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그의 고난을 내 육체에
본문
오늘은 고난주일이다. '고난주일': 사순절 5째주일은 고난주일(Passion Sunday)이다. 이때를 고난주일로 삼는 것은 주님께서는 이때쯤 이미 들어내 놓고 그의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셨을 것이라고 보는데 기인한다.
본문, 마25:37-40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1)주님의 고난이 어떠한 것인가
2)성도가 그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3)최후의 심판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심판주(임금)로 군림한다.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분별한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의 양은 '복받을 자'요 왼편의 염소는 '저주받은 자'이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천국을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한다.
·이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그때 임금이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말씀을 중심하여
1)주님의 고난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2)성도가 그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3)성도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어떤 생활자세를 가지고 살다가 맞이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으며, 왜 그런 고난을 받으셨을까
1)주님은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주리셨다.
주님은 목마르셨다.
주님은 나그네 되셨다.
주님은 벗으셨다.
주님은 병들으셨다.
주님은 옥에 갇히셨다.
주림과 목마름, 나그네됨과 헐벗음, 병듬과 옥에 갇힘, 이는 허물로 죽게 된 인간의 연약함이며, 죄로 멸망할 인간의 질병이었다. 그것을 주님이 친히 담당하셨고, 그것을 주님이 친히 짊어지신 것이다(마8:17).
2)왜 주님은 그런 고난을 받으셨는가
사53:에서 이사야 선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고…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예언하였다(:3-5).
이것이 '주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2. 성도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메시야로 세상에 임하신 주님은 영광의 왕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메시야였다. 그러나 그는 장차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것이다. 본문 말씀은 '최후의 흰보좌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때의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그 앞에 나아가서 그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도 그가 가신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임금의 마지막 말씀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주님께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형제'는 누구를 말하는가
우선적 의미로는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말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 말씀의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기서 말씀한 '형제'란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고 그들 안에서 고난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할 일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만을 위하는 극단적인 사고와 허세를 떨쳐 버리고 항상 눈을 낮은 데 두어 슬픔과 고난과 실의에 빠져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사랑과 온정과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내게 주신 기회, 내게 주신 복, 내게 주신 건강, 내게 주신 물질... 그 모두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님과 그의 '형제'를 위한 것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이들이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성실과 무책임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회관을 왜 우리교회에 주셨을까
실직자를 위한 우리의 고려
병든자를 위한 고려
소외된 자들을 위한 고려 등등...
3. 성도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어떤 생활자세를 가지고 기다릴 것인가
1)재림의 날의 긴박성을 언제나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기 때문이다(마24:36).
2)심판날에 임할 영벌과 영생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헬라어 '콜라시스'란 말은 범죄자를 교정하기 위하여 내리는 형벌을 뜻하는데 여기에 영원(아이오니온)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니 영벌 곧 영원한 형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영생(조에 아이오니온)은 주로 사도 요한이 애용한 낱말로(요한복음에만 17번)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영원한 불행과 영원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에 두고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3)심판의 기준이 무엇임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구원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을 심판하는 기준은 '형제에게 행한'대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약 2:14-2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 2:19) 네가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본문 마25:에 나타난 의인들의 선행은 가난하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순수한 자선의 행위였다.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들은 가난한 자를 말하고, 나그네, 병자, 옥에 갇힌 자들은 고난받은 자들을 대표한다. 성도는 이런 이들에게서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주님께 하듯 그들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심판하는 최후의 기준이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할 것이다.
고난주일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물론 그가 세상에 계실 때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주일이 되어야 한다
신풍교회는 "생명을 나누는 교회"여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다!
주님의 고난을 헛되히 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 마25:37-40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1)주님의 고난이 어떠한 것인가
2)성도가 그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3)최후의 심판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심판주(임금)로 군림한다.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분별한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의 양은 '복받을 자'요 왼편의 염소는 '저주받은 자'이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천국을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한다.
·이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그때 임금이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말씀을 중심하여
1)주님의 고난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2)성도가 그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3)성도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어떤 생활자세를 가지고 살다가 맞이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으며, 왜 그런 고난을 받으셨을까
1)주님은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주리셨다.
주님은 목마르셨다.
주님은 나그네 되셨다.
주님은 벗으셨다.
주님은 병들으셨다.
주님은 옥에 갇히셨다.
주림과 목마름, 나그네됨과 헐벗음, 병듬과 옥에 갇힘, 이는 허물로 죽게 된 인간의 연약함이며, 죄로 멸망할 인간의 질병이었다. 그것을 주님이 친히 담당하셨고, 그것을 주님이 친히 짊어지신 것이다(마8:17).
2)왜 주님은 그런 고난을 받으셨는가
사53:에서 이사야 선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고…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예언하였다(:3-5).
이것이 '주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2. 성도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메시야로 세상에 임하신 주님은 영광의 왕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메시야였다. 그러나 그는 장차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것이다. 본문 말씀은 '최후의 흰보좌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때의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그 앞에 나아가서 그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도 그가 가신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임금의 마지막 말씀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주님께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형제'는 누구를 말하는가
우선적 의미로는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말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 말씀의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기서 말씀한 '형제'란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고 그들 안에서 고난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할 일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만을 위하는 극단적인 사고와 허세를 떨쳐 버리고 항상 눈을 낮은 데 두어 슬픔과 고난과 실의에 빠져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사랑과 온정과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내게 주신 기회, 내게 주신 복, 내게 주신 건강, 내게 주신 물질... 그 모두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님과 그의 '형제'를 위한 것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이들이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성실과 무책임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회관을 왜 우리교회에 주셨을까
실직자를 위한 우리의 고려
병든자를 위한 고려
소외된 자들을 위한 고려 등등...
3. 성도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어떤 생활자세를 가지고 기다릴 것인가
1)재림의 날의 긴박성을 언제나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기 때문이다(마24:36).
2)심판날에 임할 영벌과 영생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헬라어 '콜라시스'란 말은 범죄자를 교정하기 위하여 내리는 형벌을 뜻하는데 여기에 영원(아이오니온)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니 영벌 곧 영원한 형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영생(조에 아이오니온)은 주로 사도 요한이 애용한 낱말로(요한복음에만 17번)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영원한 불행과 영원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에 두고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3)심판의 기준이 무엇임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구원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을 심판하는 기준은 '형제에게 행한'대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약 2:14-2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 2:19) 네가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본문 마25:에 나타난 의인들의 선행은 가난하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순수한 자선의 행위였다.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들은 가난한 자를 말하고, 나그네, 병자, 옥에 갇힌 자들은 고난받은 자들을 대표한다. 성도는 이런 이들에게서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주님께 하듯 그들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심판하는 최후의 기준이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할 것이다.
고난주일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물론 그가 세상에 계실 때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주일이 되어야 한다
신풍교회는 "생명을 나누는 교회"여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다!
주님의 고난을 헛되히 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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