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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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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은 2000여년 전 주일 새벽에 어두움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시간에는 부활의 능력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려는 부활의 문제는 기독교의 기초요 핵심이요 어떻게 보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 부활의 교리만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마다 가지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도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부활의 교리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1. 부활의 과학적 증거 부활교리가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형성된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다 그 창시자의 무덤을 크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무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부활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 세상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12절)고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안과밖에는 우리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의심은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부활을 인정할 어떤 확실한 구체적 증명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반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절설, 도적설, 이거설 등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본 수많은 증인들이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처럼 비겁하였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미국의 우주과학자인 Wehrnher von Braun은 자기가 부활을 믿는 근본적 이유를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존재한 그 무엇도 흔적 없이 살아지는 것을 발견한 적이 없다. 자연에는 결코 사멸이란 것이 없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사용하여 그의 창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그렇습니다. 요11:25절의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대로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부활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 해 전에 애굽에서 밀봉된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3000년 전 모세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였습니다. 그 시체와 함께 돌처럼 바짝 마른 두어 개의 콩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박물관에 보내어져서 1844년 6월 4일에 심었습니다. 한 달 뒤에 싹이 나서 나중에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3000년 된 콩이 다시 싹이 나듯이 비록 먼지가 되고 흙이 되어도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부활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뿌리요, 시작이요, 끝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부활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부활을 이론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마치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2. 육체부활을 부인할 때의 결과(13-15절). 우리가 자신의 육체 부활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먼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실제적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부활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열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구체적 증거가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시작하여 나중에 스데반, 심지어 바울과 사도 요한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두 사람에게 라면 환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라도 한 두 번이라면 그것도 환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데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역사적 사건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설교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헛되게 한다는 말은 텅 비게 한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설교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모든 믿음의 핵심도 부활신앙입니다. 따라서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지난 2000년 동안의 모든 설교는 다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조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 중심이고, 핵심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부인하면 모든 설교가 다 거짓이요 헛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가 다 거짓 증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빌미로 헌금을 거두고, 봉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육체부활을 부인하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6-19절) (1)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죽은 모든 신자들은 다 “망하였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2)만약 부활이 없다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19절에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이 없었는데도 있다고 믿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의 권능은 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는 헌금이나 봉사나 희생이 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다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전부요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3. 부활의 능력은? 우리 예수님은 이천 년 전 바로 오늘 이 새벽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1)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마다 중생하게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현재적으로 영적인 부활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게 되고, 고백하게 되고 영접하게 되고 거듭나게 합니다. (2)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3)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저는 본래 허무주의자였습니다. 6. 25 때 의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록 부족한 자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로 서원 했던 것입니다. (4)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참으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재림 신앙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빛과 소금이 되어 삶의 참 의미에 대한 증거자로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그럼으로 날마다 담대하고, 기쁨으로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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