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고난] 십자가가 보여준 사실
본문
일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이 한주간동안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의 재판결과 골고다 언덕에서 다른 죄수 2명과 함께 사형집행을 당하는 그러한 한 주간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편에서 보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한 주간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이라고 하면 이 일주간이야 말로 그 어느때 보다, 각자의 삶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할 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부터 이 한주간은 모든 오락을 금하고, 주님의 고난을 몸소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살피는 그런 삶으로 이어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한주간을 의미없이 보내지 말고,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경건의 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1. 십자가를 바라볼 때,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보게됩니다. 사탄은 주님의 출생때 부터 헤롯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면서 먼길을 찾아왔을 때, 헤롯은 새임금이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의 모든 갓난 어린이들을 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이 공생에 들어가면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마치는 순간, 사탄은 다시 와서 그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고, 성전꼭대기에서 내려 뛰라고 했고,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넘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당한 시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을 넘어뜨린 사탄의 유일한 주무기의 시험이었습니다. 요즘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고 우리 앞에서 으름장을 놓듯이 사탄의 무기는 빵의 문제와, 이름을 내는 명예와, 그리고 물질적 부귀영화!, 바로 이것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앞에 굴복 시켰습니다. 이 힘으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3년동안 간곳마다, 이적을 행하고, 권능을 베풀고,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선포할 때 마다, 주님을 책잡으려는 무리들을 동원하여 돌로 치려고 하였고, 급기야는 세상주관자들을 동원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 사탄의 집요한 계획이었고, 사탄의 불의한 모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던 사탄의 세력은 상존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주변 현실을 눈여겨 살펴 보면, 지금도 악(惡)은 선(善)을 박해하고, 불의(不義)는 의(義)를 짓밟고 있는 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 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나, 심지어 종교계에서 까지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이 통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서가에서 많이 읽기고 있는 책중에 '청산되지 못한 유산'이라는 책 속에서도 보면, 친일파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도리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보다 재빠르게 변신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들은 한번도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사는데, 정작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 받친 애국지사들은 당장에 생활고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을 못박던 당시나, 오늘이나, 사탄의 사주를 받는 불의한 세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종교계에도 마찬 가지입니다. 도리어 사이비 이단들이 교회를 가장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심지어 살인집단들이 거룩을 가장하며 세상에서 이름을 들어 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사탄의 세력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주님처럼 거짓이 없이 진실 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바보처럼 돌림을 당하고, 주님처럼 겸손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무엇이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취급 받는 것이 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십자가를 볼 때, 이 세상의 역사는 순간순간 선 보다 악이, 의 보다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2.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 했는가? 라는 문제는 교부시대로 부터 신학적인 큰 논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들이 벌어 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많은 신학적 이론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러나, 거두절미 하고, 우리는 저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인간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운 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한계와 구별됨을 세우기 위함이었고, 더 적극적으로는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교제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탄의 말을 들었으니, 사탄의 세력하에, 즉 사망의 권세하에 살게 된 인간을 그대로 둔다면 다 죽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 2의 아담으로 오셔서, 저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우리는 모두 사탄의 권세하에서,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저가 이끄는대로 살다가 결국은 멸망 받을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건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생각이나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어떤 행동입니까?요즘 사랑한다고 하면서,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육체적 본능적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도리어 자기를 내어 준 사랑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보여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화인 맞은 양심의 탕자들이 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자기 밖에 모르고 살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 저 십자가 앞에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것인줄 압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의 총검은 녹슬어 갔건만, 오늘도 저 십자가는 사랑과 승리의 상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찬양과 영광을 받는줄 압니다.
3.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저 십자가를 볼 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를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바로 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는 음성은 나 자신이 부르짖어야 할 음성이라고 봅니다. 저 십자가는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목마르다'고 웨친것은 곧 나의 목마름을 대신 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한 것은 나를 위한 속죄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것은 내가 바로 저기에서 운명해야 할 처지였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를 바로 바라본 사람들은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올바로 쳐다 본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제아무리 세상의 유혹이 심해도, 제아무리 사탄의 집요한 시험이 있어도, 저 십자가 그늘 밑에서 안식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저 십자가 때문에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저 십자가에서 몸소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만일 십자가로 끝났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 되었겠지만, 이제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트시고 3 일만에 부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십자가 다음에 올 영광의 승리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슬픔과 괴로움과, 죽음의 권세까지도,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검을 휘들으는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만이 담담하게 죽음을 정면으로 대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 모두 절망하고, 울고 불고 하지만, 이제 저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다음에 오는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힘 있게 독수리 처럼 위로 날아 오를 수 있습니다.
1. 십자가를 바라볼 때,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보게됩니다. 사탄은 주님의 출생때 부터 헤롯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면서 먼길을 찾아왔을 때, 헤롯은 새임금이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의 모든 갓난 어린이들을 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이 공생에 들어가면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마치는 순간, 사탄은 다시 와서 그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고, 성전꼭대기에서 내려 뛰라고 했고,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넘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당한 시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을 넘어뜨린 사탄의 유일한 주무기의 시험이었습니다. 요즘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고 우리 앞에서 으름장을 놓듯이 사탄의 무기는 빵의 문제와, 이름을 내는 명예와, 그리고 물질적 부귀영화!, 바로 이것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앞에 굴복 시켰습니다. 이 힘으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3년동안 간곳마다, 이적을 행하고, 권능을 베풀고,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선포할 때 마다, 주님을 책잡으려는 무리들을 동원하여 돌로 치려고 하였고, 급기야는 세상주관자들을 동원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 사탄의 집요한 계획이었고, 사탄의 불의한 모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던 사탄의 세력은 상존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주변 현실을 눈여겨 살펴 보면, 지금도 악(惡)은 선(善)을 박해하고, 불의(不義)는 의(義)를 짓밟고 있는 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 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나, 심지어 종교계에서 까지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이 통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서가에서 많이 읽기고 있는 책중에 '청산되지 못한 유산'이라는 책 속에서도 보면, 친일파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도리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보다 재빠르게 변신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들은 한번도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사는데, 정작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 받친 애국지사들은 당장에 생활고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을 못박던 당시나, 오늘이나, 사탄의 사주를 받는 불의한 세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종교계에도 마찬 가지입니다. 도리어 사이비 이단들이 교회를 가장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심지어 살인집단들이 거룩을 가장하며 세상에서 이름을 들어 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사탄의 세력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주님처럼 거짓이 없이 진실 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바보처럼 돌림을 당하고, 주님처럼 겸손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무엇이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취급 받는 것이 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십자가를 볼 때, 이 세상의 역사는 순간순간 선 보다 악이, 의 보다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2.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 했는가? 라는 문제는 교부시대로 부터 신학적인 큰 논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들이 벌어 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많은 신학적 이론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러나, 거두절미 하고, 우리는 저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인간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운 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한계와 구별됨을 세우기 위함이었고, 더 적극적으로는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교제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탄의 말을 들었으니, 사탄의 세력하에, 즉 사망의 권세하에 살게 된 인간을 그대로 둔다면 다 죽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 2의 아담으로 오셔서, 저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우리는 모두 사탄의 권세하에서,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저가 이끄는대로 살다가 결국은 멸망 받을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건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생각이나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어떤 행동입니까?요즘 사랑한다고 하면서,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육체적 본능적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도리어 자기를 내어 준 사랑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보여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화인 맞은 양심의 탕자들이 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자기 밖에 모르고 살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 저 십자가 앞에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것인줄 압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의 총검은 녹슬어 갔건만, 오늘도 저 십자가는 사랑과 승리의 상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찬양과 영광을 받는줄 압니다.
3.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저 십자가를 볼 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를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바로 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는 음성은 나 자신이 부르짖어야 할 음성이라고 봅니다. 저 십자가는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목마르다'고 웨친것은 곧 나의 목마름을 대신 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한 것은 나를 위한 속죄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것은 내가 바로 저기에서 운명해야 할 처지였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를 바로 바라본 사람들은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올바로 쳐다 본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제아무리 세상의 유혹이 심해도, 제아무리 사탄의 집요한 시험이 있어도, 저 십자가 그늘 밑에서 안식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저 십자가 때문에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저 십자가에서 몸소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만일 십자가로 끝났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 되었겠지만, 이제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트시고 3 일만에 부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십자가 다음에 올 영광의 승리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슬픔과 괴로움과, 죽음의 권세까지도,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검을 휘들으는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만이 담담하게 죽음을 정면으로 대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 모두 절망하고, 울고 불고 하지만, 이제 저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다음에 오는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힘 있게 독수리 처럼 위로 날아 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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