’이란 이름을 붙이고는 웃는 모습만 찍었다. 지금껏 액자에 넣어 선물한 영정사진은 900개에 이른다. 그는 이렇게 정이 든 노인들을 계속 방문해 말벗도 되고, 산책을 하며 치과도 함께 갔다. 한때 60명 이상의 노인을 돌봤지만, 세상을 뜨거나 복지관에 들어감에 따라 이제 14명의 할머니와 친모가 남았다. 박 경사는 이번 추석에는 송편과 1인당 쌀 10㎏씩을 준비해 ‘어머니’들과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추석을 홀로 보내면 얼마나 마음이 울적하겠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교회,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열매 맺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단계의 사람입니까? 이 추석에 여러분은 어떤 것을 할 것입니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의 고향인 흙이 있고 영의 고향인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육의 고향은 변하고 시드는 곳이지만 영의 고향은 영원히 변치 않고 시들지 않습니다. 영의 고향에는 사망도 없고 애통하며 곡하는 것도 없으며 아픈 것도 없습니다.
(계21:4) 성경은 인생을 가리켜 "나그네"라고(벧전 2:11)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지상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나그네입니다. 인생은 지상생활이 나그네 생활이기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추석은 고향을 찾아가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추석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새 옷 입는 절기입니다. 이 좋은 절기에 주님의 은혜까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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