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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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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3-18)


이차대전 초기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파죽지세로 덮쳐 왔을 때, 미 태평양 부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급히 탈출해야만 할 형편에 처했습니다. 이미 일본군이 그 지역의 제공 및 제해권을 장악하고 맥아더 장군의 탈출로를 봉쇄하고 있었지만, 그는 작은 어뢰정 하나에 몸을 싣고 밤의 어두움을 틈타서 탈출을 시도하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의 길을 떠나면서도, 자기 뒤에 남겨 두고 가야할 휘하 병사들과 필리핀 국민들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I shall return.)’라고 약속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바로 그 말, 지켜질 가망성이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그 약속이, 남아 있던 미군들과 필리핀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힘을 주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미군들이나, 끝까지 게릴라전 등을 통하여 항쟁했던 필리핀 국민들의 마음을 끝까지 하나로 똘똘 뭉쳐 주었던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세 마디의 말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이 첫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바로 그와 같은 요긴한 말 하나가 필요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설립한 초대 교회들 중에서 상당히 모범적인 출발을 보여 주었던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 남쪽 지역에 있던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기로 유명했던 교회였다면, 북쪽에 있던 이 데살로니가교회는 첫 개척 당시부터 여러 가지 고무적인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당시에는 아직까지 이 교회가 그리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초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사도들로부터 충분한 신앙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이들은 나름대로 뜨거운 믿음도 있었고 성도끼리의 교제도 잘 해 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불안한 점이 많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실을 감안할 때, 무언가 그들의 심령들을 확고부동하게 하나로 모아 둘 수 있는 요긴한 말씀, 무언가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그 데살로니가교회를 끝까지 똘똘 뭉치게 만들 수 있는 핵심적인 한 단어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부활’이야말로, 바로 그 한 마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목회자나 사도를 모시지 못하고 있는 교회였지만, 적어도 부활 신앙 이것 하나만 확실히 붙들고 살면 그 데살로니가교회는 더욱 알찬 내실을 다지고 더욱 튼튼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자는 자들에 관한 소망’을 선포하면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왜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부활 신앙은 사람의 마음과 생활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처럼 불안하게 출발했던 데살로니가교회를 그처럼 강건하게 만들어 갔었습니까? 우리는 오늘 부활 주일을 맞이하면서, 왜 교회와 성도가 꼭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지켜야만 하는지 그 세 가지 이유들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죽음의 절망을 이기게 해 주는 소망이 됩니다.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에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부활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을 소망 있는 행복한 자들과 소망 없는 절망적인 자들로 나누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자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일찍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가리켜 ‘자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기독 신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영어의 ‘묘지(cemetery)’란 단어도 사실은 헬라어의 ‘잠자는 곳’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 불신자들도 죽음을 가리켜 ‘잠’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그저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단지 말을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믿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가리켜 ‘자는 자’ 즉 언젠가는 다시 깨어나게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결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성도의 죽음을 두고 인간적으로 슬퍼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죽음 앞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신자가, 전혀 소망 없이 절망 속에서 슬퍼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와 꼭 같은 자세를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불신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낙천적으로 살아 보겠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는 오로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하여 신자는 그런 죽음 앞에서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자입니다. 불신자들로서는 제일 슬퍼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일을 두고 신자는 오히려 최고로 즐거운 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야말로 성도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자라 하는 자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불신자 앞에서 도대체 다른 그 어떤 더 나은 소망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불신자들 앞에서, ‘내가 예수 믿었더니 돈 더 잘 벌리더라.’고 자랑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믿으니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요.’라는 것을 소망이라고 내어 놓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조차 소망을 주는 이 부활을 제쳐 놓고 다른 그 어떤 것을 통하여 신자 된 보람을 찾으려 한다면 정말 꼴불견의 신앙생활이며, 만일 그렇게 산다면 정말이지 헛고생하는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은 오직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소망이며 또한 신자라면 꼭 나눌 줄 알아야만 하는 가장 귀중한 소망인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 인생을 괴롭히고 절망시키려 할 때마다, ‘자는 자들도 소망이 있다.’라는 이 말을 심령에 간직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끝까지 함께 이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구원 신앙을 완성하게 해 주는 요소가 됩니다.



즉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헛된 신앙인 것입니다.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4-15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그 믿음이 곧 자신의 부활과 직결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즉 ‘믿는다면’,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데려 가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훌륭한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를 믿고 예수님의 비범한 인격을 믿는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자는 자’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란 그 예수님처럼 자신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자신도 죽음 가운데서 깨게 될 날이 올 것을 믿는 자들만을 가리키는 말임에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천명하면서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한다.’라고 확인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반드시 영생의 부활로 깨어나게 된다는 사실은, 바로 ‘주의 말씀’ 즉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증거해 주신 말씀이란 뜻입니다. 부활의 약속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니, 만일 이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다른 좋은 말씀들은 받아들인다 해도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꼭 같게 되는 것입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이 말씀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믿음이 약한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 일부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천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재림을 기다리다가 먼저 죽게 된 사람들은 아까운 신앙 생활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에 생긴 이런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님 재림 때에는 그 전에 죽었던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성도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제 딴에는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고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깨달았다 할지라도 이 결정적 요소, ‘부활’이 그 신앙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앙은 여전히 불완전한 것입니다. 아무리 평생 교회를 출석하고 봉사했다 하더라도 본인이 이 부활 신앙을 가지지 않고 죽으면, 그 신앙생활이란 것은 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는 비완성의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이야말로 신자가 신앙적으로 성장하여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꼭 깨달아야 할 진리이며, 재림하실 주님을 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꼭 간직하고 있어야 할 신앙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님 믿는 길은 없으며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로 깨어날 길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예수와 함께 산다’는 이 멋진 신앙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우리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까지 한 명도 낙오 없이 다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서로 위로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성도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이란 정말 별 것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6-18에 기록하기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라 /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재림 순간에 벌어질 장면을 간략하면서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라는 일련의 신호들과 함께 개시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호령’이란 ‘큰 소리로 외치는 명령’이란 뜻의 단어인데, 배의 선장이 노 젓는 선원들에게 외칠 때라든지, 군대에서 지휘관이 사병들에게 구령을 내릴 때와 같은 경우에 쓰인 말입니다. 어떤 말씀의 호령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재림을 알리는 주님의 호령 일성이 터져 나오면, 천사장의 복창 소리가 따르게 될 것이고, 곧 이어서 천지를 아니 우주를 진동시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그때까지 살아 있던 성도들과 함께 공중으로 휴거되며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여기에서도 그렇지만 성도가 천국에서 어떤 생활하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가장 강조하는 내용이 바로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천국 생활은 바로 여기에 모든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천국이 그처럼 행복하고 좋은 곳이 되는 최고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당이 열두 진주 문이 있고 황금 길이 있어서 그리 좋은 곳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천당에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열려 있어서 그처럼 행복한 곳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배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천당이 그처럼 좋은 곳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 곳이 바로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서로에게 정말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가 다 생명의 부활로 깨어나고 그 주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 있더라도 그 때까지 인내하고 신앙생활 잘 하십시다.’라는 말이 정말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될 수 있습니다. 진짜 교회라면, 참된 성도끼리라면, 이 부활 후에 있을 천국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땅에서 서로 위로를 나눌 수 있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꽃 한 송이 주면서 위로해 주는 것과는 비길 수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싸서 보내 주면서 위로하는 것도 이것에는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무슨 선물을 전해 주고 돈으로 도와주면서 위로하는 것도 큰 힘이 되겠지만, 성도가 천국 소망과 믿음을 나누면서 서로 위로해 주는 이 감격에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이 놀라운 사실, 성도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이 최고의 위로를, 그 어떤 어렵고 슬픈 일을 당할 때에도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 대한 열심과 형제 사랑이 넘치고 있던 데살로니가교회가 정말 더욱 성숙하고 튼튼한 교회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 부활신앙에 대한 ‘소망’과 ‘확신’과 ‘위로’가 꼭 필요했었습니다. 우리가 이 경향교회의 축복된 미래를 함께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들 역시 이 부활신앙 하나만큼은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신자가 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은 아무리 자라나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신앙 없는 교회는 아무리 교인들이 늘어난다 해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며 함께 지옥 구덩이로 빠져 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부활신앙 없이는 아무리 큰 교회당을 지어 놓아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참된 우주적 교회를 공중으로 휴거시키실 때에 그 교회는 그냥 땅바닥에 붙어 있을 뿐입니다. 부활신앙 없는 교회는 제 아무리 세상에서 선한 일 많이 하고 불신사회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예수님 재림하셔서 한번 훅 불기만 하시면 다 날아가 버릴 헛된 공력만 쌓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부활의 소망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이 교회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놀라운 힘을 그 어느 때라도 넘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 이 부활신앙을 우리 신앙의 가장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이 교회 안에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하는 소리가 예배 시간마다 충만하게 넘칠 것입니다. 성도가 피차 위로하고 격려할 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날’을 서로에게 속삭여 줄 줄 알게 되면, 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도 혼자 슬퍼하며 처지는 교우가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네.”라는 약속 그대로, 결국 필리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필리핀 상륙 작전을 개시하던 첫날, 그 해변에서 마이크를 입에 대고 외친 첫 소리는 “나는 이제 돌아왔습니다.(I have returned.)”라는 세 마디의 말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전파를 타고서, 그동안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라는 세 마디의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던 모든 필리핀 사람들과 포로 수용소에 같혀 있던 미군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는 이 네 마디의 주님의 약속을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꼭 같은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그 날에 반드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이제 영원토록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부활 소망’ 안에서 재림을 예비하며, 이 ‘부활 확신’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이 ‘부활 위로’ 가지고 서로 격려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완전히 지키고 이 교회를 함께 든든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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