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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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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난주일’이고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고난주간’입니다. 이 시간 봉독한 말씀 마태복음 27:17~27에 의지하여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군병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둘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로 생명을 살리시고, 그 피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22에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너희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양(羊)으로 피를 흘리게 하여 속죄제, 화목제, 번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언제든지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히10:1).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짐승의 피는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심으로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갈4:4)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아무 흠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아시면서도 나귀를 타고 친히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유대교권주의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붙잡아 가지고 급히 재판을 열었습니다. 밤중에는 재판을 열 수 없다는 법을 어기고 당일 밤으로 산헤드린 공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새벽에 예수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한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1)그가 자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 (2)백성을 소란케 했다는 것(요19:7~12) (3)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우겠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고, 백성을 소란케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막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백성을 선동하거나 소란케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이 고발한 죄목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즉시 사형을 언도하고 바로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여론에 신경을 썼습니다. 어느 쪽이 대세인가를 보았습니다. 빌라도는 권좌나 부귀영화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정의의 편에 설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당일에 로마군병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금요일 아침 여섯시 반에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첫째, 군병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본문 29절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웠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금빛 찬란한 면류관을 쓰고 있었는데 로마 군병들이 그것을 흉내내기 위해 면류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씌웠습니다. 그런데 그 면류관이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가시 면류관만 씌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시던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대신 홍포를 입혔습니다(28절). 옷을 입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삶을 누리는 정당한 권리입니다. ①옷은 사람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적절히 보호해주고 피부를 상처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줍니다. ②죄로 인해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된 부분을 가려줍니다. ③맵시를 내고 품위를 높혀줍니다. ④그리고 착용자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김으로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를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이 옷을 벗고 싶지 않은 곳에서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옷을 벗긴 군병들은 대신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혔습니다. 천은 다르지만 로마 황제가 입는 홍포와 비슷한 색깔로 만든 홍포를 입혔습니다. 입혀 놓고는 ‘그래 너도 왕이라는 말이지!’ 하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손에 ‘치리자의 지팡이, 왕의 홀’ 대신에 갈대를 쥐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하면서 그에게 침을 뱉었습니다(30절). 그리고는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갈대를 뺏어서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30절). 이때 머리에 씌워진 가시관 때문에 예수님의 머리에서 피가 났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저주와 고통과 멸시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세상 임금들은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남의 것을 뺏고 착취했지만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멸시와 천대와 저주와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장차 받게 된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 면류관이 바로 의의 면류관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둘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본문 33~35절에 ‘골고다 즉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막15:25). 당시 십자가 형에 사용한 못은 5. 2cm가 넘는 대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입었던 옷은 모두 군병들이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옷을 입지 못하신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죄패가 붙여졌습니다(37절). ‘유대인의 왕 예수’ 라고 씌어진 죄패가 붙여졌습니다. 병행 구절인 요한복음 19장 20절에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된 죄패가 붙여졌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1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 이라고 써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랬을때 빌라도가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나는 다만 ‘나의 쓸 것을 썼다’면서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헬라는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선민이라고 하는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개의 언어야 말로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언어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왜 이처럼 예수님의 죄패를 ‘세 개의 언어’로 썼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전 세계에 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쓴 이 글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빌라도가 ‘나의 쓸 것을 썼다’(요19:22)고 말한 것은 악한 자의 손을 빌려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신 것을 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반드시 써야 할 것을 쓰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정치 종교 문화 등 세계 모든 나라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써놓은 글에는 이처럼 신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赦)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밖는 무리들까지도 용서해 주시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요청하셨다. ‘저들이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주님은 끝까지 이해하시고 끝까지 용서하셨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히4:15)하셨다. 주님은 미움과 조롱과 배신과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그런 자리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들은 죄 없으신 분을 사형수로 대우하셨다(마27:33).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다(사53:3, 마27:35~36).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다.
가상칠언 중의 첫마디 말씀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죄의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중에 드린 기도가 아니었다.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사형수 취급을 당하면서 멸시와 천대 속에 드린 기도였다. 인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기도는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는 곳에서도 잔잔하게 드려졌다(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39~4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회개한 한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한편 강도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욕했다(39절). 악에 바친 나머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까지 욕설을 퍼부었다(40~42절).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회개하였다. 물론 이 사람도 처음부터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마27:44, 막15:32). 이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신적인 위엄을 느끼게 되었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원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와는 다르다는 알게 되었다.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흉악범인 내가 죽은 후에 갈 곳은 어디인가를 생각할 때 두려움이 생겼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한편 강도는 은혜로운 현장에 같이 있었으면서도도 이런 은혜를 받지 못했지만 한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에게 내어맡겼다(42절). 그리고 그는 특히 사후의 세계와 천국이 주님의 나라임을 믿었다(42절). 예수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이 강도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한 어조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였다(43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27)
예수님께서 세 번째 하신 이 말씀은 그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어머니’라고 하는 정감어린 표현대신 ‘여성’이란 뜻의 ‘여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육신의 어머니는 찢어지는 가슴을 더 이상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세심한 배려에서 나온 말이었다. 주님께서 이런 칭호를 사용하신 이유는 훨씬 더 깊은 데 있었다. 이제 나는 본연의 위치인 ‘당신의 주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을 전하는 데 있었다.
주님은 전에 갈릴리 혼인잔치 석상에 포도즙이 떨어졌을 때도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요2:4)라고 불렀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인정한 바 있다(요2:3).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만 놓고 ‘여자여’ 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놓고 볼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을 뿐이다. 마리아는 말하자면 밭이었다. 밭은 씨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당신의 아들이었던 내가 지금 이처럼 위대한 구원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글니 위를 받으십시오. ’ 라고 하는 말씀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뜻이고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로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막15:34, 요19:28).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이 말씀은 시편(22:1)에 기록되어 있다. 시편 기자가 메시아의 당할 아픔을 예언적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시고 인용하셨다.
‘어찌하여’ - ‘어떤 목적을 두시고’이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직임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성부에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순종을 보여준다.
‘버리셨나이까’ -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인들에 대한 ‘진노의 잔’을 그에게 마시게 하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일체이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끊겨지는 아픔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인 동시에 죄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외침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다만 온땅에 어두움이 임해올 뿐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셨다(45절).
십자가 없는 지름길은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히9:22).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죄인을 징계하시고 처벌하시려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범죄한 인생을 덮어놓고 용서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결단을 내리셨다.
 내가 목마르다 (요19:28)
전쟁터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군인들이 가장 절박하게 요청하는 것이 ‘물 한모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극한 갈증 때문에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 유월절 만찬을 드신 것 외에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잡수신 것이 없었다. 그런 중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힘든 기도를 하셨다. 폭도들에게 잡히신 후에 안나스 앞에, 가야바 앞에, 헤롯 앞에, 다시 빌라도 앞에 끌려 다니시는 갖은 수모를 당하셨다. 이미 매도 많이 맞은 바 있다. 무거운 십자가를 운반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많은 출혈이 있었고 심한 고통을 받았다. 주님은 심한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목이 마르면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셨겠는가
참기 어려운 갈증은 십자가 형이 갖는 하나의 특징이다. 주님의 이 목마름은 후일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요4:14)가 되는 ‘구속사적인 갈증’이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요4:14)
 다 이루었다 (요19:30)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여섯 번째 말씀은 ‘승리의 외침’이었다. (‘테텔레스타이’ - 값을 지불하다. 빛이 다 갚아지다. )
1) ‘성경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 사9:6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2) 구원을 다 이뤘다는 말씀이다.
- 히9:22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인간의 죄값에 대한 속전이 드려졌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화목시켰다는 말씀이다.
3)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을 다 마쳤다는 말씀이다. 사명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잘 감당했다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 직을 십자가 위에서 완수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외부적 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발적이요, 능동적인 죽음이었다.
4)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는 말씀이다(마5:17).
- 골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느리라 (의문에 쓴 증서: 빚진 자의 채무증서) 율법 안에서 우리는 죄에 관한한 여호와 하나님께 빚진자였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주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기도였다. 기도가 하는 역할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게 하는데 있다. 기도는 항상 있어야 하지만 죽음을 앞에 놓고 하는 기도야 말로 적절한 기도이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성경 시편 31:5을 인용한 기도였다. 임종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성경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들과 일들에서 성경이 언어와 같은 언어는 없다. 주님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영혼에 대해서 기도하였다. 세속적인 일, 땅의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셨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은 강하고 안전한 손이기에 부드럽고 사랑에 찬 손이기에 그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그의 영혼을 부탁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십자가까지 지고 가셨다. 그리고 거기에 내려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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