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고난] 호산나 ! (빌2:5-11)
본문
호산나 ! (빌2:5-11)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아래 제2의 성전을 완성한 것이 주전 516년이다. 이 때 선지자 스가랴는 9-14장에 기록된 예언을 한다. 이 스가랴의 예언 9:1에는 545년 후에 있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 그대로 언급되어 있다. 이 예언은 마21:1-11에서 그대로 응답되고 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 일각에서 짧은 시간동안 일어났던 한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1. 그는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왕이란 다스리는 존재를 말한다. 이 세상과 우주 만물을 참으로 다스리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왕과도 다르다. 세상 왕과는 비교가 안되는 참된 다스림을 하나님은 행사하고 계신다. 이 다스림은 영원 전부터 이제도 그리고 영원까지 이른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을 때 이 고백 속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그리고 절대하신 영원한 왕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1장10-11절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음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고 그래서 세상의 주인 곧 참 왕이시고 땅은 그의 땅이요 이 땅 백성은 다 그의 백성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메시야 왕께서는 참으로 공의를 베푸신다. 구원을 베푸신다. 겸손하시어서 나귀새끼를 타신다. 그는 마침내 모든 전쟁을 폐하시고 평화를 가져오신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를 화평케 하는 유일의 방법이다(10). 메시야 왕은 갇힌자를 해방하신다(11-13). 죄에 갇히고 사탄에 갇히고 욕망에 갇히고 자기의 감정과 이성에 갇힌 자를 해방하시사 하나님의 자녀 곧 참 인간이 되게하신다.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축복과 승리를 주신다(14-17). 그리고 장차 심판주 왕으로 다시 이 땅에 오신다.
메시야 왕이 이러한 분이시니 이러한 왕의 임함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러한 장면을 545년 전에 영적 눈으로 바라보는 선지자 스가랴는 벅찬 감격 가운데서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심 이라고 거룩한 감동과 흥분에 압도되어 외치고 있다.
우리도 스가랴 처럼 예수님을 모셔드리자.그가 어떤 분이신줄 알때 더욱 감격하여 모시게 된다.
예수님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정작 그를 메시야 왕으로 환영한 무리는 소수였고 시골 출신 서민들이였고,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힘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반문화적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 할 줄 아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구제에 힘쓰며 경건생활에 매진하여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는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오직 자기가 죄인이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만 메시야는 왕으로 임하신다. 자기가 병든 자라고 알아야 의원에게로 갈 것처럼 말이다.
오늘 예수님은 메시야 왕으로 임하시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있는가? 저 서기관과 바리새인 처럼 아니면 로마의 관원과 군대들 처럼 자기의 힘과 자기 의를 보전하려 하여 자기 자리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저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 처럼 또는 아이들 처럼 성문으로 나아가서 비록 초라한 행렬이지만 그 분이 뉘신줄 아는 까닭에 즐거이 부르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칠 것인가? 호산나 라는 말은 시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 이제 구원하소서 에서 나온 말로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를 담고있으며 만세 라는 환영과 칭송의 용도가 있다.
2. 메시야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을 종으로 오셨다.
메시야 왕이 세상 왕과 다른 것이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이 되신다는 것이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것이 필요하였다. 갇힌 자를 해방하기 위하여 이것이 필요하였다.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 필요하였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이것이 필수불가결하였다.<십자가의 죽으심>. 이를 위해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다.
예루살렘 호산나 군중은 아마도 이 두번째 사실은 충분히 모른채로 환호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남으로 인하여 신약까지 가지고 있어서 예수의 메시야 역할이 바로 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는 크게 환영하고 속으로는 눈물을 흘려 마땅할지 모른다. 그가 나의 죄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있게되고 이로써 그가 메시야 임을 만천하에 증거하게 된다.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며 맞이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의무도 주어진다. 즉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열심히 해서 세상에 내 이름을 내리라던 자기를 위한 삶의 목표를 죽이고 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하노라 는 새로운 목표를 갖는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해봐야 할텐데 큰일이다 하던 자기 힘 의지하고 살던 사람이 자기 힘 의지하는 것을 죽이고 누가 무슨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 하는 것 같이 하고 무슨 일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힙으로 하는 줄로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심 걱정 없어지고 감사외 기쁨이 있어 찬송이 절로나는 인생을 새롭게 살게 된다. 구원,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이란 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갈2:20).
서기 70년,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예수를 잡는데 가담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은 다 어찌되었던가? 돌이 돌위에 덭놓이지 않은 정도로 철저히 처참이 파괴되고 학살되었다. 망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는 이들은 그 죽음 가운데서도 구원을 얻으며 복음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 왕의 통치는 땅끝에서 땅끝에 이르게 되었고 이제 약속한 바대로 그의 다시오심을 눈앞에 바라보게 되었다.
예수를 왕으로 맞이하자. 그로 나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나의 생업을 나의 가정과 자녀를 다스리게 하자. 할수 있으면 이 사회도 그가 다스리도록 최선을 다하자. 거기에 평화가 있다. 거기에 해방이 있다. 거기에 사망은 물러가고 생명이 있다. 호산나! 높이 부르며 예수 맞이하자.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